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 리뷰: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들
*관객기자단 [인디즈] 조영은 님의 글입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어떤 아름다움과 마주한다. 오프닝 화면 속의 두 사람은 쇠검은머리쑥새의 소리를 담아내기 위한 어느 한 지점에 놓여있다. 무수한 갈대 사이에 허수아비처럼 줄곧 그 자리에 서 있는 그들에게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한들 포기하는 법은 없어 보인다. 그들을 둘러싼 세계의 변화들은 그저 무용하게 느껴진다. 왜인지, 미지의 여정과도 같은 장면 그 너머에는 강인하고 끈질긴 아름다움으로 이어진 단단한 세계가 있는 것 같다. 〈수라〉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카메라에 오래간 묻어두며 쌓여갔던 시간은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그 세계와 마주한다. 본래 도요새가 날고, 고둥이 헤엄치고, 농게가 지나가는 자리에 영화는 그에 부합하는 소리가 따르지만, 쇠검은머리쑥새의 소리를 녹음하던 황윤 감독의 귀를 뚫고 들어오는 것은 수라 갯벌을 지나는 전투기 한 대다. 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던 그들을 따라 끝내 아무런 소리가 없는 장면 앞에 도달한다. 그 기다림의 끝엔 무엇이 있었길래, 우리를 무소음의 세계로 이끄는 것일까. 마지막 장면에서 마주하는 이 영화 속 유일한 사운드의 부재는 곧 그들의 자리가 사라짐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라〉에서 일인칭 내레이션으로 들려오는 황윤 감독의 목소리에는 기나긴 역사가 담겨있다. 서울에서 군산으로 다시 이사 온 황윤 감독은 오래전 캠코더로 촬영된 푸티지들을 꺼내어 재생한다. 해창 갯벌에 새로운 장승을 세우던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의 모습이 담겨있다. 하지만 묻어뒀던 캠코더의 잿빛 화면에 담긴 아름다운 시간은 없어 보인다. 새만금 간척사업의 성지와도 같았던 곳이지만, 더 이상 발길이 오가지 않는 그곳에 현재 남은 것은 지난 문명의 흔적뿐이다. 여기엔 황폐하게 방치된 땅을 황윤 감독과 함께 밟았던 두 사람의 자리가 있다. 푸티지에는 갯벌의 전사라 칭하던 어민 류기화 씨가 해상 시위에서 목소리 내던 모습이 담겨있다. 그는 황윤 감독을 집으로 초대해 생합탕을 끓여주며 환대하지만, 곧바로 정부의 물막이 공사 풍경으로 이어지는 장면 배치는 그 시간이 무참히 단절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어지는 풍경 몽타주로 그의 자리는 밀려난 것처럼 보이고, 우리는 온몸으로 저항하지만 점점 밀려나는 류기화 씨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본다. 황윤 감독을 환대하던 또 다른 한 사람인 이강길 씨의 얼굴 또한 우리는 오래 바라볼 수 없다. 서로를 카메라에 담아내던 그의 자리는 빠르게 지나가는 몇 가지 사진들로 대체되고, 다시 영화는 현재로 돌아와 황무지처럼 드넓은 땅을 바라보는 황윤 감독의 뒷모습을 비춘다. 여기엔 그를 환대하던 두 사람의 얼굴을 지나, 그들의 빈자리만큼이나 긴 공백의 자리에 선 인물이 있다. 두 사람의 부고가 담긴 테이프를 다시 꺼내어 본다는 것은 기다림의 끝이 아니라 어떠한 시작점에 서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수라〉가 가지는 특별함이 있다면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뒤편에 삶을 성찰적 태도로 바라보며 찬찬히 성장해 나가는 감독 자신이 있다는 점이다. 황윤 감독은 봉인되었던 카메라를 꺼내고, 기억의 조각을 스크린에 띄우고, 직접 그들의 자리를 메우면서 다시 카메라 앞에 선다. 인터뷰 대상만을 찍는 것이 아니라 대답하는 사람과 청취하는 사람을 한 프레임에 담는다. 영화는 모든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태도로 묻어두었던 과거와 다시 마주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 흩어져 있던 과거의 파편들에 현재의 내레이션을 더하면서 그가 발을 딛는 역사가 자연스레 관객에게 전해진다. 관객은 그가 다시 군산에 발을 딛고 목격자에서 피해당사자로 점철되어 가는 과정과 함께한다. 영화는 노동자의 운동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주체가 누구인지, 그 수많은 죽음을 목도한 그가 어떠한 시간을 지나쳐 왔는지, 현재도 어떻게 죽어가는 생명들을 방관하고 있는지 또한 보다 중요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이야기 위로 우리는 점점 아름다움을 상실한 풍경과 맞닥뜨린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황무지에 덩그러니 놓인 사체이고, 더 이상 펼칠 수 없이 말라버린 새의 날개이다. 