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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 Review] 〈97 혜자, 표류기〉: 나의 항구는 나

by indiespace_가람 2026. 10. 2.

〈97 혜자, 표류기〉리뷰: 나의 항구는 나

* 관객기자단 [인디즈] 강신정 님의 글입니다.

 


좋게 좋게. 그게 안 되는 여자들을 살면서 몇 명 못 봤다. 딱 한 명 떠오르는데 그 친구는 언제나 화나 있거나 울고 있었다. 그리고 항상 다른 길을 찾고 있었다. 가라앉는 땅의, 가장 변두리에 매달린 사람처럼. 어디든 가겠다는 듯 친구는 물속에서 발차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옆에서 가만히 숨이나 참던 내게 그가 신 같던 때도 있었다.

 

영화 〈97 혜자, 표류기〉 스틸컷


〈97 혜자, 표류기〉의 ‘혜자’에게서 그를 봤기에 혜자가 밉지 않았다. 표정 관리나 사회생활에 재주가 없고, 입이 험하고, 담배를 달고 살고, 여자이기에 던지는 폭력이 오면 기꺼이 받아치고 마는 여자. 이렇게만 해도 인생이 팍팍할 텐데 혜자는 계약직에 가난하고 서울에서 일하지만 서울 사람이 아니다. 부여잡을 거라곤 자기 자신뿐인 이 여성이 얌전하게 살길 바라는 건 모순 같다.

험한 인생보다 더 험하게 혜자는 나아가야 한다. 엄마를 만나러 고향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영화는 혜자의 여정을 더욱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혜자의 성깔은, 모종의 사건으로 친한 이모 ‘희숙’과 수금하러 다닐 때 빛을 발한다. 희숙이 한 대 맞으면 불같이 화내주고 마음 약한 희숙을 대신해 돈을 받아내기도 한다. 시장 바닥을 뒹굴며 몸싸움도 서슴지 않는다.

 

영화 〈97 혜자, 표류기〉 스틸컷


안전하고 따뜻한 고향이 아닌, 혜자를 다치게도 하는 부산. 차가운 서울에 지친 혜자가 부산행 기차에서 숨을 고를 때만 해도 우리가 기대했을 정감 있는 고향은 어디에도 없다. 카메라 역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흔들려 주며 부산만의 고약함을 담는다. 한때 잘 나갔지만 망해가는 공장 부자(父子)의 얼굴에서, 건강과 정신을 잃은 방구석 노인의 신음에서, 오락실 도박으로 시간을 때우는 청년들에게서, 우리는 부산의 흥망성쇠를 본다. 고향과도 어긋나는 건 이방인의 숙명이라고 말하듯, 그런 부산의 풍경은 혜자 뒤에서 자연스럽다.

 

영화 〈97 혜자, 표류기〉 스틸컷


강남역 자가도 따뜻한 고향도 없는 이. 정박하지 못하는 배 같지만 그 덕에 자유롭다. 새로운 일을 구했는지 높은 트럭에 올라타 길을 달리는 혜자가 용감해 보이는 건 그래서다. 부산 도로 위의 그가 서울에서 도망쳐 온 사람 같지 않아 보이는 이유도. 혜자의 흥얼거림이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같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건 어디든 갈 수 있는 거라고 믿는다는 듯 당차다.

앞으로도 험난할 표류기에서 혜자가 닻을 내릴 곳은 부산도 그 어느 곳도 아닌, 자신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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