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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돌들이 말할 때까지〉 인디토크 기록: 우정의 이름으로

by indiespace_가람 2024. 5. 2.

우정의 이름으로

〈돌들이 말할 때까지〉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4년 04월 19일(금) 오후 7시 30분 상영 후

참석 김경만 감독 

진행 변영주 감독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윤정 님의 기록입니다.

 

 

필연적으로 마주칠 끝을 향해 우려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종종 소멸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다. 역사의 모든 개인들은 그렇게 하나 둘 잊혀졌지만 개중에는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는 얼굴과 목소리들이 있다. 잊혀지지 않는 날들의 기억이 살아있는 사람의 입을 통해 세상에 나올 때, 소멸된 줄 알았던 이야기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 더이상 그 무엇도 겁내지 않고 그저 멀리 뻗어 나갈 수 있다. 목소리의 떨림과 울림이 모든 이에게 전해지기를, 부디 우정의 이름으로. 

 

 

 

 

변영주 감독(이하 변영주): 안녕하세요, 변영주 입니다. 제가 이 영화가 끝나고 아직 2024년의 절반도 안지났는데 올해 최고의 다큐멘터리를 봤다고 생각했습니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 김경만 감독님 모시고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김경만 감독(이하 김경만): 안녕하세요, 〈돌들이 말할 때까지〉 감독 김경만 입니다. 

 

변영주: 그럼 제가 먼저 감상과 함께 질문을 드려보려고 해요, 푸티지들을 이용해서 편집을 하거나 어떤 부분을 발췌함으로 인해서 묘한 감정을 주는 다큐멘터리를 저는 직접 만든 적은 없지만 너무 좋아하는데, 영화를 보기 이전에도 그런 방법들을 택했을거라고 생각했고 실제 전개 방식들 역시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일단 놀랐다가 그 과정들을 보며 너무 반했는데 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가 무엇보다도 궁금합니다. 그리고 작품의 방식도 바뀌게 된 것 같은데 거기에도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김경만: 사실 4.3 영화를 원래 만들고 싶었다라고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4.3이 사실 10년 전만 해도 더 알려지지 않았었고 근데 제가 생각할 때는 이렇게 큰일인데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좀 이상했던 거죠. 그래서 이런 얘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진행 해보니까 저 혼자 무턱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기회를 찾아보려고 4.3 관련된 행사 촬영도 해보고 인연이 돼서 제주도에 있는 4.3도민연대 선생님들께서 먼저 연락을 주셨어요. 행운이었던 거죠. 그분들을 면접 조사하니까 촬영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영화입니다.
 

변영주: 이제까지 해왔던 작업과는 조금 다른 방식의 작업이잖아요. 고민이 되게 많으셨을 것 같아요.
 

김경만: 근데 오히려 4.3 영화니까 당연히 이런 식으로 만들어야 될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제가 예전에 했던 방식은 푸티지를 가져오다가 제가 작업을 하는 방식으로 편집해서 제 촬영도 이제 같이 넣는 방식이었는데 그때는 원했던 게 푸티지들의 관계성이나 충돌 같은 것들이었어요. 근데 여기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들이랑은 방식이 조금 많이 달랐던 거죠. 4.3은 일종의 정공법으로 4.3의 분위기나 4.3이 어떤 일인지 관객에게 느끼게 하고 싶다는 것이 저의 목표였으니 이렇게 만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4.3에 대한 필름 같은 것도 거의 부재하다시피 하니까 그렇게 만들고 싶어도 사실은 만들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처음부터 제주도의 자원을 이용해서 4.3의 분위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변영주: 이게 4.3 연구자들과 함께 작업을 하게 된 거면 실은 영화에 나오지 않은 굉장히 많은 증언자들을 녹취하듯 기록하셨을 거잖아요. 근데 그 중에서 영화에 등장하는 이분들이 감독에 의해서 선택되어졌던 기준이 있나요?
 