카메라는 그것을 어루만지고 바라보는 오동필 씨의 눈과 손을 지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잿빛 하늘을 비춘다. 그의 눈은 다시 황윤 감독의 눈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는 언제나 그 너머에 ‘눈’이 있다. 그가 마주한 풍경의 강인함이 다시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움과 마주하도록 만든다.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답다는 의미로 풀이되는 수라에서 우리는 감독의 이야기를 따라 아름다움과 조우하게 된다. 영화는 수라가 품은 생명에 온 시간을 바친다. 살아 움직이는 시간으로 전이되는 관객의 자리는 프레임의 주체가 된 이들과 나란히 연결된다. 우리는 인간과 비인간 생명의 관계를 비추는 시선을 따라간다. 영화는 생명들을 가까이 들여다보는 것만큼이나 인물들 또한 자주 클로즈업으로 기록한다.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눈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곳을 오래 응시하는 눈을, 수라 갯벌에 품은 비통한 마음으로 탄식하는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적극적으로 보고 듣는 감각으로 살아내려는 감독의 끈질긴 응시가 느껴진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카메라는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 새와 그를 찾아다니는 흰물떼새 부부의 모습을 포착하며 네 식구가 모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때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아들 도영이 어렸을 때 마트에서 눈앞에서 사라져 애타게 찾았지만 바로 옆에 있던 경험을 들려준다.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애타는 기다림 끝에 만나는 소중한 것에 있다. 황윤 감독은 “조사단을 찍던 나는 어느새 조사단이 되어있었다”며 고백한다. 오래전 캠코더에 담긴 시민생태조사단의 모습과 이십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그들이 같은 자리에 있음을 알려주는 장면은 그래서 감동적이다. 그들이 살아온 시간은 수많은 폭력과 마주한 투쟁의 시간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멸종위기종의 이름 하나, 하나를 기억하고 하나라도 더 찾아내는 움직임에 있다. 그렇기에 촬영된 푸티지 속의 사람 한 명, 한 명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과 빠르게 교차되어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러므로 영화는 그 기다림의 시간에 보답이라도 하듯, 말미에서 쇠검은머리쑥새의 노랫소리를 ‘사랑 노래’(A Love Song)라고 우리에게 소개한다. 너머로 볼 수 없는 저 바깥에 무언가는 없다고, 그곳엔 이 아름다운 소리가 없다고, 그러니 이곳은 바깥과 분리되어 ‘사랑’이 가득한 곳으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수라〉는 영화의 영어 제목(Sura: A Love Song)과 같이, 아름다움에 관한 기나긴 기록이다. 부당한 국가 폭력이 그들의 기다림을 가로막고 더 이상 그다음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들지만, 이에 대한 당위적 서사보다 삶을 이어 나가는 날갯짓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 둥지에 알을 품고 있는 어미 새 옆에서 매립 작업 중인 포크레인을 보며 우리는 절망할 것이다. 그러나 이 다음 카메라는 다시 어미 새를 클로즈업하고 하늘을 비행하는 검은머리갈매기를 고속촬영으로 포착해 낸다. 알을 깨고 나와 수라의 주민이 된 세 남매를 멀리서 지켜보고, 또다시 검은머리갈매기의 비행을 담는다. 우리는 프레임 중앙을 가득 채운 갈매기의 날갯짓을 보며 이따금 살아내려는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옥구염전에서 보았던 도요새의 군무 또한 마찬가지다. 한 프레임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무수한 개체수의 움직임이 저물녘 노을빛에 반사되어 일렁이고, 그 아름다운 물결 행진이 형성하는 바람 소리로 이어지는 긴 군무 앞에서 우리는 ‘사랑’으로 기록한 아름다움 앞에 그만 무너지고 만다.
