[인디즈 소소대담] 2026. 9 영화의 궤를 따라 지도를 그려 봅시다.
*소소대담: 인디스페이스 관객기자단 ‘인디즈’의 정기 모임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예송 님의 기록입니다.
참석자: 햇빛, 구름, 눈
내 고향 대전이 좋았던 가장 큰 이유는 어디든 가기 좋은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시외 교통편만 있다면 어디든 2시간이면 갈 수 있다는 자신감. 굳이 갈일이 없는 동네도 영화를 만나려다 우연히 인연이 되었다. 가끔은 너무 무모하게 멀리 떠났고, 약간은 가성비가 떨어질지라도 막상 깜깜한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득히 내 정신을 채웠던 영사되던 이미지들이 쉴새없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미련한 이 순간을 끊어내기란 쉽지 않을 거 같다는 확신이 들곤 한다. 영화로 그리는 지도, 각자의 지도가 궁금하다.
* 필리핀으로 영화를 찍으러 가요!
눈: 작년에 마지막 작품을 찍고 눈을 다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이참에 바로 대학원에 가야겠다 결심했는데, 막상 대학원에 가고 나서 고민이 정말 많았습니다. 꾸준히 영화 제작 쪽에 기울여 활동해왔던 제가 영화이론을 전공하며 공부하게 된 지금, 앞으로 계속 영화와 관련된 산업에서 살아갈 텐데 내가 어떤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을까. 사실 제가 가져가야 할 포지셔닝이 너무 보였어요. 이것저것 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동남아시아 영화에 대해 관심이 생기고 있었는데, 굉장히 오랜만에 필리핀 합작 영화의 PD 기회가 왔어요. 계기는 단순했어요. 필리핀 영화는 애초에 국내 수급이 안 되니까 볼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없잖아요. 합작 작품을 하며 교류하게 된다면 필리핀 단편영화의 스크리너도 구하기 쉽고, 다른 나라의 산업에 대한 이해가 더 높아지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학교는 휴학하고 필리핀 촬영을 준비하고 있어요. 물론 무모한 선택이었던 거 같기는 해요.
건강과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다른 나라와 함께 교류하며 찍는 게 처음이라, 신기한 게 정말 많아요. 필리핀의 촬영 문화를 전혀 몰랐는데, 필리핀은 기본 스태프가 30~40명이래요. 국내에는 크게 상용화되지 않은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나, 장비 렌탈할 때, 장비 전문 인력과 함께 대여를 진행한다고 해요. 스태프가 더 세분화 되어 있는 거 같았어요. 그리고 이번 촬영지는 홍수 피해 지역인데 정부가, 침수 피해에 대한 방책을 시멘트를 두껍게 깔아서 높이는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더라구요. 땅은 계속 높아지는데 배수가 잘 안되다 보니, 되려 물고기가 도로에 떠다닐 정도라고 하더라구요.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 나서는 예상했던 그림에 맞는 장소가 있을까 싶었는데, 막상 보니 정말 이런 동네가 있구나 싶어 신기했어요. 로케이션을 보는 눈도 완전히 달라진 느낌이에요.
*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시나요?
눈: 제가 활동 중인 ‘로터리 시네마’가 이번 부국제에서 커뮤니티 비프로 참여해요. [충길이는 문제없어요]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어요. 류현경 감독님의 〈고백하지마〉를 틀어요, 로터리 팀원 중 한 분이 작년 전주영화제에서 〈고백하지마〉를 보셨어요. 너무 재밌다고 소문을 내서, 제가 보기엔 최소 150명은 그분 덕분에 봤을 거예요. 로터리 팀원들도 마찬가지구요. 영화의 배경이 부산이기도 해서 꼭 상영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되어 너무 감사해요. 다들 영화는 어떤 거 보시나요? 저는 우선 라브 디아즈 감독의 신작을 가장 먼저 예매했어요.
구름: 라브 디아즈 신작의 레터박스 평을 찾아봤는데, 누가 "최근 몇 년간 본 라브 디아즈 영화 중 가장 짧은 영화"라고 댓글을 달았더라고요. 그래서 그의 팬이라면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는 의견이었어요.
눈: 맞아요. 필리핀 영화가 국내에 잘 수급되지 못하는 편이라 더 궁금한 거 같아요.