김경만: 도민연대 선생님들과 같이 다니면서 촬영을 했던 분이 한 120여 분 정도 되고 그분들 모두가 4.3을 직접 겪으신 생존자분들은 아니세요. 연세가 다들 많으시니까 많이들 돌아가셨기 때문에 사실은 과반 이상은 유가족분들이 더 많으셨고요. 처음에는 영화를 한 편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너무나 방대하고 하나로 묶여지지가 않았어요. 계획한 구성상에서 욕심이 생기니 이것저것 해보다가 결국은 욕심을 좀 내려놓고 나중에서야 선택을 한 게 이 다섯 분의 할머니였어요. 이유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원래 하고자 했던 목표 중에 하나가 4.3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거였으니까 거기에 비추어 봐서 이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정말로 깊게 가슴에 다가오는 거죠. 그리고 아무래도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니까 할머니들의 어떤 외형적인 부분이나 표정, 말투,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고려하게 됐는데 결과적으로 그런 부분들이 다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이 부분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서 할머니들만의 얘기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영화가 공개되고 나서 지금 되돌아 생각해 봐도 다섯 분의 할머니를 선택하게 된 건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 〈돌들이 말할 때까지〉 스틸컷

 

 

변영주: 영화에 등장하시는 분들 중 두 분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살던 곳도 제주도 각지예요. 오라리와 표선은 정말 끝과 끝이잖아요. 그런 식으로 각지에서 계셨던 분들이 각자의 경험으로 얘기를 하는데 저는 이 작품을 보면서 되게 좋다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질문을 연구자가 한다는 점이었어요. 이전 제 작품 중 〈낮은 목소리〉를 떠올릴 때 질문과 관련한 부분이 항상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는데 이 영화의 경우 질문자가 연구자이니 기본적으로 상황에 대한 분석을 충분히 갖추신 분이 하니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명백하게 질문을 하고 무엇보다 할머니, 생존자들이 하는 말을 전부 다 알아들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어떻게 보면 작은 웅얼거림 같은 말들도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거치니 역사책의 문단들이 하나씩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부분은 4.3 때 사람들이 도망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동굴에서, 그러니까 피난 온 사람들의 심정으로 바다를 보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그 돌들을 부실 것처럼 파도가 몰아치는 그 첫 번째 시퀀스가 정말 압도적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웅얼거리는 할머니의 말이 들려오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오름들에 눈 내리는 장면까지 제주도 풍광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할머니의 목소리와 함께 압도적으로 느껴지잖아요. 굉장히 많은 촬영을 제주도에서 했을 것 같아요. 공간은 이 증언과 관련된 지역에 국한해서 지속적으로 계절에 맞춰서 찍은 건가요?
 

김경만: 증언과 맞는 장소인데 그 장소가 4.3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면 그게 최적이겠죠. 근데 그런 경우는 거의 없더라고요. 왜냐면 시간도 이미 70여 년 지났고 그 자체가 사실 그냥 가보면 연관성이 없거나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시간이 이미 너무 많이 지나버려서 완전히 다른 장소가 되어버린 거죠. 그래서 폭넓게 제주도가 4.3의 공간이니 그 안에서 찾은 거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일차적으로 분위기에 맞는 장소들을 찾은 거고 근데 어떤 곳은 정말 그 역사의 그 장소인 경우가 있었어요. 예를 들면 박춘옥 할머니가 고문당하는 얘기를 할 때 반쯤 허물어진 집 같은 건물이 나왔는데 그 장소가 사실은 박춘옥 할머니가 실제로 고문당했던 서귀포 경찰서나 그런 곳은 아니지만 성산에 있는 서북청년단이 기근 하던 그 자리거든요. 건물 자체는 4.3 이후에 만들어진 거라서 관련은 없지만 그 자리는 서청이 있던 자리였어서 그 음산함이 느껴진다고 생각했어요. 자연 같은 경우는 직접적인 연관성 없는 것들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예외가 있다면 곤월동이랑 오름 정도는 이야기의 장소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변영주: 풍경을 찍은 장면들이 단순히 인서트나 푸티지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감독님이 그동안 작업해 오셨던 푸티지 다큐멘터리의 개별 푸티지를 되게 생생하게 보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피해자의 시점으로 당시의 풍경이 보이기 때문에 사실은 사운드를 제거하고 보면 '너무 잘 찍었다.' 혹은 '제주도 너무 예쁘다.'라고 말할 수 있는 화면들이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감독의 능력이 정말 훌륭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영화에 출연해서 당시 상황을 증언해 주신 생존자분들이 이 작품을 보셨을까요? 혹은 기록을 담당해 주셨던 관계자분들 역시 보셨나요?
 

