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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세 가지 안부〉 인디토크 기록: 계속해서 이어질 너와 나, 우리의 세월

by indiespace_가람 2024. 5. 2.

계속해서 이어질 너와 나, 우리의 세월

세월호 참사 10주기 영화프로젝트 『봄이 온다』 옴니버스 3부작

〈세 가지 안부〉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4년 04월 16일(화) 오후 7시 30분 상영 후

참석 〈드라이브 97〉 오지수 감독,  〈흔적〉 한영희 감독,  〈그레이존〉주현숙 감독

진행 변규리 감독

 

 

* 관객기자단 [인디즈] 오윤아 님의 기록입니다.



4월 16일. 이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그 날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 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할 것이다. 슬픔과 분노, 허망의 바다 속에서 우리는 10년간 어떠한 세월을 보냈을까? 그 물결 속에서 지쳐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계속해서 목청 터지게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세월호를 또다른 관점과 방식으로 바라보고 기록했다. 그리고 202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10주기 저녁에 그 기록들과 사람들이 모였다. 서로의 생존과 연대를 확인하는 순간, 너와 나가 모여 우리가 되는 순간, 세월호의 달이 또다시 떠올랐다. 두시간 가량 스크린에 세월호의 기록과 흔적이 비춰지고,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을 가졌다.

 

 

 

 

변규리 감독 (이하 변규리): 안녕하세요, 『봄이 온다』 옴니버스 3부작 〈세 가지 안부〉의 GV 진행을 맡게 된 변규리 감독이라고 합니다. 이번 세월호 참사 10주기 상영회를 인디스페이스에서 주최를 해주셨어요. 그래서 오늘 4월 16일을 맞이하여, 이런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러면 오늘 게스트분들 자리에 모시고 같이 얘기해 보면 좋겠습니다. 감독님들 간단하게 자기소개와 함께 영화를 상영하게 된 소감 같은 것들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현숙 감독(이하 주현숙): 〈그레이존〉 만든 주현숙이라고 하고요. 4월 16일 평일 밤에 이렇게 자리 같이 해주셔서 조금은 덜 외롭지 않을까 해요. 감사의 말씀 먼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한영희 감독(이하 한영희): 안녕하세요. 저는 〈흔적〉 연출한 한영희라고 합니다. 4월 16일, 여러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지수 감독(이하 오지수): 안녕하세요. 저는 〈드라이브 97〉을 연출한 오지수라고 합니다. 오늘 4월 16일 세월호 참사 10주기 되는 날인데 이날 밤에 같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감사하고 좋고요. 다양한 질문과 소감들 오고 가는 자리였으면 좋겠습니다.

변규리: 이 영화를 연분홍치마에서 제작을 하기는 했지만, 이 영화가 3부작으로 구성이 되어 있잖아요. 이와 관련해서 되게 많은 스태프분들이 이 영화에 함께해 주셔서 이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오늘 함께 계신 스태프분들을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객석에 앉아 계신 〈흔적〉과 〈그레이존〉의 한경수 PD님 한번 일어나서 인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드라이브 97〉의 프로듀서를 맡아주신 조은솔 PD님도 함께 계십니다. 저희가 이 영화를 사실 극장 개봉을 하지 않고, 공동체 상영으로 관객분들과 만나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데, 이 공동체 상영을 다 받으려고 하고 또 관리를 하고 또 담당자분과 연락하고 이런 엄청난 일을 해주시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협력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계신 넝쿨 님 소개 드리겠습니다.
제가 감독님들께 몇 가지 질문을 드릴 텐데요. 그동안에 객석에 계신 관객 분들도 질문을 생각해 주시면, 마이크 넘겨서 얘기를 같이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를 어떻게 제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처음에 임하게 되었는지를 얘기를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영희 감독님부터 얘기를 한 번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영희: 〈흔적〉은 처음에는 ‘유가족들의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유류품 혹은 유품을 통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짧은 기획을 갖고 시작을 했고요. 처음에 기획을 가지고 시작할 때 굉장히 많은 자료들을 찾아봤던 것 같아요. 많은 자료들을 찾아보고 사람들도 만나고 취재를 하면서 이야기가 조금 더 구체적인 구성으로 만들어져 간 것 같은데, 그때 가장 크게 고민했던 주안점은 아무래도 영화가 가족 관계, 즉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이야기로 풀어나갔으면 좋겠다는 데에 방점이 찍혀 있었습니다. 꽤 많은 유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새롭게 보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들을 안고 시작을 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희생자나 피해자분들이 전형성을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들을 하고 출발했던 것 같습니다.