햇빛: 저는 이번에 ‘아시아영화의 창’, ‘비전’, ‘플래시 포워드’ 섹션을 중심으로 보려고요. 부산영화제에는 쉽게 볼 수 없는 나라의 영화들이 있잖아요. 몽골이나 카자흐스탄 같은 나라의 영화를 보는 게 경험상 도움이 되고 기억에도 오래 남더라고요.
구름: 좋은 것 같아요. 부산은 그런 부분이 특화돼 있고, ‘아시아영화의 창’ 섹션도 잘 꾸려져 있고, 월드 프리미어 작품도 많죠. 다만 월드 프리미어라고 쓰여 있으면 평을 좀 더 찾아보려는 거 같아요. 저는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피오르〉와 〈에브리타임〉이라는 영화가 화제가 많이 되길래 궁금했어요. 촬영감독이 〈애프터썬〉의 촬영감독이라고 하더라고요. 요즘 독일, 오스트리아 쪽 독일어권 영화에 관심이 생겼는데, 이번에 관심 가는 영화가 많이 나온 거 같아요. 외에도, 박송열 감독 신작도 보고 싶어서 〈사랑의 지평선 너머로〉를 예매했어요. 이번에는 아이가 생긴 이후의 부부를 다룬대요. 어쩌다 보니 감독님과 원향라 배우가 함께 만든 영화는 거의 다 보고 있는 거 같아요. 그리고 〈어느 날, 아내가 울었다〉라는 영화를 예매했어요. 이것도 독일 감독 영화예요. 저도 이 감독은 처음인데, ‘베를린파’라고 해서 독일 동시대 감독 중에 주목받는 그룹이 있다고 해요. 페촐트를 필두로, 이번에 개봉하는 〈꿈꾸던 모험〉이라는 영화의 발레스카 그리스바흐 감독 같은 사람들이 속해 있는데, 그 멤버라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와줘서 고맙다는 거장의 인사〉라는 영화도 있어요. 에세이 다큐멘터리인데, 감독님 연세가 꽤 많으세요. 원래 유명한 프랑스 감독인데, 아직 보진 않았지만 생애 마지막 영화가 될 것 같다는 소개가 있어서 예매했어요. 그리고 〈리허설 포 레볼루션〉이라는 다큐멘터리도 예매했어요. 자신과 관련 있는 다섯 명 정도의 이야기를 조금씩 모아 이란 혁명을 다시 조립하고, 그걸 지금의 상황으로 어떻게 가져올 수 있을지 다루는 에세이 다큐라고 들었는데, 재밌을 것 같아요.
눈: 1인칭 다큐 형식이기도 하고, 설명을 봤을 때는 홈 비디오 카메라로 찍는 러프한 영화일 거 같아서 궁금했어요. 후기 다음에 들려주세요.
구름: 네, 사실 수입 여부와 상관없이 제일 궁금했던 작품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다〉 였어요. 그런데 영화제에서 약간 긴 시간의 작품을 보는 건 언제나 좀 고민 되어서 우선 보류한 상태에요. 이렇게 담아 놓고 열심히 취소표를 노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말씀드리고 싶었던 흥미로운 네팔 영화가 있는데, 제목이 〈안개 속의 코끼리〉예요. 야생 코끼리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이야기라고 들었고 최근 세계에서 엄청 주목받았다고 들었어요. 외에도 저는 〈필리피냐나〉라는 영화도 흥미롭더라고요.
* 그동안 어떤 영화제를 다녀오셨나요?