김경만: 물론 도민연대 선생님들은 모두 보셨고 근데 할머니 중에서는 송순희 할머니가 유일하게 보신 분이세요. 왜냐면 박춘옥 할머니는 영화가 완성되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고 나머지 분들은 너무 연로하셔서 거동하는 게 불편하신 상태였어요. 대신 가족분들은 다 보셨죠. 여기 출연하신 김묘생 할머니의 가족분들, 그리고 송순희 할머니의 가족분들은 이제 모두 영화를 보고 좋아해 주셨죠. 간접적으로 송순희 할머니께서 이 영화를 어떻게 보셨을지가 궁금해서 간접적으로 여쭤봤는데 마음에 들어 하셨다고 전해 들어서 저도 굉장히 안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변영주: 제작 중이나 영화가 만들어진 이후에 연구소분들이 이런 얘기를 더욱 풀어서 이야기 해줬어야 한다거나 강조해야 한다고 언급하셨던 부분들이 있을까요?
 

김경만: 도민연대 선생님들이 조금 비슷한 얘기를 하셨어요. 다른 생존자분들도 많이 계신데 왜 그분들은 들어가지 않았는지, 인물의 중요도를 나누는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는데 결국에 제가 한 말은 "영화의 그릇이 너무 작다. 전부 다 담을 수 없다." 였던 것 같아요. 그런 식으로 설득을 했었죠.
 

변영주: 그게 언제나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지워진 역사에 생존했기 때문에 역사가 될 수밖에 없는 분들이 계실 때 과연 그중에 어떤 분을 내 작품에서 중요한 스피커로 쓸 것인가 결정하는 건 사실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어요. 더 중요한 사람을 고르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흔드는 어떤 말을 했던 그 사람이 자연스럽게 다시 그 말을 내 카메라 앞에서 해줄 수 있다면 나는 그럼 된거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경우들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4.3은 이제는 명예 회복도 되시고 그리고 국가배상까지도 된 상태여서 하지만 너무나 오랫동안 잊혀졌던 우리나라의 슬픈 현대사잖아요. 혹시 〈비정성시〉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그 영화가 대만의 2.28 사건을 소재로 한 건데 많이들 그 영화를 보고 나면 광주를 떠올려요. 근데 저는 그 영화를 볼 때 언제나 4.3을 떠올렸거든요. 5월은 4.3 봉기가 일어나고 사실 굉장히 평화롭게 마무리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근데 서울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과 경찰과 국우들이 오라리에 방화를 하면서 협정이나 평화를 끝내고 당시에 군 연대장도 쫓겨나게 되잖아요. 역사의 변곡점에서 어떤 시대가 완전히 숨겨진 사람들은 알죠. 왜 우리 동네는 한날한시에 제사를 지내는지, 하지만 절대로 얘기하지 않던 이분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변할 것 같지 않은 세상이 조금씩 변해서 영화에서 보이는 모습처럼 너무나 조심스러워하시잖아요. 김묘생 할머님도 처음엔 기억을 못 한다고 하시던 것이 사실 기억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기로 결심하신 거죠.
 

김경만: 처음에 할머님들을 만나 뵀을 때도 사실 선생님이 당황해하셨어요. 분명히 기억하시는데 모른다고 말씀하셔서 당황해하시는 걸 아마 보셨을 것 같습니다.
 

변영주: 그랬던 분들이 결국 말을 할 수 있게 된 건 세상이 조금씩 나아졌기 때문인 거예요.
 