황윤 감독은 수라 갯벌에 다시 물이 들어오고 점차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군산에 다시 온 것을 후회하지 않고 “새들처럼 이곳에서 아이를 키우고 살아야 한다”라고 이야기한다. 그 말이 단순히 희망이나 다짐의 어조가 아니라, 기필코 ‘살아내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이어진 장면에서 그의 내레이션 아래 갯벌에서 몸을 꼬물거리며 구르는 아이들의 모습과 그곳에 사는 생명체들의 움직임이 그려진다. 그 너머에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황윤 감독과 오동필 씨, 도영과 승준이 있다. 이곳은 멀리서도 자기 자식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의 공통된 삶의 터전이다. 승준은 쇠검은머리쑥새의 소리를 찾아내기 위해서 새 도감을 펼치고 연필로 스케치한다. 또 다른 기다림을 마주하는 시간을 손으로 먼저 느끼고, 눈으로 관찰하고, 귀를 기울이는 감각으로 다가가는 그의 단단한 시간이 있다. 영화가 단순히 이미지와 사운드로 전하는 매체일 뿐만 아니라 시간을 기록해낸다는 점에서 〈수라〉는 그 미덕을 발휘한다. 그렇게 우리는 영화의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온다. 육지화가 진행되어 자라난 갈대 사이에 서서 황윤 감독과 승준이 애타게 기다리던 것, 쇠검은머리쑥새의 노랫소리를 찾아 귀 기울이던 시간에 함께 놓일 수 있다.
하지만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 끝에는 사랑 노래가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고 의지하던 얼굴을 무너트리는 난해한 소음이다. 카메라는 일제히 날아가는 새들의 날갯짓을 뚫고 지나가는 전투기를 포착한다. 일부 새들이 앞 유리창에 부딪혀 아래로 떨어진다. 이어진 장면에서 어린이집 아이들이 직접 그려낸 그림을 손에 들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림에는 군사기지 반대에 관한 문구가 적혀있다. 이는 “이전 세대가 본 것을 우리는 더 이상 볼 수 없고, 다음 세대는 더 할 것”임을 전하는 메시지와 같다. 그러나 〈수라〉는 세대 간의 단절을 방관하지 않는다. 여기서 카메라가 향하는 것은 저 멀리 승준과 도영이 함께 수라 갯벌로 향하는 뒷모습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흰물떼새 가족의 시간 앞에 놓인다. 영화는 어미 새가 새끼 새에게 먹이를 가져다주고 그들이 멀리 떨어져 있다가 다시 모이는 순간을 기어이 담는다. 이곳에서 버텨내고, 살아내고, 지켜낸 생명들의 수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그래서 그 생명들을 잊지 않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 그렇기에 계절의 변화를 새들의 오고 감으로 느끼게 되었다는 새로운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황윤 감독은 ‘아름다움을 본 것이 죄를 짓는 것 같다’는 오동필 씨의 말을 떠올리며, “그럼 나도 이제 죄인이 된 건가”라고 읊조린다. 그의 말과 함께 우리는 모두 그 아름다움의 현장에 놓인다. 어떠한 대답도 없이 우리는 기꺼이,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있다.
영화는 긴 고요 속에 흐르는 드론숏으로 바라본 수라 갯벌의 오랜 응시로 막을 내린다. 인간의 시점으로 새를 바라보던 영화가 이제는 새의 시점에서 갯벌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선다. 클로즈업으로 담아낼 만큼 생명과 가까이서 공명했던 카메라가 물리적으로 거리를 둔 이 장면에는 그들의 삶의 터전인 땅을 훑는 카메라의 움직임만이 존재한다. 만일 움직임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너머의 무엇을 상상할 수가 있을까. 일 년 동안 지구 반 바퀴를 비행하는 도요새의 생애에서 수라 갯벌은 잠시 먹고 쉬어야 하는 거처이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을뿐더러 움직임조차 지속되지 않는 순간은 곧 도요새의 터전이 망가짐을 의미할 것이다. 터전을 잃는다는 것은 도요새뿐만이 아니다. 앞서 영화는 같은 시점의 쇼트를 이미 관객에게 제시한 바 있다. 우리는 나무 같기도 하고 핏줄 같기도 한 갯벌의 무수한 형태를 목격하였으므로, 이에 사운드가 사라진 마지막 장면으로 다시 마주한다는 것은 그 무엇도 망각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수라〉는 오랜 기다림의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이다. 이는 거대한 영토나 시시각각 변화하는 무늬를 넘어서 생명체들의 뿌리가 되고 피가 흐르는 삶의 터전이자 그 바깥에서 함께이길 소망하는 이들을, 이곳에서 희생된 생명의 어떤 ‘시간’을 기억하는 데서 비롯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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