구름: 저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다녀왔어요.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단편이 있는 섹션을 봤는데, 〈죽음에 저항하는 혁명〉을 봤어요. 저는 〈액트 오브 킬링〉은 안 봤는데, 몇 년 전 DMZ에서 〈디 엔드〉를 상영했을 때 봤어요. 다큐멘터리 감독이 갑자기 뮤지컬을 찍었다고 해서 다들 궁금해서 보러 갔죠. 그 영화에서 고민했던 내용이 이번 다큐멘터리로 이어지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어요. 〈디 엔드〉는 세상이 멸망한 뒤 한 가족이 벙커에 들어가 살아가는 이야기거든요. 이번에 본 〈죽음에 저항하는 혁명〉은 영생 운동을 하는 집단을 찍은 다큐멘터리인데, 그 사람들은 영양제를 이것저것 먹으면서 젊은 육체를 유지하는 방법을 연구해요. 유사과학 같기도 하고 장사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걸 좀 기괴하게 그려요. 그 거리감이 재미있었어요.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좋게 그려질 거라 생각하고 촬영에 응했을까? 저는 비판적인 시선이 느껴졌는데, 그들도 그 시선을 느끼고 있을까? 카메라가 굉장히 가까이 붙는 지점들이 있어서, 어떤 부분은 거의 극영화처럼 느껴졌어요. 〈액트 오브 킬링〉을 못 봤지만, 자신이 저지른 잔인한 일을 재현하면서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조슈아 오펜하이머가 찍었다고 들었거든요. 그 작품과도 겹쳐 보였어요. 영화 자체는 리듬감이 있고 호흡이 깔끔하며 대담한 시도가 많았어요. 이 섹션을 보고 나서 제임스 베닝의 〈열개의 하늘〉과 함께 에리카 발솜의 마스터클래스를 들었어요. 저는 에리카 발솜의 책을 재밌게 읽어서 갔는데, 발솜이 〈열개의 하늘〉을 다룬 단행본도 썼더라고요. 저는 생각보다 더 영화가 좋았어요. 멍하니 보고 있으면 은근한 긴장감이 있어요. 언제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요. 중간중간 비행기도 지나가고 새도 날고 총소리도 들려요. 그런 부분이 흥미로웠어요. 그리고 나중에 친구와 이야기하다 떠올린 건데, 하늘을 보려면 보통 올려다보거나 누워야 하잖아요. 그런데 앉아서 정면으로 하늘을 100분 동안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어요. 필름 질감으로, 앉아서 정면으로 거대한 하늘을 보는 거죠. 게다가 영화를 보는 동안 바깥에는 진짜 하늘이 있잖아요. 그래서 기분이 묘했어요. 강연도 정말 좋았어요. 풍경 영화의 역사와 계보를 짚고, 그게 왜 지금 유효한지를 이야기하셨어요. 책이 나오면 서점에서라도 읽어볼 것 같아요. 보러 온 사람들도 되게 많았어요.
눈: 저는 가능한 온라인 상영작은 빼고 예매했어요. 우선 〈스카이랩: 우주의 노동자들〉이란 작품을 봤어요. 우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 관한 작품인데, SF라는 개념을 다큐멘터리로 목도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생경한 느낌이 들었어요. 흥미로웠던 건, 여러 인물이 나와서 계속 증언하고 발언하는 구성이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수국〉이라는 영화를 봤어요. 1회차 상영 후에 〈수국〉에 대한 평이 정말 좋아서 봤는데요. 사적 다큐멘터리로, 재일 조선인인 주인공이 할머니 집이 너무 낡아 이사하기 전에 잠시 일본으로 건너가 할머니 동네에 머물면서 할머니를 지켜봐요. 할머니를 지켜보며 자신에 대해 회고하는 데 과거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온 주인공이 역사 시간에 처음 배운 일본이라는 개념 때문에 겪는 혼란 같은 것도 나와요. 담담하게 잘 풀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미있었던 건, 주인공이 카메라를 드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카메라를 내려놓고 직접 출연하기도 한다는 점이에요. 그게 사적 다큐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창작자이자 피사체가 되는 순간의 겹쳐짐이 반복될 때 물리적으로 똑같은 영상이 반복되는 형식으로 표현되더라구요. 이를테면 극영화에서는 인물이 회상을 하기 위해 영상이 반복되는 경우가 있지만, 다큐멘터리에서는 흔치 않잖아요. 감독님이 그걸 의도적으로 활용하시는 게 인상깊었어요.
구름: 제 친구도 정말 재미있게 봤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영화들이 눈에 많이 들어와요. 예전에도 많았을 텐데 요새 더 많이 주목받는 거 같아요. 양영희 감독(〈수프와 이데올로기〉, 〈가족의 나라〉)의 영화도 그렇고, 최근의 〈도라지 불고기〉도 생각 나네요.