김경만: 과정 중에도 사실은 할머니들의 태도가 변화가 심했어요. 운이 좋게도 재심 재판이 순조롭게 진행이 됐기 때문에 그런 힘을 되게 많이 받으신 거죠. 나중에는 정말 훨씬 더 편하게 말씀을 많이 하셨고 처음 초창기만 하더라도 사실은 좀 꺼리는 그런 분위기가 아무래도 있었죠.
 

변영주: 재판이 이루어지기 몇십 년의 과정 중에서 제주도에 위치한 4.3 연구소를 1980년대 말까지 사법경찰들이 상주하고 있었거든요.
 

김경만: 제가 들은 제주학 연구센터 선생님도 기억하시기로는 90년대 중반까지도 어떤 모임을 할 때 정보과 형사가 같이 왔었대요. 들어와서 감시했다고 하더라고요.
 

변영주: 상황에 의해 위축되어 있던 분들이 이제는 웃기도 하고 재판이 끝나는 상황에 굉장히 긴장해 있지만 서로 톡톡 두들겨주는 그 느낌이 사실 이 영화가 결국 해내고자 했던 어떤 지점인 것 같아서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럼 이제 관객분들의 질문 받아보겠습니다.
 

 

영화 〈돌들이 말할 때까지〉 스틸컷

 

 

관객: 제가 국제학을 전공했음에도 대학에서 4.3에 대해 얕고 모호하게 배웠어요. 그래서 담당 교수님께서 4.3을 언급하실 때 4.3 혹은 제주 4.3, 4.3사태, 4.3학살, 4.3사건 같이 한 문장 속에서도 명칭이 계속 바뀌던 게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이 일이 참 깊고 큰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앞으로 이 일을 기억할 때 어떤 이름으로 기억돼야 좋을지 감독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김경만: 제주에서 이제 연구하시거나 아니면 운동 쪽에 계신 분들은 당연하게도 이제 '제주 4.3 항쟁'이라고 부르세요. 왜냐하면 사상 자체가 충분한 동기를 갖춘 봉기로 인해 시작됐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과는 다르게 그때 당시 제주도는 38선 이남의 남한과 별개로 너무 끔찍한 곳이었던 거예요.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라도 싸울 수밖에 없는 시대였기 때문에 투쟁적인 측면을 봤을 때 4.3 항쟁이라는 이름도 있지만 한편으로 역사가 길기 때문에 복잡한 측면이 있어요. 학살이 국가 그리고 군 경 토벌대에 의해서 벌어진 것도 있지만 불행하게도 항쟁을 일으켰던 사람들에 의해서 민간인 피해 역시 발생하기 때문에 복잡한 부분들이 있어요.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 같은 경우에도 그 과정에서 억울한 피해자들이 많이 발생했지만 그 역시 혁명이잖아요. 그런 이유 때문에 항쟁으로 불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저도 그 말에 충분히 동의하지만 저는 아직까지는 4.3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제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많고 충돌하는 경우들도 있지만 제가 궁금한 부분들이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질문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제주 4.3으로 많이 부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변영주: 4.3이 소위 평화로운 엔딩을 맞이하지 못하게 된 부분에 오라리 방화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이 경찰과 우익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거라는 것 역시 밝혀진 시점이 오래된 일이 아니에요. 그 이전에는 방화 사건을 항쟁하는 사람들이, 이를테면 남로당이 이 평화 회담을 방해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라는 게 정설인 것처럼 여겨졌거든요. 그러니까 4.3은 생존자가 증언과 기록이 모였던 거예요. 그러니 남아있을지 모르는 국가 기록이라든가 당시 군정 기관의 자료들이 더 많이 모아져야 되는 거죠.
 