오지수: 〈드라이브 97〉은 ‘단원고 생존자의 이야기를 이번 10주기에 공개할 수 있도록 만들어보자’ 라는 생각에서 출발을 했는데 영화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애진이는 저랑 참사 이후에, 20살 때 만나서 한 8년 정도 알고 지냈던 친구에요. 애진이는 지금까지 많은 발언이나 활동들을 해왔던 생존자라서 애진이가 아닌 다른 생존 학생들을 만나러 다녔었어요. 저도 잘 모르기도 하고, 이름도 처음 들어본 친구들을 이렇게 알음알음 소개를 받아서 만나러 다녔었는데, 여전히 얼굴 공개라던지 이야기를 하는 데 어려움을 토로를 했었습니다. 밥도 먹고 술도 먹고 친해지는 과정들은 있었지만 ‘영화에 출연하고 얼굴이 나오는 데에는 여전히 걱정이 된다.’ 이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아직도 다른 생존자 친구들은 어렵구나’ 하는 마음과 동시에 ‘근데 10주기 프로젝트 만들어야 되는데’ 하는 걱정을 안 했고 애진이한테 연락을 했지요. 그래서 ‘애진아 나에게 이런 과제가 있는데, 같이 고민을 해달라.’ 라고 연락을 했다가 혜진이가 ‘이번 10주기에 뭐라도 해보자!’ 라며 오히려 되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줬고 그 과정에서 혜진이랑 민지의 이야기를 저한테 해줬었어요. ‘둘이서 매년 민지를 만나러 가는데 그 여정을 한번 담아보면 어떻겠냐.’ 이런 얘기를 해줬고, 저도 ‘한번 이야기를 담아보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애진이가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면 출발이 어려웠을 텐데, 그래서 저에게는 뒤에 계신 총감독님처럼 애진이의 그런 제안으로부터 시작을 했고요. 혜진이 같은 경우도 처음에는 얼굴이 드러나고, 영화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내가 주인공이어도 되나.’ 하는 걱정을 계속 얘기를 했었습니다. 이후 제가 혜진이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혜진이 너가 그런 마음을 갖는 것도 너무 공감이 되고, 그렇다는 건 이 영화를 봤을 때 정말 많은 분들이 너 이야기에 공감을 하실 거다. 그리고 너가 겪었던 그때의 감정들은 다 진실이니까, 거짓이 아니니까 한번 차근차근 애진이랑 나랑 같이 이야기를 해보자.’ 라고 얘기를 했더니 혜진이도 공감을 해주면서 이 이야기가 출발이 됐습니다.

주현숙: 저의 전작 중 〈당신의 사월〉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었는데요. 그때 그걸 만들게 됐던 계기랑 연결이 돼서 말씀을 드리면 저는 사실 참사 당시에는 뉴스를 찾아보지 못했었어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어떤 사건이 아니고, 너무 덩어리지는 슬픔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도저히 그 뉴스나 관련된 기사나 이런 것들을 전혀 찾아보지 못하다가, 사실 약간 외면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고, 제 주변에서 다른 감독들이 작업을 하면 옆에서 도와주고 그런 일은 했었는데요. 제가 ‘직접 세월호 다큐를 만들어야 되겠다.’라는 생각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제가 버스를 타고 가는데 옆의 차선에 외제차가 있었어요. 저의 편견인데, 그 외제차에 노란 리본이 붙어 있는 거예요. 외제차인데 왜 노란 리본이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갑자기 너무 궁금해졌어요. ‘저 사람 무슨 생각으로 노란 리본을 달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갑자기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나는 내 가족이 누군가가 희생되거나 혹은 내가 생존자이거나 이러지 않는데, 왜 나는 여전히 세월호 참사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이럴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러면서 주변에 사람들한테 물어보기 시작했어요. ‘너는 그날 어땠어? 너는 그거 어떻게 기억해?’ 라는 얘기를 하면서 다녔죠. 근데 다들 너무 그날의 기억을 잘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만의 어떤 기억들이 있는 거죠.
그래서 ‘이걸로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 그때만 해도 한 3년 지나고 나니까,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누군가 얘기한다는 것이 되게 불편한 상황이 되었어요. 그리고 ‘유가족이 되게 외롭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참사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 참사와 관련된 운동을 하고 외치고 이렇다는 게 참혹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우리 모두 그 배가 침몰하는 것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목격자로서 당사자가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이렇게 아프다면, 나도 아프다고 얘기를 하고 이 이야기를 잘 묶어서 같이 나눈다면 우리 모두 이 참사의 당사자가 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부분(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뭘 할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당신의 사월〉을 만들었습니다. 사실 ‘참사 하나의 작품을 했으면 다 했지, 뭐 이런 생각을 안일하게 갖고 있다가, 재작년에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우리가 그 이후에 얼마나 왔지?’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참사가 10년이 됐다면, 그 당시를 마주하면서 목도할 필요가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누구보다도 그 현장을 잘 지켜봤던 사람, 즉 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론인들이 실제로 그 당시에 ‘기레기’(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 라는 얘기를 세월호 참사로 인해서 처음 듣게 됐잖아요. 어떻게 보면은 자기가 직업이 그러해서 그 현장에 있었고, 그런 기레기라는 얘기를 듣기도 하고, 또 그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트라우마를 갖게 되고. 되게 모순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들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그러면 10년을 어떻게 보냈지?라는 질문이 관객들에게도 이렇게 튀어나오길 하는 바라면서 제작을 하게 됐습니다.