눈: 아시아의 디아스포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감독님들은 꾸준히 계셨는데, 그 이야기가 이제 진짜 한국 내부로 들어온 느낌이에요. 지역이나 무국적성과 관련한 이야기가 이전까지 더 많이 보였다면 요새는 재일조선인, 세대를 거쳐 나오는 정체성에 관련한 사적 다큐멘터리의 영역이 넓어지는 거 같아요. 여기서 추가로 DMZ영화제에서 영화는 〈하산과 가자에서〉라는 작품이랑,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라는 영화를 봤어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적 특성도 뒤섞여 있었어요.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는데, 중간에 거울을 들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장면이 있어요. 보면서 "각도가 조금만 틀어지면 카메라맨이 보이겠다" 생각했는데, 그 생각 직후에 카메라맨이 그냥 화면 안, 거울 속으로 들어와서 계속 찍는 거예요. 극영화적이던 장면이 단숨에 다큐멘터리로 바뀌는 경험이었어요. 그게 정말 재미있었어요. 외에도 극영화적으로 대화하다가 갑자기 카메라나 필터가 바뀌면서 대사가 전달되는 느낌을 다르게 만들어 버리는 식으로, 장면을 되새김질하는 구성이 많았어요. 성장 다큐 같은 느낌도 있어서 좋았어요.
구름: 이번 DMZ에서 카말 알자파리 감독 전작전이 열려서, 그중 한 편을 온라인으로 봤어요. 〈아다치 마사오 여권 사진을 찍다〉 라는 영화였는데, 저는 정말 좋았어요. 아다치 마사오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어요. 아다치 마사오는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무장 투쟁에도 가담했던 사람이라 여권이 발급되지 않는다고 해요. 그럼에도 그는 계속 사진을 찍어 여권을 신청하는데, 영화는 그 시도 중 한 번을 다뤄요. 이번엔 될지도 모른다며 또 사진을 찍으러 가요. 그 사진관은 40여 년간 같은 자리를 지켜온 오래된 곳이에요. 원래 부부가 운영했는데 남편분이 돌아가시고 지금은 할머니 혼자 사진을 찍으세요. 그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된 아다치 마사오를 찍어주는 게 영화의 전부예요. 어차피 신청해도 여권은 나오지 않을 텐데요. 이분은 아직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시잖아요. 몇 년 전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암살당했을 때도 바로 그 사건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고(〈레볼루션+1〉), 그 뒤에 〈도주〉도 만들었고요.
햇빛: 피해자는 죽었어도 가해자는 살아 있는데, 그걸 바로 극영화로 만드는 게 정말 대담하시네요.
구름: 기개가 느껴지죠. 여권은 영원히 안 나오겠지만 계속 신청하는 거예요. 사진관 할머니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신청하면 다 나오죠"라고 하시면, 그가 "그게 쉽지가 않아서요. 지금 정치인들이 저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라고 해요. 그러면 할머니가 다시 "그래도 이번에는 되겠죠"라고 하세요. 그런 분의 초상을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을 담는 감독이 담는다는 것도 신기하게 느껴졌어요. 담고 싶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 2026년 9월에 극장에서 만난 영화들

〈환희의 얼굴〉
[리뷰]: 이야기의 마법(이수미)
[단평]: 노동의 가시화(남홍석)
구름: 〈환희의 얼굴〉을 봤는데요. 감독님이 홍상수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분이더라고요. 촬영감독님도 그렇고요. 홍상수 영화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던 거 같아요. 카메라를 고정해 놓고 인물들이 떠들게 하고, 또 걷고, 또 어딘가 가서 떠드는 거요.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움직임이 아니라 멈춰 있는 것들로 긴장감을 만들었던 거 같아요. 예를 들어 커피를 마시다 절반만 남겨 두면 왠지 불안하잖아요, 곧 무슨 일이 생길 것 같고요. 그런 식으로 서스펜스를 주는 영화라서, 생각보다 긴장한 상태로 봤어요. 가만히 서서 쳐다보거나 두 사람이 대화만 하는 장면에서도 긴장의 끈이 잘 끊어지지 않았어요. 적어도 저한테는요. 배우들이 쓰는 말이 일상어가 아니라서 더 긴장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김시은 배우는 약간 문어체로 말하는데, 그 연기가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감정선이 잘 잡히지 않고, 왜 이랬다가 저러는지 계속 궁금한데, 그 긴장이 끝까지 남아 있는 게 저한테는 재밌었어요. 이 영화를 보고 바로 떠오르는 주제는 아니겠지만, 저는 노동이라는 모티프가 흥미롭게 들어 있다고 느꼈어요. 예를 들어 주인공이 일하는 식당이 있는데, 그 식당에는 사장과 아르바이트생 두 명만 있을 수 있는 구조예요.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모두가 그 사실을 당연하게 알고 있어요. 주인공은 입사 한 달 차이고, 오래 일한 사수가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몇 년 전 그 식당에서 일했던 직원이 다시 와요. 이제 사수와 주인공 중 한 명은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는 거죠. 사수는 자기가 버려질 거라고 계속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런 기미가 보이는데, 그 와중에 주인공이 사직서를 쓰고 나가요. 고용 불안이라고 하면 좀 거창하지만, 이 삼각 구도를 고용과 해고의 논리로 풀어가는 게 흥미로웠어요. 그 밖에도 일을 안 하고 돈을 버는 사람, 일을 해서 돈을 버는 사람, 일인지 아닌지 모를 일로 돈을 버는 사람, 하늘에서 갑자기 돈이 떨어지는 사람, 그런 모티프가 영화 속에서 계속 나타나요.
