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투성이 연인〉 리뷰: 우리 앞에 놓인 얼굴.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태현 님의 글입니다.
재이와 건우는 함께 사는 연인이다. 식사를 나누고, 섹스하고, 서로에게 기대는 이들의 모습은 한 화면 아래 편안해 보인다. 두 번째 소설을 마무리한 소설가 재이와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영어학원 강사 건우는 각자 앞에 놓인 삶에 충실해 보이고, 교외에 사는 시인 부부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자면 두 명이 떠올리는 미래의 모습도 크게 어긋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둘 사이에서 원한 적 없던 아이가 생기고, 건우는 사실 아이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꾼 적 있다고 고백한다. 낙태를 원하는 재이는 건우로부터 왜 이렇게 이기적이냐는 말을 듣는다. 둘은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결정했었다. 시간이 갈수록, 둘은 분절된 시간 속에 놓이고, 한 화면에 놓여있는 순간에도 각자의 공간을 점유하며 팽팽하게 다툰다. 재이는 유일하게 자신의 입장을 생각해 준 동료 작가 유정의 장례식에서 시작된 진통과 함께 출산하고, 그 시간 건우는 학원 원장과의 다툼에서 큰일을 저지른다. 둘은 교도소 접견실 유리 너머로 대화 나눈다. 이제 둘이 함께 담길 수 있는 공간은 없고, 어깨를 두고 마주할 수도 없다.
처음에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보는 일이 힘들었다. 영화가 설정한 관계를 납득할 수 없었다. ‘건우는 아이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고 있었으면서도 왜 다르게 말한 거지?’, ‘자신의 입장을 줄곧 분명하게 말하고 있던 재이는 왜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가?’. 둘의 입장이 정말로 동등한 위치(숏과 역숏, 혹은 투숏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다뤄져야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재이의 입장을 생각해주지 않는 이들의 대사가 괴로웠고, 영화는 이를 자연적인 대화라고 생각하며 쉽게 재생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 영화의 시선을 발견하는 일이 어려웠다. 하지만 영화를 다시 보니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었다. 감상이 변화한 것은 이질적으로 느껴진 두 장면 때문이다.
건우가 근무하는 학원의 수습 교사 미애는 월급이 밀리고 수습 기간이 임의로 연장되는 부정을 겪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학원 원장에게 똑바로 말한다. 건우는 그 모습을 창문 밖에서 지켜볼 뿐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원장실 안으로 들어가 미애와 원장의 대화를 담는다. 이전까지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재이와 건우, 두 인물의 모습이나 시선 너머를 찍지 않았고, 이후로도 그렇다. 건우에서 벗어나 미애를 중심으로 장면화된 미애와 원장의 대화는 이질적이다. 이어지는 회식 장면은 다시 건우가 바라보는 것을 오가며 영화의 기본적인 시선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엔 돌이킬 수 없는 성질의 변화가 생긴다. 우리는 더 이상 재이와 건우를 주체로 하는 이야기를 단순히 전달받는 관객으로 남을 수 없다. 영화의 시점은 언제라도 제삼자로 옮겨갈 수 있다. 미애의 어깨 너머로 전달되는 건우와 원장에 대한 쇼트는 미애를 생각하는 건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건우를 바라보는 미애의 쇼트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원장의 모습에 대해 고민만 할 수 없다. 그는 미애의 얼굴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할 테고, 우리 관객 또한 그렇다. 미애가 “우리하곤 안 맞네.”, “어디서 협박이야”라는 말을 듣고 있을 때, 우리는 이에 대한 입장정리를 요구받는다. ‘건우도 힘들겠네’, ‘우리의 삶도 그렇지’ 따위의 수수방관적 입장을 견지할 수 없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에는 음악이 없다. 음악뿐만 아니라 외화면에서 들려오는 소리 또한 드물다. 유일하게 들리는 화면 바깥의 소리는 진통을 마주한 재이를 묘사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드디어 고쳐진 가로등 아래를 지나가며 건우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는 내레이션뿐이다. 첫 번째 소리가 화면에 있는 인물이 겪는 고통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면, 두 번째 내레이션은 화면에 없는 인물의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둘은 다르다. 유일하게 화면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인 내레이션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건우는 꿈이 무엇이냐는 재이의 질문에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미래 속에 자신의 자리는 있냐는 재이의 말에 당연히 있다고 답한다. 누군가는 이를 건우의 진심 어린 사랑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 사라진 지금, 그의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라는 소박한 꿈이 어떻게 좌절되었는지 영화를 통해 떠올리는 것이 더욱 적절해 보인다. 상처로 가득한 연인의 시간을 통해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질문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것일 테다. 건우는 어떤 사회의 모습 앞에 침묵하는가. 임신과 출산을 앞둔 재이가 마주하는 말들은 무엇인가. 그들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임신과 출산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자연적 상태는 어느 지점에 놓여있는가. 대답해야 하는 자리에 놓인 우리는 어떻게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건 어쩌면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우리는 재이를 힘겹게 하는 수많은 반례를 볼 수 있었다.
재이와 미애는 이기적이라고 판단 당하고, 이들의 입장은 쉽게 무시당한다. 그 시선과 별개로 재이는 자신의 글을 써나갈 것이다. 황급히 떠나가는 모습으로 영화 속에서 자취를 감춘 미애 또한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들의 미래를 응원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애초에 이들이 바깥으로 내몰리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건우는 이들에게 손을 뻗지 못했다. 영화에서 퇴장한 건우의 자리에 놓인 것은 우리 관객이다. 이제 우리는 이들의 얼굴 앞에서 우리의 입장을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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