 

 

영화 〈그레이존〉 스틸컷

 


변규리: 저희가 공동체 상영 신청을 받아서 전국을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고 10주기의 의미를 돌아보는 활동들을 하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이 영화를 처음 만들었을 때와 만들기로 마음먹었을 때와, 지금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야기를 하시는 과정에서 영화를 만들기 전과 후에 변화하신 것들, 혹은 느끼는 것들이 있으시다면 무엇일까요? 아니면 상영을 하면서 어떤 에피소드 같은 것들이나 이런 것들을 말씀해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지수 감독님부터 말씀해주세요.

주현숙: 요즘 가장 많이 전국을 누비시는 감독님 입니다. (웃음)

오지수: 이제는 KTX 노선을 다 꿰차고 있습니다. 처음에 작업을 하자고 이야기를 하고, 기획을 했던 시기에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었습니다. 그래서 영화에도 자연스럽게 이태원 참사에 대한 언급을 하게 된 것처럼 사실 지금까지 해왔던 어떤 활동들에 대한 냉소가 컸던 것 같아요. ‘이렇게 열심히, 시민들이 국민들이 이렇게 같이 공감하고 세월호를 기억하고 있는데, 계속 우리는 움직이고 있는데 하나도 바뀐 게 없이 또 서울 한복판에서 어떤 참사가 일어났다니.’ 하는 되게 회의감이 컸던 것 같아 사실 작업을 하는 내내 되게 힘들었거든요.
‘작업을 해도 애진이랑 혜진이의 삶은 그렇게 바뀌지 않을 텐데, 해도 사실 희생자들은 돌아올 수 없는데.’ 사실 되게 건강하지 못한 생각들을 작업이 끝나는 날까지 했던 것 같아요. 겁도 나고 두렵기도 하고 괜히 ‘괴롭힌 거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했었는데, 그때 애진이랑 혜진이랑 했던 이야기 중에 하나를 계속 붙잡으면서 갔었습니다. 둘과 일정을 공유하고 ‘이날 찍자, 저날 뭐 하자.’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게 정말 쉽지 않았어요. 둘 다 계속 일을 하고 있고, 하다 보니까 둘 다 ‘언제까지 찍을 거야.’ 이런 얘기도 하고 ‘이거 진짜 영화가 되는 게 맞아?’ 이런 얘기도 하고. 그런 걱정들 가운데서 계속 작업을 했음에도, 둘 다 끝날 때쯤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했으니까 진짜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초반에는 분명히 약간 일정 조율하고 얼굴 나오는 거에도 쑥스럽고, 편집본을 보여주면 얼굴만 보고 있고, 이랬던 친구들이 영화가 다 촬영이 끝날 때쯤에는 그래도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다. 너 이제 바빠지겠네 지수야’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최근에 상영 다니면서 힘들어도 ‘그래 그때 약속한 것도 있고, 사실 우리가 이렇게 마음을 모아서 한 1년 남짓 스태프분들도 정말 고생도 많이 하고 했으니까’ 하며 열심히 다니고 있었습니다. 다니면서 ‘이제서야 이 영화를 보는 관객 분들도 자기 이야기를 조금씩 하시는구나.’ 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돼요. 왜냐하면 GV를 하다가 이런저런 소감을 나눠주시는 경우도 많은데, 그럴 때 ‘자기도 그날 어디에 있었고, 그리고 이태원 참사나 다른 참사를 보면서 자꾸 세월호가 떠오른다. 힘들고 지쳤던 마음들을 이 자리에서 처음 얘기를 한다.’ 이렇게 꺼내시는 분들의 표정 같은 것들이 저한테는 되게 많은 생각을 들게 했습니다. 만드는 과정 동안 마음도 힘들고 너무 지치기도 했었지만, 이렇게 만나고 다니면서 ‘서로가 각자 그 자리에서 계속 세월호를 기억하고 이야기하고 있었구나.’ 이런 마음들을 느끼면서 오히려 저도 힘을 받게 된 것 같아요.

