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버린 시공간의 틈새로 잠시 쉬는 숨
보통의 우리, 우리의 2000`s 섹션 2 - 가리베가스 그녀, 잠시 숨을 쉬다 무대인사 기록
일시 2021년 10월 30일(일) 오후 1시
장소 인디스페이스
참석 이승준, 박지연 감독
진행 맹수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프로그래머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현지 님의 글입니다.
모든 것이 다 변해버린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묵묵히 일상을 채워가는 사람들. 화면 속의 인물들 혹은 캐릭터는 비단 그들만의 시간이 아니다. 우리의 2000년대는 모두가 경험한 보통의 시간이었으며 현재에도 다 함께 회상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급격하게 땅을 뒤엎으며 세워지는 아파트들 속으로 사라지는 도시의 사람들, 이전 공간과의 틈에서 불안하게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2021년의 우리와 닮아 있다. 익숙했던 공간에서 떠나고 사라진다는 것은 언제나 익숙지 않다. 코로나 19로 인해 많은 문화예술이 뿔뿔이 흩어지는 요즘, 20년 전 치열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 보려 한다.
맹수진 프로그래머(이하 맹수진): 요즘 가을이 나들이 많이 다니시는데 이렇게 오래 전 영화를 보러 와주신 관객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지금 네 편의 영화가 상영이 됐는데 〈폐허, 숨을 쉬다〉의 이승준 감독님, 그리고 〈도시에서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것들〉의 박지연 감독님이 오셨습니다. 두 분 모시고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이해주시길 바랍니다.
박지연 감독(이하 박지연): 안녕하세요. 박지연입니다.
이승준 감독(이하 이승준): 안녕하세요. 이승준입니다.
맹수진: 지금 이 기획전의 제목이 ‘보통의 우리, 우리의 2000`s’인데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개인적으로 들었던 생각이, 어쩌면 한국 독립영화, 단편영화를 치열하게 만들고 비평이 이루어지던 시기의 영화들이더라고요. 이 기획전에 상영되는 영화들은 그 시절 논의가 많이 되었던 작품들이 많은데요. 어쩌면 가장 치열했던 그 시기를 다시 한 번 현재로 불러오는 시간여행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네 편의 영화들이 함께 반항을 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가리베가스〉 같은 영화는 지금 감독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기도 한데요. 이제 서울극장은 영업을 종료하고 이 자리에 인디스페이스,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아주고 계신데요, 이 공간이 주는 의미, 오늘의 체험, 그리고 우리가 본 영화들이 모두 함께 공명하는 느낌이 들어서 저는 사실 굉장히 묘한 느낌이에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두 감독님도 오래간만에 영화를 보셨을텐데 어떤 소감이 좀 있으실 것 같아요.
이승준: 저는 다른 감독님들 작품은 오늘 처음 본 건데 모두 철거 현장이 나오더라고요. 우선은 그때 대한민국 사회가 외향적으로 변화를 꿈꾸는 시절이었다는 게 새삼 느껴졌고 그 다음에 제 작품 보면서는 그게 참.(웃음). 다큐멘터리를 하기로 마음 먹고 난 뒤 한 3년 정도 있다가 만든 작품인데요.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막 하려고 그랬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시 보면서. 그래서 오히려 내용적인 것보다도 그때의 제가 좀 생각이 났어요. 그때의 나는 어떻게 작업을 하려고 그랬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지. 이런 것들을 굉장히 오랜만에 느꼈던 시간이었습니다.
맹수진: 저는 〈폐허, 숨을 쉬다〉가 감독님의 첫 작품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전에 어떤 작업들을 하셨나요?
이승준: 돌아가신 이성규 감독님이 제 사수였는데요. 공동연출한 〈보이지 않는 전쟁: 인도 비하르 리포트〉가 첫 번째 작품이고 혼자 연출한 작품으론 이 작품이 처음이었습니다.
맹수진: 박지연 감독님은 어떠세요.
박지연: 저도 영화를 쭉 보면서 2000년대에 굉장히 큰 변화가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고. 저는 2008년도에 만들었는데 작품에 반영된 시간은 2000년도 초반 정도였습니다. 제가 처음에 서울에 올라온 뒤 느낀 것들을 반영한 거예요. 다른 감독님들도 이런 작업들을 많이 한 걸 보니까 아까 말씀하셨듯 시간여행하는 느낌도 들고, 그 짧은 시간에 큰 변화가 있었구나 이런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업을 할 때 목동의 지하 작업실에서 6개월간 열심히 만들었던 기억이 많이 나고. 그 뒤에 제가 지금까지 세 작품을 또 만들었거든요. 시간이 흐른 게 느껴져서 오늘 굉장히 많은 생각이 들어요.