김시은 배우는 소설가로 나오는데, 스스로를 '3류 소설가'라고 불러요. 북토크를 해도 서점 사장님이 미리 섭외한 사람들만 와서 앉아 있는 그런 소설가예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만족감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에 회의를 느끼는 인물이에요. 여기서 주인공 환희는 예전에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배운 사람으로 보이고, 그녀의 소설을 정말 좋아해요. 그런데 영화 속에서 환희만큼 그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김시은 배우가 "이번 소설은 돈 벌려고 썼어, 내가 잘하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라고 말하는 장면도 재밌었어요. 흔히 글쓰기를 노동이라고 잘 생각하지 않잖아요. 작가라는 직업은 영화에서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도 초반에 펜으로 종이에 사각사각 글을 쓰는 장면이 있고, 장과 장 사이에도 사각거릴 것 같은 휴지를 넣고, 영화 전체가 단편소설집 같은 구성이라 처음에는 참 소설적인 영화다 싶었어요. 그런데 후반부에 그 대사가 나오면서, 맞다, 이것도 일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숨어드는 산〉
[리뷰]: 그 시간, 그 공간(남홍석)
[단평]: 한 사람에게 붙은 이름(박주연)
햇빛: 저는 최창환 감독의 영화들이 정말 스펙트럼이 넓다고 생각해요. 청년 노동자의 삶처럼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도 있고, 〈숨어드는 산〉처럼 2020년에도 제5공화국이 이어지는 대한민국을 설정한 픽션도 재미있게 만드세요. 〈식물카페 온정〉이나, 〈여섯 개의 밤〉처럼 대화로 이루어진 잔잔한 영화도 있고, 〈수학영재 형주〉도 찍으셨잖아요.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폭이 넓다고 생각해요.
* 9월의 인디즈 추천 영화
햇빛: 〈회생〉(김면우, 2026)
전주국제영화제 때 〈회생〉을 보게 되었어요. 아까 사적 다큐멘터리에 대해 이야기를 했잖아요. 올해 좋은 사적 다큐가 많이 나오는 것 같다는 맥락에서 추천하고 싶어요. 이 작품은 김면우 감독님의 삶에 대한 가치관이 종교적인 면과 생활적인 면에서 잘 어우러져 드러나는 영화예요. 산다는 게 무엇인지,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주는 정말 좋은 작품이었어요.
구름: 〈친숙한 손길〉 (사라 프리들랜드, 2026)
요양시설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요. 요양시설에서 지내는 어르신들에게도 욕망과 권리가 있고, 누리고 싶은 삶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예요.
눈: 〈호루몽〉(이일하, 2026)
이일하 감독만의 스타일리시함으로 만든 영화를 볼 때마다 재밌으면서도, 왜 재미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어요. 〈호루몽〉은 주인공인 재일 조선인 신숙옥 선생님에게서 받은 영향이 컸을거라고 생각해요. 요새 관련한 숏츠가 계속 sns에 뜨는데 많은 사람들이 더 보게 되면 좋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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