한영희: 오늘 기억식을 갔다 왔어요. 안산에 다녀왔는데, 1년 전 딱 촬영을 시작했어요. 안산에서 처음 촬영을 시작했는데, 그 기억식 때 촬영하면서는 조금 정신이 없었지만, 어쨌든 내심 창현이 엄마를 찍으면서 ‘작업 잘 되게 좀 도와줘라.’ 이런 묵념하는 시간에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근데 1년이 돌아서, 상영을 하고 관객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변규리 감독님이 이렇게 질문하실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1년이 딱 지난 이후에 상현이하고 호성이가 저의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기억식에서도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은 1년 사이에 제 안에서 잘 알지 못했던 창현이나 호성이가 영상이긴 하지만 ‘피가 도는 사람이었다.’ 이런 느낌들을 되게 강하게 갖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영화를 되게 304명의 희생자, 250명의 단원고 희생자라고 하는 이 숫자 안에 있어서, 왜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304개의 세계가 사라졌다.’ 이런 얘기들을 하는데 그 세계가 어떤 세계였는지 우리는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그나마 250명 단원고 희생자 중에는 두 분이긴 하지만, ‘이창현과 신호성이 어떤 느낌의 아이였을 지’ 라고 하는 것들이 전달이 될 수 있는 것이 나름대로는 ‘반갑다. 이 작업을 하기 너무너무 잘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주현숙: 저는 약간 보태면 같이 다니면서, 호성 어머님이랑 같이 수다를 떨었었는데, 어머니가 그런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이 영화를 찍으면서 내가 정리가 된 것 같아. 내 감정이나 이런 것들이.’ 그게 한영희 감독한테도 ‘가장 보람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화를 만드는 과정 안에서 계속 ‘누군가가 질문을 계속하니까, 답을 하면서 자기 생각을 정리를 하고 여러 이야기들을 하면서 정리되었다.’ 라는 말씀을 하시니까 되게 좋았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기억하자.’ 이런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근데 ‘어떻게 기억하지, 그리고 기억하고 나서는 뭘 할 수 있지?’라는 생각 때문에 약간 또 답답해지기도 하잖아요. 근데 365일 기억하지는 않더라도, 호성이랑 창현이를 기억하면서 구체적으로 기억이 날 수도 있고요.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 내가 할 일을 또 찾을 수도 있다라고 생각이 들어서 그런 면에서 좀 봐주셨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는 사실은 〈당신의 사월〉도 그렇고 〈그레이존〉도 그렇고요, 제가 만약에 혼자 작업을 안 하고 있었으면 그냥 그 슬픔의 감정이 덩어리 채에 있어서 좀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근데 자기가 이해되지 않는 어떤 순간들이 있잖아요. 갑자기 막 눈물 나고 이럴 때, 세월호 참사 관련해서 작업을 하면서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게 저는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나만 이렇게 아프고, 나만 이렇게 불편하고, 나만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감정에 휩싸이는 게 스스로 뻘쭘하기도 하고 그렇잖아요. 근데 그러지 않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이야기를 해주고, 그 다음에 영화를 보러 와주신 한 분 한 분을 이렇게 보게 돼요. ‘이 분들은 어떤 하루를 보내셨을까?’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10년을 보내셨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그래도 4월 16일에 여기 오셨다는 생존에 대한 반가움. 그러니까 존재에 대한 반가움이죠. 그런 감정들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만들면서 ‘내가 살려고 이거를 만드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슬픔도 사실은 덩어리 채 있으면 소화가 안 되잖아요. 해석이 안 되는데 어쨌든 영화를 만들고 사람을 만나면서 그 슬픔이 이렇게 나누어지고 공유할 수 있는 어떠한 상태가 되는 것 같아요. 저한테는 ‘나 왜 작업을 두 개나 했지.’ 이런 생각을 며칠 전에 했는데, ‘내가 살려고 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여기 오신 분들도 ‘나 오늘 하루 되게 잘 살았네.’ 이런 생각을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영화 〈흔적〉 스틸컷



관객: 오늘 영화 너무 잘 봤습니다. 제가 마침 어저께 〈당신의 사월〉을 봤는데 너무 반가워서요. 방금 하신 말씀 중에서 공감되는게, 저도 ‘사람답게 살려고,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그러한 생각에) 관심을 갖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 말씀이 되게 와 닿는데, 사실 이 다큐멘터리 같은 경우에는 당사자분들이 계시고, 그 아픔의 크기를 제가 차마 가늠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거리를 조금 두고 사실 기반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근데 제가 영화 같은 거를 찾아보면서 가장 감정적으로 크게 울림을 받았던 것은 바로 전에 상영을 했던 〈너와 나〉 같은 경우거든요. 혹시 세 분은 세월호 참사를 기반으로 각색을 한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것을 제작 하거나 준비 중인 작품이 있으신지, 아니면 그런 각색 과정에 대한 의견이 있으신지 궁금해서요. 그걸 여쭤보고 싶습니다.