맹수진: 이승준 감독님은 이 작품을 만든 게 20년 전이잖아요. 조금 더 자세하게 들어보고 싶어요. 이승준 감독님이 인물에 대한 관찰력이 굉장히 뛰어난 분이세요. 그것을 거칠게 표현하기보다 굉장히 매력적으로 탄탄하게 영화를 만드셨는데 이때 디지털 초창기잖아요. 어쩌면 그래서 공간에 팍팍 들어가서 굉장히 가깝게, 용감하게 찍었다는 느낌도 들어요. 앞서 언급하신 ‘그때 내가 이런 걸 하려고 했구나’라는 말씀을 조금 좀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승준: 저 작업을 할 때 제가 출판사에서 사진작가들과 다큐멘터리 작업을 같이 했어요. 다큐멘터리 잡지를 내면서 저는 영상 파트로 간 건데요. 시골에 가서 사라져가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아주 일상적인 모습들을 담는 작업을 하면서 다큐멘터리 작업 시 인물에 대한 접근, 거리감이라던지 무엇을 찍어야 되고 어떤 풍경을 봐야 되고 이런 것들이 많이 학습된 시기였어요. 그러던 와중 이 영화 속 공간을 알게 되고, 굉장히 아이러니하게도 죽어 있는 자본주의의 공간, 대도시의 욕망이 가득한 공간 속에서 작은 행복을 발견하신 한 할머니를 알게 됐죠. 그래서 할머니와 접촉하고 할머니를 존중하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제가 하고 싶었던 거는 그런 거였어요. 그 공간에서 제가 직접적으로 느꼈던, 도시의 못생긴 욕망 속에서 어떤 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풍경, 할머니의 행복한 순간들을 그려내고 싶었어요. 저는 어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아니면 사람을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둘 중 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측면에서 〈폐허: 숨을 쉬다〉는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작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죠.
맹수진: 박지연 감독님의 〈도시에서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것들〉은 그 당시에도 새롭고 신선한 표현력이 눈에 띄는 작품이었어요. 왜 이 영화가 이렇게 좀 이렇게 신선하게 느껴졌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사람들이 어떤 개념들을 생각하잖아요. 뿌리 뽑힌 삶, 허공에 내어진 삶, 휙 날아갈 것 같은 그런 허약한 존재들, 도시라고 하는 어떤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런 추상적인 개념을 물리적으로 표현해버려요. 뿌리 뽑힌 도시에서의 삶을 포크레인에 들린 집의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처럼요.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도시에서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것들〉을 작업하실 때 어떤 느낌을 표현하고자 하셨는지, 이후에 세 번 작업을 더 하셨다고 했는데 어떤 변화, 내지는 지속되는 것들이 있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박지연: 그때 집이라는 공간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옥수동에 월세 15만 원 정도 되는 집에서 아는 언니랑 같이 살면서 도시의 풍경들을 계속 봤어요. 그 동네가 도심 안쪽에 있으면서도 굉장히 가난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거든요.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풍경들. 그리고 거기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 이런 것도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때 제가 하는 모든 것들, 집이나 직장이나 모든 것들이 다 불안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작품에 담고 싶었습니다. 집이라는 곳이 불안한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어떻게 할까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처음에는 한강 다리 옆에 조그맣게 집을 붙여 놓을까 생각하기도 했고. 이렇게 도시를 보는데 크레인이 굉장히 많았던 시절이었잖아요. 그래서 크레인에 매달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제가 2D 애니메이션 작업만 해서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 잘 살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3D 애니메이션 하는 분을 모셔서 집을 구현하는 데에 굉장히 공을 많이 들었어요. 결과적으로는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굉장히 잘 담겨서 나온 것 같아요. 여자의 불안한 느낌도 표현하고 싶었지만 이별에서 오는 어떤 감정들까지 같이 담고 싶었는데, 다음 작품에서 이어지는 권태나 떠나지 못하는 감정들을 계속 담아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뒤에 만든 새 작품이 다 약간 비슷한 느낌들을 다 가지고 있어요.
맹수진: 도시에서의 삶, 불안한 심리. 그러한 감정들이 친구나 연인과의 관계가 어긋나면서 더 증폭되는 이 느낌을 받았어요. 굉장히 재밌던 게 조금만 균형이 어긋나도 추락할 것 같은 그런 느낌들을 굉장히 잘 표현했단 말이에요. 근데 부동산 사람들이 오거나 할 때는 집의 떨림이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은데 그 남자가 왔을 때 더 심하게 흔들리잖아요. 도시의 틈새에 있는 사람들이 고양이처럼 생활한다고 할 때 남자친구의 모습, 고양이 가면을 쓴 그 모습도 어찌 보면 도시에서 쫓겨다니고 불안한 어떤 존재일 텐데 주인공의 집에 올 때마다 그 남자는 살이 찌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도시의 불량들과는 좀 다른 거죠. 그 남자가 점점 살이 찌는 설정을 하시게 된 이유는 뭐였을까요?