김경만: 선생님들이 여기 영화에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수용 인명부가 유일한 국가 기록이다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국가 기록 자체는 사실 거의 없을 것 같고 대신에 생각해 보면 오라리 방화 사건도 간단하게 전달을 해드리자면 4.3 항쟁이 일어났을 그 시기에는 군은 아직 그렇게까지 잔인하지 않았던 거죠. 물론 이제 군이 토벌 역할을 맡았지만 그때 당시에 정말 문제는 경찰이었어요. 경찰이 부패하고 잔인했기 때문에 봉기가 일어났던 거고 처음에는 이제 그 무장대의 사람들도 이제 우리 적은 경찰이다. 군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협상이 군이랑 이루어져가지고 타결이 됐는데 그렇게 되면 이제 그 사태의 책임은 경찰한테 돌아가니까 경찰 총책임자가 심지어 이제 무장대로 위장하고 그때 당시 군에게 사격까지도 한 거예요. 그런 사건으로 협상은 결렬이 됐죠. 그리고 미군정도 사실 사태가 평화롭게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군 연대장이었던 김익렬을 해임시키고 박진렬이라는 잔인한 일본군 출신의 대령을 군 연대장으로 위임시키게 되면서 군 역시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는 게 계기였다고 볼 수 있어요.
 

변영주: 20세기만 해도 4.3에 대해 기억되고 언급할 때 불행한 일이 있었는데 '경찰이 민간인, 죄 없는 사람을 죽였어'라는 워딩이 굉장히 강조가 됐어요. 근데 사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봉기가 왜 일어났느냐인데 그런 것들에 의해 자꾸 사실들이 감춰지는 거예요. 영화에서 "야 우리 동네 멀쩡하게 공부 좀 했다는 사람들은 전부 다 그랬어. 그러니 신뢰할 수밖에 없잖아." 라던가 그것에 대해서 후회하지도 않는 모습들이 좀 굉장히 중요한 사료라고 느껴져요. 남로당의 역사를 북한의 역사가 아니라 남한의 역사로 해석을 한다고해서 패배를 한다던가, 혹은 그런 감정을 느낄 필요성이 없거든요.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지워진 역사들이 겁먹을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놀라운 증언들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관객: 영화를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증언자분들이 전부 할머니들이시잖아요. 그래서 피해에 대해서 생각했을 때 성적 학대가 이뤄졌다는 자료들을 본 기억이 있어서 그런 증언들을 예상했었는데 오히려 감옥에서 아이를 낳는다던가 수감 과정에서도 돌봄을 해야 한다던가 같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젠더적 측면들이 눈에 띄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4.3 민간인 피해자인 동시에 여성으로서 또 겪었었던 젠더적 측면들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독님이 증언을 다룰 때 주목했었던 부분들이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김경만: 저 역시 아이를 데리고 감옥에 간다는 게 지금 같은 시대에선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보니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언급해주신 여성으로서 겪는 피해도 사실은 할머니들이 암시적으로 언급을 하셨어요. 그 부분들도 고민을 했지만 이 영화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판단을 했고 자칫 성폭력의 전시로 여겨질 수 있다는 부분에서 조심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증언 과정에서 그 부분을 명확하게 이야기 해주시는 분들이 많이 안 계세요. 송순희 할머님 정도가 직접적으로 명확하게 얘기해주시는 정도일 것 같고 다들 일부러 언급하시지는 않아요. 특히 저도 남성이다 보니 아무래도 조금 민감한 주제이다 보니 언급에 어려움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변영주: 주로 집 안에서 촬영 조명을 썼습니까?
 

김경만: 아니요. 촬영 원칙이 전부 그랬어요. 저희가 원하는 촬영이 그분의 집안에서 자연광을 이용해서 찍는 건데 다큐멘터리가 현실이다 보니 원하는 대로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양농옥 할머니도 사실은 그분의 친척 집에서 촬영을 진행했어요. 이분이 사실 제주도에 사시는 분이 아니다 보니 4.3 행사 때문에 제주도를 잠깐 방문하신 과정에서 선생님을 대동하고 집으로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보니 유일하게 그분 집이 아닌 데서 촬영을 했었죠. 저로서는 그 집 자체의 공간이 제가 촬영했던 분들의 어떤 개인성들을 보여주기도 하고 또 공간이 가지고 있는 느낌도 좋아하거든요. 제주도 옛날 집들이 사실 되게 좋아요. 창이 엄청 크고 여러 군데 창이 나 있거든요. 그래서 햇빛이 좀 잘 들면 굉장히 좋죠. 처음에는 서울 촌놈으로서 촬영이 너무 즐거운 거예요. 공간 자체가 서울의 느낌이랑 굉장히 다르니까요.
 