주현숙: 어느 순간에는 ‘그런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있기는 있어요. 근데 아주 구체적이지는 않고, 사실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조금은 갈아 넣으면서 하는 경향이 있어서, 물론 다들 저는 다른 분들은 또 어떠실지 모르겠지만요. ‘언젠가는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있어요. 근데 보고 나면 되게 행복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10년 됐으니까 ‘단단하게 마음을 먹어보자.’ 이런 마음으로 여러 감정이 같이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없어요. 아직은 없습니다. 내일은 또 어떤 마음일지 모르겠지만요.

한영희: 저는 〈너와 나〉는 너무 좋게 봤거든요. 안 보신 분들 보실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근데 저는 각색의 방향이 작품마다 어떤 소재와 어떤 상황에 따라서 되게 다를 수 있는데, 어떻게 보면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가 계속 세월호를 기반으로 이야기가 퍼져 나갔어야 했던 시기가 있고, 그것이 또 다양한 주체에 따라서 또 다른 이야기로 이렇게 변화하는 시기도 있고, 그리고 다양한 시점을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10년이 지났고 세월호를 기반으로 한 영화는 혹은 다큐멘터리는 굉장히 많이 쏟아져 나왔죠. 그만큼 한국 사회에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굉장히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너무나 안타깝지만, ‘소재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떠한 이유든 세월호 작업은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해왔고, 아마 앞으로도 저는 해나갈 것이라고 생각이 돼요.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주체가 등장을 해야 하고, 또 다른 주체에 의해서 이 이야기들이 새롭게 해석 되어질 수 있는 부분이 있다라고 생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면서도 지수 감독님과 그런 얘기를 했거든요. ‘분명히 또 다른 주체의 등장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유가족이긴 하지만 형제자매 라던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주체들이 등장해서 끊임없이 이 사건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라는 생각은 드는 것 같아요.

오지수: 사실 지난 10년 동안 나왔던 세월호 관련 영화들은 집중되어 있던 그 슬픔이 있었던 것 같아요. 대부분 유가족분들, 그리고 단원고 희생자의 엄마와 아빠들의 이야기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간편하게 이입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 작업들도 당연히 유효했고, 있어야 했던 이야기들이라고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 세월호 참사를 좀 다른 방식으로 계속해서 기억할 수 있으려면 ‘유가족분들의 슬픔이 너무 커서 내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라고 계속 두려워하고 걱정했던 분들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그런 부분 때문에 처음에 활동을 시작했을 때도 생존 학생들이나 형제자매분들의 이야기를 계속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앞으로도 그분들이 천천히 자기 이야기를 분명 하고 싶은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만약에 직접적으로 인터뷰를 하기가 어려우시다면, 그때 어떤 각색의 방향이라든지 다른 형식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더 적극적으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관객: 세 작품 모두 감명 깊게 관람했고 특히 제가 지금 인턴 기자로 근무하고 있어서 저에겐 〈그레이존〉이 더 깊게 다가온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세 작품 모두 추모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세월호 참사가 10년이 지난 시점인데, 이런 추모의 의미와 기능이 시민들에게 어떻게 역할되면 좋을지에 대해 한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주현숙: 정은주 기자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자기 후배 기자들에게 재난 참사를 어떤 식으로 취재하는지에 대해서 교육을 하신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때 하는 얘기 중 첫 번째 ‘안 써도 돼.’ 라는 이야기 였습니다. ‘재난의 현장에 가서 취재 안 써도 돼. 기사를 안 써도 돼. 그 대신 거기 계속 있고, 그리고 꼭 물어보지 않아도 심정을 물어보지 않아도, 잘 보고 있으면 그 심정을 알 수 있어. 그러니까 어떤 사실들은 확인해야 되겠지만, 심정을 묻지는 말자.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그분들이 자기 얘기를 하고 싶을 때, 그때 네가 옆에 있으면 돼.’ 라는 얘기를 해주신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 말이 너무 인간적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추모를 한다는 게, 사실 제가 살려고 영화를 만든다고 하는 것처럼 사실 알고 보면 산 사람을 위한 거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걸 추모를 하는 거고. 그리고 단순히 추모하고 기억하는 데서 멈춘다면, 사실 저는 좀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걸 통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 노동의 현장이 안전한지에 관한 것들을 유심히 볼 수 있게 봐야 한다고 우리에게 알려준 게 세월호 참사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냥 관습대로 어떤 순간을 막연히 넘어가는 순간, 저도 어떤 참사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래서 추모를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지 않을까 싶어요. 내가 내 현장에서 발 딛고 있는 그 공간 안에서, 관계 안에서, ‘난 뭘 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폭력적이지 않았나.’ 이러한 생각은 PC주의나 이러한 것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나는 뭘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내가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면 그걸 얘기할 수 있는, 그런 용기를 만들어내고. 근데 늘 하려면 버겁잖아요. ‘살면서 늘 나는 안전하고 올바라야만 해.’ 이러면 되게 힘드니까. 하지만 추모라는 행위를 통해서 한 번씩 다시 되새김질 하는 것이지요. ‘나는 뭘 할 수 있지.’ 라는 생각을 질문을 안고 갈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저는 추모라고 생각합니다.