박지연: 도시의 길냥이들이 생각보다 살이 쪄 있습니다(웃음). 글쎄요, 이 남자의 욕망이 점점 커지는 걸 이렇게 살이 찌는 걸로 표현했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람, 이 고양이가 먹는다는 의미는 성욕과도 비슷한 결로 생각했습니다. 이 여자를 잡아먹고 살이 찌고. 욕망을 이미지로 캐치가 되게 표현을 해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맹수진: 〈폐허, 숨을 쉬다〉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영화인데요. 혹시 주인공분은 지금 연락이 되시나요?
이승준: 영화가 만들어지고 몇 년 후에 돌아가셨어요. 촬영할 때 이미 여든다섯이셨고. 따님하고 연락이 닿는데 전화를 드렸더니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해주셨죠.
맹수진: 쾌활하신 분이잖아요. 다른 사람들 같으면 다 없어질 걸 굳이 뭘 심고 땅을 돌보고 텃밭을 만드냐고 할텐데 굉장히 즐겁게 그 일을 하시는 느낌이었어요. 사회학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할머니의 노동에서 숭고하다는 느낌까지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은 뭘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감독님이 영화에 담게 되는 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것 또는 그들을 불행하게 하는 것 두 가지라고 하셨죠.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힘을 받았던 것은 그 행복한 에너지였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구성도 감독님이 주로 하셨잖아요. 이런 에너지가 있는 할머니를 보여줄 때 구성의 전략들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이 인물과 이야기의 흐름을 어떻게 구성하셨는지 조금만 더 자세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승준: 캐릭터, 주인공이 갖고 있는 모든 재료들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할머니께서 실제로 저렇게 밭일하면서 노래를 하세요. 자연스럽게 그 흥이 드러나니까 당연히 그것도 원재료인 것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 번 노래하는 장면을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순서는 제가 처음 할머니를 만나고 또 할머니를 통해서 알게 되는 순간들을 따라가려고 했고요. 맨 마지막에 파를 수확하고 나서 영화를 끝내는 걸로 잡았어요. 이 할머니가 갖고 계신, 뭐랄까요. 몸에 배어 있는 삶에 대한 태도는 머리에서 나오는 건 아니에요. 그런 분들이 계세요. 시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삶을 촬영하다 보면 어르신들이 살아오신 삶이 결코 만만한 게 아니었거든요. 근데 되게 시크해요. 그간 느낀 고통이 있을 텐데 시크하고 쿨하면서도 되게 긍정적인 에너지도 있고. 그렇다고 되게 교훈적이시지도 않아요.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드러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맹수진: 네 편의 영화 모두 어떤 틈새에서의 생명, 삶에 대해서 끄집어내는 그런 영화들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떤 영화는 행복하고 긍정적으로 표현한다면, 또 어떤 영화는 조금 아프게 또는 공포스럽게, 또는 우울하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조명했던 거죠. 삶은 지속되고 있는데 사회는 급속하게 변하며 기존의 것들을 다 엎는 움직임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캐릭터들을 잘 찾으셨을까 궁금했습니다.
이승준: 일부러 그런 사람을 찾으려고 하기 보다도 제가 관심을 가진 상황 속에 인물을 만나면 대체로 어떤 에너지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어떤 상황, 어떤 갈등, 어떤 문제를 갖고 있는 인물을 찾기 마련인데, 그분들이 보통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고 그런 상황 속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갖고 있는 그런 에너지들이 있거든요. 그런 걸 발견한 거예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저도 모르게 끌렸겠죠.
맹수진: 오늘 본 영화들은 소멸되고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고 남기려는 영화들이에요. 기억의 문제일 수도 있고 공간의 문제일 수도 있고 시간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남기려는 노력을 느꼈어요.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그 당시 치열한 삶,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공유하던 결기 같은 것이 확실히 존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점에 이런 기획전을 하게 되는 것도 그런 지점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인디스페이스도 어딘가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겠죠. 분명히 독립영화는 계속 만들어질 것이고 상영이 될 것이고, 지금 이 공간은 사라지더라도 다른 곳에서 또 새로운 삶을 또 살아나가겠죠.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여기서 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이 순간만큼은 진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제 마무리하도록 할게요. 계속해서 이 두 분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큰 격려와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승준: 감사합니다. 상영 중인 다큐멘터리 〈그림자꽃〉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박지연: 네 작품이 함께 상영이 되어서 좋고 매우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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