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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단평] 〈정순〉: 시선을 따르며 건네는 믿음

by indiespace_가람 2024. 4. 27.

*'인디즈 단평'은 개봉작을 다른 영화와 함께 엮어 생각하는 코너로, 

독립영화 큐레이션 레터 '인디즈 큐'에서 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시선을 따르며 건네는 믿음

〈정순〉 〈면도〉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지윤 님의 글입니다.

 

 

시선에는 믿음이 따라붙는다. 누군가를 지켜보는 시선은 그 사람을 향한 믿음으로 발동되고, 누군가를 통해 세상을 보겠다는 선택은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 된다. 영화 〈정순〉은 그 시선을 오롯이 정순(김금순)에게 맡겨둔다. 그래서인지 그 선택이 굳은 의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의지가 담긴 카메라의 방향은 정순의 시선과 나란히 하여 움직인다. 그 시선은 때로는 집요하고, 정확하고, 스스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영화 내내 대부분 정순의 시선이 닿는 곳은 공장이라는 공간 속에서의 타인이다. 어쩌면 정순 자신이 대부분의 관계 맺기를 이루는 공장이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정순의 세상이 되고, 세상에 대한 관심은 타인을 향한 관심으로 이어져 그렇게 조금은 천연덕스럽게 젊은 동료들의 연애사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들에게 간섭하기도 한다. 그 과정 내내 카메라의 시선은 정순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있다. 정순의 눈길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그 눈길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은근히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영화의 전반부, 공장에서의 정순을 그려내는 시간은 정순이라는 인물에 대한 구성을 이루는 것뿐만이 아닌 꼭 정순의 시선을 따르는 체험이다. 

 

 

영화 〈정순〉 스틸컷

 

 

정순과의 관계가 가로막히는 순간은 정순 본인 스스로 자신의 시야를 가려버리는 순간이다.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가 된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정순은 가장 먼저 자신의 시야를 가린다. 공장 작업복을 머리 위로 둘러쓰고는 늘 일상적으로 지나는 거리를 불안하게 걷고, 그 길을 걷는 정순을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고요히 쫓는다. 집에 돌아와서는 커튼을 모조리 치고, TV 화면을 가려버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낸다. 작업복으로 시야를 짓누른 채 위태롭게 걷던 모습처럼 베개로 자신을 짓누르기도 한다. 그 갇혀있던 시야를 걷어내는 것 역시, 정순 본인이다. 정순은 스스로 공장에 들어가 다시 작업복을 입고 자신의 세계였던 그 공간에서 탈피를 선언하듯 노래한다. 이는 영화가 처음부터 정순에게 시선을 부여하고, 믿음을 부여한 이유가 된다. 영화는 정순이 사건으로 인해 자신을 부정하고 세상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것을 그려내기를 선택하지 않고, 디지털 성범죄로 인해 파괴되는 한 개인, 여성, 관계, 가족 등을 무참히 그려내지 않는다. 정순이 다시 자신의 시야를 직시하고, 공장뿐이던 세계에서 정순의 힘으로 어떻게 다른 세상을 꿈꾸고 볼 수 있게 되는지를 그려내며 정순에게 부여했던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그 시선을 통해 다시 정순에게 믿음을 건넨다. 그 과정에서 운전면허는 세상을 향해 정순의 시선이 바뀔 수 있는 동력에 대한 비유가 되어 작동하고, 정순이 스스로 자신의 세상을 재배치하고 재배열함으로써 세상에 대해 눈길을 건네던 우리가 알던 정순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영화 〈정순〉 스틸컷

 

 

믿음을 건넴과 동시에 계속해서 정순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의 호명은 공장에서 정순을 부르는 이모라는 호칭으로 자주 가로막힌다. 그럼에도 영화 제목에 본격적으로 드러나 있는 ‘정순’의 이름을 영화도, 보는 이도 러닝타임 내내 계속 외치고 또 외친다. 그 호명이 어서 정순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마침내 꼭 자신의 이름표를 붙여낸 듯 정순으로서 스스로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고 길의 끝이 어디인지 모를 풍경 속에서 계속 진행해 나갈 때, 비로소 바라던 정순의 세계가 새로이 생성됨의 시작임을 느끼며 안도한다. 곧게 나 있는 길을 따라 그렇게 정순의 시선은 다시 세상을 향한다. 

 

 

영화 〈면도〉 스틸컷

 

 

카메라의 끈기 있는 믿음과 영화의 호명은 정지혜 감독의 단편 〈면도〉부터 시작되어 첫 장편 〈정순〉에도 닿아있는 듯하다. 〈면도〉에서 민희(한혜지)는 하고 싶은 말도 묵묵히 참아낼 것만 같은 성격인 듯 소개팅 일화를 떠드는 직장동료 앞에서 당황스러움도 표현하지 못한 채 그 불편을 넘겨낸다. 하지만 그 일화는 하루를 지배하듯 잊히지 않고 전 남자친구의 전화에 오히려 자신의 인중을 확인하게 만든다. 그렇게 인중을 ‘면도’하다 베여버린 채 약속 장소에 나가게 된 민희에게 돌아오는 질문은 인중의 상처가 꼭 면도하다 난 것 같다는 웃음 섞인 말이다. 그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 길을 걷는 민희를 영화는 꼭 〈정순〉의 정순을 쫓던 모습처럼 핸드헬드로 불안하게 따라간다. 그렇게 민희의 행동과 선택을 지켜보는 영화 〈면도〉는 〈정순〉에서도 그러하듯 인물의 입에서 스스로 소리를 내기까지 기다린다. 직장동료가 민희에게 인중의 상처를 묻자, 민희는 전 남자친구의 같은 질문에 움츠러들던 자신의 모습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 질문을 향해 똑똑히 답한다. “면도하다가요.” 

〈면도〉의 민희와 〈정순〉의 정순은 모두 어떤 사건으로 인한 불안의 과정을 겪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시야를 가리기도, 움츠러들기도, 불안하게 길을 걷기도 하지만, 결국 민희와 정순 모두 스스로 타인을 직시하고, 세상을 다시 바라보고 입 밖으로 소리 내고, 노래한다. 그 곁을 함께하는 영화의 시선은 믿음으로 함께하고 계속해서 이들을 호명함으로써 그들의 소리를 반드시 불러일으킨다. 정지혜 감독의 영화에 함께하며 그 시선의 편에 서고 그 믿음을 함께 건네고 이들의 발화를 기다리는 이유이다. 

 

 

*작품 보러 가기: 〈면도〉(정지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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