관객: 이전 작업하신 영화 중 〈각하의 만수무강〉에 이승만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하잖아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제주에서의 영상이 꽤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왜 쓰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주에 이승만 목장도 있고 이제 비행장에서의 영상들도 남아있으니 그런 영상이나 장면들이 증언을 하는 할머니들과 대비가 될 텐데 왜 쓰지 않았을까에 대한 부분을 여쭙고 싶습니다.
 

김경만: 제가 원했던 것과는 말씀하신 이승만 전 대통령과 관련된 장소나 영상 자료들이 관련이 없었던 것 같아요. 〈각하의 만수무강〉 때 제가 보여드리고 싶었던 것은 개인숭배 같은 것들을 남한 사람들은 북한의 모습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그 원조가 남한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만든 영화이다 보니 제주도를 찾아가고 제주에서 촬영한 장면들은 사실은 제가 전달하고 싶던 주제랑 큰 관련이 없었어요. 그리고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주도 찾아가서 목장 방문하고 그런 필름들이 많지는 않았거든요. 역사적으로 굉장한 가치가 있는 4.3을 관광산업으로 덮으려던 국가적인 계획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그런 장소나 장면들이 시발점으로서 물론 가치 있지만 담고자 했던 주제들에 부합하지 않았다고 보는 점이 더 맞을 것 같아요.
 

관객: 지금 4.3의 진상 규명이나 문제 제기 과정에서 미국의 공식적인 사과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미국이 전 국가적으로 반복하는 어떤 행위들이 사실 장소나 시점만 바뀔 뿐이지 이를테면 현재의 이스라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떤 반복적인 형태를 띄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감독님께선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경만: 역사를 모두 알고 있으시겠지만 한국이 해방되고 난 다음에 3년 동안 미군의 통치를 받았어요. 미군정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대통령부터 서울대학 총장까지 다 미군 장교였던 거예요. 민주적인 정치 체제가 아니고 군이 통치하는 계엄령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미군이 한국 사람을 재판해서 이제 벌을 주기도 하고 법을 만들고 다스리는 그런 제도였던 거죠. 4.3이 바로 그 시기에 일어났던 거예요. 보통 시점을 47년 3월 3.1절 집회 때 일어난 발포 사건으로 시점을 잡는데 그때를 비롯해 봉기가 일어났을 때도 사실은 미군정 시절이었던 거죠. 그리고 단독선거가 일어나고 48년 8월 15일에 이제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이 된 거예요. 그전까지는 미군정이었으니까 당연히 미국의 책임인 거죠. 그리고 아까 언급됐던 협상 같은 경우도 그 협상을 깬 주체가 바로 미군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정말 명백하게 미국의 책임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게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죠. 어떻게 보면 이제 베트남도 비슷한 일을 겪었고 또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마찬가지예요. 크게 봐서는 미국의 어떤 세계 전략 세계 체제 안에서의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그 첫 번째가 제주도였던 것 같아요.
 

관객: 변영주 감독님께 질문드리고 싶은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제주 4.3의 여성 혹은 할머니들을 촬영하셨다면 어땠을까에 대한 생각이 잠깐 스쳐 지나갔어요. 영화에 따님이 등장하시는데 〈낮은 목소리〉 3편에서 딸의 관점에서 어머니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변영주 감독님의 시선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면 새롭게 등장하는 지점들이 있었을지 여쭙고 싶습니다.
 