한영희: 언론의 기자님이시라고 하니까 더 이런 얘기를 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세월호에 있어서의 추모는 사회적 추모와 어떤 개인 수준에서의 추모는 다른 의미 여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세월호는 어떻게 보면 ‘이 사회적 추모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고, 그리고 어떻게 죽은 자를 애도할 수 있어야 되는가?’ 라고 하는 질문을 조금 더 정확히 던질 필요가 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사회적 추모에 결국에 어떤 방향성이라고 하는 건, 같이 슬픔을 나누고 위로하고, 희생된 분들을 위로하고, 그 다음에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결국에는 사람들이 ‘뭘 기억해야 돼. 뭘 추모해야 돼.’ 라고 얘기하는게 아닐까 싶어요. 저희도 계속 그 얘기를 하고 있지만요. 결국은 과연 ‘그 순간에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었어야 했는가? 과연 우리 사회가 그때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했는가?’ 라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 지점들을 반추하는 것이 결국은 ‘사회적 애도와 추모 여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살아남은 자들 혹은 살아있는 자들의 어떤 몫으로 어떤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 아닐까라는 생각은 드네요.

오지수: 저도 ‘추모의 의미가 엄청 크다.’고 생각을 하면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지 하면서 열심히 머리를 써봤는데, 사실 〈드라이브 97〉을 찍으면서 애진이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저랑 정말 다른 성격의 친구여서요. 제 주변에 저런 성격의 친구가 없거든요. (애진이는) 극 ST, 전 극 NF. MBTI를 모르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정적인데, 애진이는 현실적이고 ‘왜 저런 상상을 하지?’ 그리고 ‘왜 이렇게 슬퍼하지?’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영화에서도 그러잖아요. 자기는 그런 힘든 얘기를 해도 잘 풀리지 않는다고. 이런 성격의 친구인데 제가 애진이한테 ‘우리는 진짜 다른 사람인 것 같아.’ 이렇게 얘기를 했더니 애진이가 막 웃으면서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러더라고요.
근데 그럼에도 우리가 매년 4월 그쯤이 되면 안부 연락을 하고 ‘기억식에 왔냐.’, ‘어디 있어?’ 이런 연락을 합니다. 또는 생일 축하한다고 연락을 하면서요. 지금까지 연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해야 된다.’ 라는 그 마음 하나가 같아서, 그렇게 10주기 작업도 하게 된 것 같다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그래서 뭔가 그리고 혜진이 같은 경우도, 한 번도 자기는 또래들과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내 일이 아니라는 것, 내가 이렇게 힘들 일이 아닌 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애진이한테는 가끔 이야기를 했지만 그 다른 친구들하고는 이야기를 거의 못했었다고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두 친구한테 공통적으로 느끼면서, 우리가 세월호에 대해서 지금까지 편하게 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안타깝기도 했었고 속상하기도 했었는데요. 오늘 제 친구도 와줬는데 아주 다른 일을 하는 친구인데도 제가 가끔 세월호 이야기를 하거든요. 일상적으로 세월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것들이 저한테는 세월호를 추모한다, 그리고 세월호를 기억한다라는 데 아주 구체적인 방법인 것 같아요.
당연히 희생자 한 분 한 분을 기억하고, 그분들의 생일을 기억하면서 추모하는 분들의 이야기도 들었었는데, 저는 그렇게까지 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아주 가끔 친구들하고 그냥 노래방에서 놀고 있다가 또는 그냥 맛있는 걸 먹고 있다가 어느 날 봄이 돼서 ‘곧 세월호 참사 주기가 돌아오네.’ 이런 이야기들을 대뜸 친구들하고 나눌 수 있는 게 저한테는 되게 필요한 추모의 방식이었어요. 그렇게 스스로는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최근에는 가족들한테도 이런 얘기들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 그렇게 더 많은 분들이 조금은 쉽게 조금은 더 가뿐하게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주현숙: 참고로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 하다 보면 인간관계가 약간 정리되기도 해요. (웃음)

