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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드림팰리스〉: 위를 바라볼 수 없음, 이웃이 될 수 없음.

by indiespace_가람 2023. 6. 16.

〈드림팰리스〉리뷰: 위를 바라볼 수 없음, 이웃이 될 수 없음.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태현 님의 글입니다.

 

영화 〈드림팰리스〉 스틸컷

 

자동차 뒷 유리창에 붙어 있던 단결투쟁 스티커를 홀로 떼어 낸 혜정은 드림팰리스로 향한다. 혜정은 탁 트인 푸른 하늘과 건물의 꼭대기를 올려다보고, 드림팰리스 또한 그를 내려다본다. 우리는 건물의 시선에서 찍혀있는 하이앵글로부터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란 어떤 의미인가 생각해 볼 수 있고, 단결투쟁 스티커를 떼던 모습을 떠올리며 감히 배신자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혜정은 아파트로부터 무엇을 욕망하고 있을까. 갓 이사 온 집을 정리하는 혜정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는 그저 작은 고요함을 바라는 것 같다. 하지만 집 안에서 나오는 녹물이 고요를 깨고 그를 사람들 사이로 불러낸다.

 

 

영화 〈드림팰리스〉 스틸컷

 

〈드림팰리스〉의 세계에서 사람 사이로 불러내어진다는 것은 편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물들은 자주 자식의 이름이 덧붙여진 부모(‘수인’을 부르는 호칭 ‘성민엄마’), 혹은 자신이 맡은 지위로(‘호섭’과 ‘인모’를 부르는 호칭 ‘대표님’) 불린다. 개인의 입장은 집단을 거치지 않고서는 전해지지 못한다. 녹물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혜정의 개인적 소망은 건물의 하자를 숨겨야 한다는 편에 가려 온당히 해결되지 못한다. 그래서 혜정은 자신의 최선을 찾아 이리저리 편을 옮겨보지만, 혜정의 행동과 그에 따른 결과는 사람들이 묶어내는 ‘우리’라는 품이 얼마나 작은지 고발하게 될 뿐이다.

 

드림팰리스 입주민들에게 ‘우리’는 할인 분양 받지 않고 제값을 지불하고 들어온 입주민만을 의미하고, 함께 가족의 일원을 잃은 유가족 모임에서도 하청업체 노동자와 기업 관리자의 유가족은 나뉜다. 동일한 상황에 놓여, 동일한 목적에 동의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우리’가 된다. 함께 싸우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할 ‘우리’는 당장의 쓸모에 따라 배타적으로만 쓰인다. 입주민 대표 인호는 분양 홍보 전단을 붙이는 혜정에게 ‘어느 편’이냐 물으며 자동차의 앞을 막아버리고, 유가족 대표 호섭은 ‘우리’안에서의 외로움을 고백하는 혜정의 말에 어떤 반응도 내보이지 못한다. 혜정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길성하이텍 건물 화장실에 질러진 불에 대해 동욱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들을 향해 혜정은 “지금 우리 애를 의심하는 것이냐”며 질색한다. ‘우리’의 조건과 함께 찾아가야 할 책임자에 대해 따져 묻는 일은 모두에게 뒷전이다.

 

 

영화 〈드림팰리스〉 스틸컷

 

영화 속에서 아파트는 주거 공간이 아닌 지위와 성취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래서 이웃이 되는 일은 터전을 가까이하는 일이 아니라, 이익집단에 속하는 일이 된다. 하지만 투쟁에 나선 사람들이 대항해야 할 책임자들의 모습은 어떤 순간에도 비춰지지 않는다. 산재사고의 진실을 밝히는데 협조해야 할 길성하이텍의 고위직은 어떤 방식으로든 등장하지 않고, 드림팰리스의 건설사 또한 그렇다. 모델하우스의 분양상담사는 잠시 책임자처럼 보이지만, 높은 층이 아닌 1층의 구석 탕비실에서 추레하게 나오는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그 또한 작은 톱니바퀴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황의 답답함을 품고 길성하이텍의 화장실 창문으로 던져진 불씨는 위로 향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바닥만을 태운다. 투쟁의 열기는 위를 향하지 못하고 1층에 놓인 서로를 향한다.