변영주: 제가 만들면 정반대 편에서 어떤 얘기가 나올 것 같아요. 무슨 얘기냐면 이 다큐멘터리는 4.3 다큐가 아니에요. 4.3과 관련돼서 수용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수용 생활을 하게 됐는가까지의 과정과 어떻게 살아남았느냐에 관한 얘기고 그 부분에 대해서 국가가 수용 생활을 했던 그 모든 과정이 무효임을 증명한 얘기이죠. 이 다큐멘터리는 이 자체로서 이해를 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 제작 당시가 20세기였는데 만약 4.3을 내용적으로 담고 싶어도 영화에 등장해 증언해 주실 분을 모시는 것 자체가 어려웠을 것 같아요. 4.3 연구소 주변에 사복경찰들이 상주해 있었다는 기록이나 증언들로 생각해 보면 그 장소에 카메라를 들고 가는 것 자체가 어려웠을 거예요. 그러니 그때부터 4.3 연구소가 끊임없이 생존자들과 만나고 밝히지는 못하지만 기록을 하고 이렇게 하면서 조금씩 발굴해 냈던 어떤 역사가 미비하고 숨겨졌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포착하려던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지금 〈돌들이 말할 때까지〉라는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거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분들께 굉장히 감사한 거죠.
 

관객: 개봉 날 진행됐던 GV에 참여하기도 했고 오늘 4.19에 〈낮은 목소리〉를 찍으셨던 변영주 감독님과 그리고 4.3 이야기를 담은 김경만 감독님을 한자리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뜻깊은 자리인 것 같습니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라는 제목을 어디서 따왔는지는 알지만 그래도 감독님께서 생각했던 의미를 한 번 더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중의적으로 제주도가 돌이 많으니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부분들도 있고 영화에서 자연이 담기는 장면들에서 자연이 관찰자의 역할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우리는 모두 목격했고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요. 그리고 4.3이 과거와 비교하면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잖아요. 그런 점에서 지금이 완성형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조금 할 수 있는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어서 더 말할 때까지 같이 진행적인 부분으로 표현이 된 건지 감독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김경만: 말씀해 주신 이야기에 대해 저도 공감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돌 자체가 영화 찍는 사람으로서 좋고 또 아무래도 할머님들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죠. 영화를 이렇게 만들고 나서 많이 하게 되는 생각 중의 하나는 이분들이 그 일을 겪으신 다음에 어떻게 살아오셨을까를 생각하면 저는 상상이 안 가는 거예요. 솔직한 말로 저 같으면 사실은 이렇게 못 살았을 것 같아요. 어딘가 굉장히 망가져 있을 것 같고 나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근데 이분들은 굉장히 대단하신 점이 그럼에도 자기 자신을 놓지 않으시고 지키셨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분들을 보면 그런 시간이 생각나요. 돌은 제주도의 상징이기도 하고, 역사라는 게 이제 그런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반성하지 않으면 역사가 반복이 된다고 하는데 한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송순희 할머니께서도 5.18을 말씀하시잖아요. 제주에서 일어났던 일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로 일어나고 베트남 전쟁이나 5.18에 대해서도 반복되는 것 같아요. 영화의 진행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수용인 분들의 이야기를 한 편으로 만들지 못했으니 담지 못한 이야기를 다른 영화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변영주: 영화 제목을 보고 시를 다시 한번 읽다가 감독님이 이 구절 때문에 제목을 지었나라고 생각했던 걸 적어봤어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들과 우정을 나눌 차례가 왔고 아침이 왔다 / 주워 온 조약돌 하나를 꺼내어 마주했다 돌이 말을 할 때까지 (「돌이 말할 때까지」, 김소연)]라는 마지막 구절. 저는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우정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몰랐던 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대로 교육한 사람이 없었을 뿐입니다. 우정을 쌓는다는 건 때때로 옆집과도 쌓아야 되지만 우리의 선조들과의 관계에서도 필요해요. 그들과의 우정은 잊혀진 부분들을 복원하고 최대한 귀 기울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우정을 쌓을 수 있게 만들어주신 감독님께 다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영화에 관련한 이야기들을 널리 퍼트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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