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있는 사람〉 리뷰: 한영의 풀이 방식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이빈 님의 글입니다.
한영사전의 사전적 정의, 한국어를 영어로 풀이한 사전. 주인공 ‘한영’의 이름을 듣자마자 한영사전을 떠올렸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새터민 한영은 중국에 거주할 당시 익힌 언어로 중국인을 상대하는 관광통역안내사 일을 하고 있다. 한영사전은 같은 지면을 공유하고 있지만 한국어는 영어로 풀이된다. 한영은 서울에 발 딛고 서 있지만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중국어로 풀이한다. 한국이 낯설 관광객 앞에 작은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서 있는 가이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믿을 수 있는 사람보다는 믿어야만 하는 사람에 가깝고, 북한에서 한국, 한국에서 중국을 풀이해야 하는 사람의 위치에 한영은 있다.
한국으로 넘어온 한영은 새롭게 살고 싶었다. 개명을 원했던 한영이 면접장에서 돈 잘 벌고 싶다는 포부를 발화하는 것은 새사람이 되어 새 삶을 찾고 싶은 마음의 응집이었을 것이다. 한국에 넘어왔다는 것만으로 많은 부분들이 새로워졌지만 이 새로움은 자유로움이 되어 주지 못한다. 외국인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는 새터민이라는 이름으로, 지반을 고르게 만들 틈도 없이 대표자가 된 탓이다. 믿을만한 가이드가 되어야 하고, 북한에 계시는 엄마에게는 매번 돈을 보내는 딸이 되어야 한다. 한국에 넘어오지 않은 새터민들에게 한영은 행실을 잘 해야 하는 선대의 새터민이기도 하다. 한영의 ‘다시 살기’는 살아 보기도 전에 기다리고 있는 역할들로 인해 피곤하다.
관광버스 창가에 앉은 한영의 표정이 어둡다. 한국으로 넘어온 동생인 인혁의 소식이 어느 순간부터 끊겼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인혁의 답장을 기다리고, 행방을 수소문하지만 한국에서 돈을 벌어 함께 살고자 했던 과거의 소망은 아무래도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 한영에게는 약속으로 똘똘 뭉칠 수 있었던 관계들이 있었지만 때로 약속은 약속일 뿐이다. 서로가 알았던 약속이 허물어지고 나면, 원하든 원치 않든 시간은 흐른다는 사실이 기다리고 있다. 한영은 계속해서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기복 없이 힘써야 하고, 필요에 따라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한영의 표정이 어두운가. 한영을 다시 바라본다. 어둡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한영의 표정이 복잡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던 것은 온 방향으로 한영을 끌어당기는 느슨한 연결들이 있어 그랬다. 중국에서 알던 친구와의 재회는 반갑지만은 않고, 유일한 새터민 친구 정미의 이민에 잘 가라고 말해 줘야 한다. 인혁과는 다른 미래를 그리게 되었고, 보호 관찰자의 친절은 마음 없는 친절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한영은 연결들을 쉽게 덮어두지 않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과 상황을 통과한 한영의 얼굴에는 모두의 얼굴이 있다. 하지만 한영이 누구인가. 한국에 발 디딘 순간부터 사람과 상황을 풀이해야 했던 가이드다. 어느 순간, 풀이의 방식은 스스로에게 닿아 정미가 했던 ‘네 식대로 하라’는 말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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