 

카메라는 모든 불화 안에 놓여있는 혜정의 뒤를 좇는다. 관객은 혜정이 그 나름의 최선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세대의 분양이 끝나야만 녹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분양상담사의 말에 따라 미분양 세대의 입주를 위해 직접 홍보에 나서고, 유가족의 천막에서 벗어났지만 같은 처지였던 수인과의 관계를 놓지 않고 그의 아이를 돌본다. 자신의 마음에 솔직한, 선의라고 믿었던 혜정의 선택들은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기에 줄곧 좌절되고,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부른다. 나와 이제 상관없다며 끊어냈다고 생각한 관계들은 어떻게서든 다시 돌아와 혜정을 연루시킨다. 작은 고요를 찾기 위해 선택한 아파트는 더 큰 소란 속으로 그를 잡아끌고,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성에서 물러났지만, 유가족 대표의 죽음은 도덕적 층위에서 그를 혼자 남겨진 실패자로 만든다. 수인과의 관계는 양쪽 사이에서 완전히 무너진다.

 

1층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갈등을 그리기 위함인지 아이레벨을 고수하던 카메라는 무너지는 혜정의 상황을 몇 안 되는 하이 앵글-로우 앵글 관계로 예리하게 포착해 낸다. 희망을 품고 올려다보던 아파트에는 입주민들의 빨간 걸개가 걸려있고, 스크린에 띄워진 유가족 대표 호섭의 영정사진이 혜정을 내려다보고, 수인과의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그의 집의 계단을 오르는 혜정은 책망의 대상으로 내려봐진다. 구치소의 철창 너머로 대화하던 수인과 혜정의 관계에서, 이제 철장 안에 놓인 사람은 혜정이다. 새로이 이사 온 이웃이 이사 떡을 건넬 때, 혜정은 가족이 셋이라 말하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다. 혜정이 ‘우리’라고 칭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없다. 그가 원했던 고요와는 다른 일이다. 혜정은 악몽과도 같은 사건들의 여진을 홀로 떠안는다.

 

 

영화 〈드림팰리스〉 스틸컷

 

세간의 호평처럼 〈드림팰리스〉는 혜정이라는 구체적인 개인의 얼굴에 초점을 맞춰 순수한 피해자라는 이미지에서 벗겨낸다. 하지만 모두의 선의가 좌절되는 구조를, 영화가 비판하고자 하는 그 구조를 재현하는데 머무르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영화가 그리는 세계 속에서 한 명의 개인은 결국 이미지와 진영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혜정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고성은 강조되고, 영화의 장면구성은 혜정의 불화를 예고하는 데 집중한다. 그 안에서 혜정의 여정이 발견할 수 있었던 좌절된 가능성 같은 것은 없다. 뒤늦게 공개된 산재 사고 현장의 CCTV는 유가족이 투쟁한 결과물이자 혜정의 외로운 시간을 교정할 수 있는 증거지만, 이미 모두에게 늦어버렸기에, 이야기의 비극성을 강화하는 데 그칠 뿐이다. 이를 영화의 통렬한 현실인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테고,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의 부조리함을 영화의 동력으로만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다. 감상을 택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다만 한 가지는 짚어내고 싶은 것은 〈드림팰리스〉가 아이들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수인의 아이 주희는 상황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거운 대화를 나누는 성민과 혜정의 옆에서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즐거운 표정으로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길게 이어지는 풀 샷 안에서 그려진다. 모델하우스를 찾은 수인의 곁에서 고함을 지르는 주희는 혜정의 동선을 분양상담사에게 이끌고는 구석에서 조용히 있다. 우리는 영화가 재현된 세계임을 알고 있고, 저기서 즐거운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는 아이는 지시받아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분명 상황을 이해하고 연기한다. 하지만 〈드림팰리스〉는 아이들을, 특히 주희를 상황을 이해해보려는 주체가 아닌 지켜야 할 책임의 대상으로 순수의 자리에 남겨둔다. 혜정과 함께 사건의 여진을 떠안게 된 아이의 모습이 눈에 걸린다. 우리는 경비원의 손에 이끌려 위층으로 올라가는 주희의 미래를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빼곡히 감정적 난장을 만들어 내는 영화의 솜씨에 감탄했고, 현실을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연출자의 말에도 동의할 수 있지만, 적어도 나는 〈드림팰리스〉에서 우리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을 찾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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