 

 

영화 〈드라이브 97〉 스틸컷

 


관객: 세 분 영화는 사실 어떻게 보면 담담 하기도 하고, 모두가 갖고 있는 되게 큰 슬픔을 각자의 방식을 담아내려고 노력하신 것 같은데요. 저는 이 영화나 이 상황이 감정이 끝에 이르면 분노로 항상 치닫는 것 같아요. 저희가 알고 있잖아요. 이 상황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그리고 대통령이 바뀌긴 했지만 굉장히 많은 책임자들이 여전히 유효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데.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 계속 지속되는 거예요. 다들 그러시겠지만 그래서 거리를 더 두고 싶어 하는 것도 있는데요, 현장에서 보신 분들은 그게 더 격렬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저희가 이 사건을 마주할 때는 항상 아주 큰 슬픔을 느끼지만, 그 안에는 되게 또 큰 분노와 그 분노가 결국 저는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한테 자꾸 치닫는 거예요. ‘너 왜 이 사건을 보고도 누군가를 지지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렇게 되면서요. 그런 걸 넘어서는 제 마음속의 그 분노를 제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슬퍼해도 된다.’라고 하신 말씀이 위로가 되기도 하면서, 또 동시에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분노들은, 이런 표현이 조금 적합한지 모르겠지만,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건강한 긍정적인 방식으로 분노해야 할 텐데 그런 방향에 대해서 세 분은 어떻게 생각 하시는 지에 대해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주현숙: 저는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찾는 게 더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요즘 안전공원(4.16생명안전공원, 세월호 추모공원)이 빨리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게 저의 가장 큰 바램이에요. 그래서 저는 뉴욕에는 꼭 가보고 싶어요. 그라운드 제로가 너무 멋있다고, 유튜브 〈셜록현준〉 채널에서 유현준 박사님이 설명해 놓은 게 있더라고요. 거기에서 911 참사로 희생됐던 사람들을 추모하고, 그리고 그 희생이 헛되지 않게 뭘 해야 될지 같이 애도하면서 방법도 찾고 이런 게 너무 좋을 것 같은 거예요. 정말 비싼 땅 한가운데에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안전공원이 우선 빨리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라는 게 하나 있고, ‘안산이 아니라 저는 그게 광화문을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라는 저 혼자만의 어떤 꿈이 우선 하나 있고요. 그래서 우리가 거기서 만나서, 그러니까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 안부도 전하고 생존도 확인하면서 위안도 받고, 분노 말고 또 다른 어떤 연대감을 확인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오늘 오시길 너무 잘하셨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쨌든 적어도 이 극장 안에 있는 분들은 다 같은 편 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계속 하나씩 할 수 있는 것들을, 물론 분노를 표출해야 될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게 말씀하신 분을 해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응원합니다. 

오지수: 저도 주현숙 감독님이랑 비슷할 수 있겠지만, 제 개인에게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는 슬픔 보다는 분노 때문에 계속 활동을 해왔던 것 같아요. 영화도 만들고자 하고, 계속 이야기를 담고 싶고, 현장에 가야하고, 유가족들 곁에 있어야겠다. 저한테는 분노가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나서 이태원 참사를 만나니까, 그냥 ‘이건 다 쓸모 없는 거야.’ 라는 어떤 냉소 때문에 두려웠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그래서 앞으로는 ‘이 분노를 원동력으로 내가 한번 써봤으니, 이제는 이 분노를 잘게 쪼개서 더 오랫동안 이 참사들을 계속 지켜볼 수 있는 질긴 힘을 만들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점점 시간이 갈수록 정말 잊혀지기 마련이거든요. 영화 작업이 거의 끝나가면서 PD님이랑 ‘사람들이 10주기인 것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는 이야기를 했었어요. 왕래를 하지 않는 친구들한테 가끔 얘기를 하다 보면 ‘벌써 10주기야.’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하고요. 누군가한테는 이제는 10년 전의 일이 되어버린 거잖아요. 근데 사실 이태원 참사도 그렇고 계속해서 비슷한 국가적인 재난이 일어나고 있는데, 거기에 계속해서 제가 쓰러져 버리면 이 형체 없는 누군가를 자꾸 원망하게 되는 거예요. 근데 그러면 또 도망가게 될 거고, 그냥 쳐다도 보지 않게 될 것 같아요. 저는 제가 그럴 가능성이 너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최대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오래오래 이 참사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더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그 사람들이 언젠가는 분명 ‘내가 이 얘기 누구한테라도 하고 싶은데.’ 라고 마음이 들 때, ‘저 여기 10년 넘게 있었는데요.’ 라고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래서 ‘이 분노를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질긴 끈으로 가져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할 때 마다 애진이와 혜진이, 그리고 민지의 아주 구체적인 기억이 저한테는 그 하나의 방법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민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 4월 말에 애진이랑 혜진이랑 같이 가기로 했거든요. 앞에서 얘기해 주신 것처럼 4월 16일의 그날 그 자체의 어떤 크기나 규모에 지금까지 압도되어 왔었는데, 이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누군가를 기록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저는 ‘민지가 쌩쌩이를 잘했었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민지가 손재주가 좋았구나.’ 라는 아주 작은 것을 알게 됐으니까 그걸로 계속해서 세월호를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앞으로도 만나게 될 사람들의 이야기 안에서 그런 작은 것들로 기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질문하신 분도 (그러한 사실들이) 아주 작을 수 있지만 사실 가장 클 수도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그런 것들로 마음을 계속 달래시면서 앞으로 계속 같이 미래로 갔으면 가면 어떨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변규리: 아쉽지만 감독님들의 마무리 인사를 듣고 GV를 마무리해야 될 것 같습니다.

오지수: 다시 한 번 10년이 된 4월 16일 밤에 이렇게 이야기들 같이 나눌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좋고요. 저는 늘 상영 다닐 때마다 훨씬 제가 더 힘을 받는 것 같아서 끝나고 나면 애진이랑 혜진이한테 단체 사진 같은걸 보내면서 ‘오늘 잘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을 만났다.’ 이렇게 짤막하게 남기는데 애들이 수고해줘서 고맙다며 귀여운 이모티콘 같은 것들을 그냥 툭툭 이렇게 보내주어요. 애진이랑 혜진이도 되게 많이 힘을 얻는 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꽤 귀찮고 이거 언제까지 하지, 이런 생각들도 분명 저한테 티를 냈었는데, 제가 ‘아니야! 끝까지 하자.’ 라며 데려오듯이 했습니다. 그럼에도 둘이 후회하지 않는다고 최근에 얘기해줘서, 많은 분들이 이렇게 영화를 봐주시는 것 자체가 사실은 세월호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들이 되게 큰 힘을 되려 받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꼭 되돌려드리고 싶었어요. 오늘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한영희: 오늘 같은 날 이렇게 함께 세월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또 영화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내년에도 이런 거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고요. 그래서 4월 16일에 대한 더 다양한 이야기들을 서로 함께 나눌 수 있는 자리가 계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크지 않고 아주 작은 모임, 그러니까 친구들끼리라도 이렇게 얘기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기회를 만들어 주신 인디스페이스와 여기 찾아와 주신 관객 여러분 너무 감사합니다.

주현숙: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안전공원이 멋지게 만들어지길 기원합니다. 행동으로 나서주셨으면 좋겠어요. 너무 미안하면 사실 외면하고 싶어지잖아요. 안 보고 싶기도 하고요. 너무 미안한 마음만 갖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들, 작게는 리본 같은 거 메고 다니면서 서로 안부 묻는 느낌으로 ‘너 살아있어, 나도 기억하고 있어.’ 이런 식으로 말이에요. 전 노란 리본이 되게 힙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예쁜 노란 리본 보면 저는 되게 탐하거든요. ‘저 주세요!’ 막 이러기도 해요. 그래서 또 다른 분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그러는데요. 그런 마음으로 서로를 잘 보살피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게 첫 번째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노란 리본도 메고, 주변을 잘 살피고, 안전한 사회를 위해서 뭐든 하는 그런 1년이 또 됐으면 좋겠습니다.

변규리: 사실 저희가 공동체 상영을 계속 돌리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신 인디스페이스에게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인디스페이스 후원도 관객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고요. 상영 소식도 널리널리 전파해 주시면 공동체 상영이 또 들어오겠죠. 그래서 관객분들의 큰 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이 상영이 되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우리 한경수 PD님께 한 번만 더 박수를 쳐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아요. 늦은 시간까지 극장을 지켜주신 관객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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