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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스프린터〉: 회색 빛의 스포츠 영화

by indiespace_가람 2023. 6. 12.

 

〈스프린터〉리뷰: 회색 빛의 스포츠 영화

*관객기자단 [인디즈] 안민정 님의 글입니다. 

 

영화 〈스프린터〉 스틸컷

 

‘제자리로’ 라는 말은 잔인하게 들린다. 스타팅 블록에 발을 대는 구호에 불과하단 걸 알지만, 어쩐지 자꾸만 제자리는 여기가 아니라 트랙 밖이라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이미 자리 잡았다 해도 여전히 당신 자리가 아니니,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말이다. 귀를 찢는 신호총의 총성까지 합세하면 마침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는 기분에 휩싸인다.

 

하지만 슬픈 것은 신호탄을 듣는 이가 트랙에 올라선 이라는 것이다. 달리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제자리로’라는 구호를 듣는다는 점이다. 〈스프린터〉는 달리기를 사랑해서 달리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달리기에게 미움받고 쫓기는 과정을 보여준다. 내가 사랑하는 일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패배감이 낯설지 않다. 달리기의 여신이 나를 향해 손들어 주면 좋을 텐데, 매번 포기하라는 듯이 손을 내젓는 그 초조한 과정들이 말이다.

영화 〈스프린터〉 스틸컷

 

매번 출발이 아니라 도망치는 기분에 휩싸이면서도, 계속해서 달리는 이유는 어쩌면 하나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통점. 바로 루틴이다. 영화는 30대 현수(박성일)를 통해 보여준다. 현수는, 마치 나무 깎는 노인이 칼을 갈듯 달린다. 그를 둘러싼 해와 구름과 군중이 지나가고, 심지어 본인 속에서 세월이 지나가도 그는 묵묵히 자기가 만든 루틴을 수행한다. 현수가 만든 루틴은 치열하게 세공된 그만의 세계다. 현수뿐 아니라 정호(송덕호)와 준서(임지호)에게도. 남들이 루틴이라고 부르는 각자의 세공된 세계가 있다. 평생 나무를 깎게 되듯이, 너무 치밀하게 세공된 세계에서는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영화 〈스프린터〉 스틸컷

 

 

달리면 필연적으로 멈추게 된다.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끝나는 것처럼. 달리지 않는 것이, 시작하지 않는 것이 곧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방법이라니. 사랑하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미워질 예정이라니. 하지만 극장 좌석에 앉은 내가 이런 막막함에 잠길 때, 〈스프린터〉의 인물들은 웃는다. 사랑받지 않는데도, 필연적으로 버림받을 텐데도, 도착지가 실패일 줄 알면서도 말이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끝까지 달려본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랑을 보자 오히려 막막함이 걷힌다. 승리가 아니라 달리기를 사랑한 것이니, 애초에 실패는 틀린 전제일지도 모른다.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이 떠오르는 구성 방식의 이 영화에서 나는 어쩌면 비슷한 위로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덮고 극장을 나서면 내 옆을 스쳐 가는 사람을 괜스레 돌아보게 되는, 천차만별의 일률적인 세계를 목격한다. 누군가의 일상적 여백에 내가 켜켜이 쌓인다. 당신의 고통 한 줄에 어쩌면 나도 거닐었을지 모른다. 나의 세계에, 당신도 살아가고 있다. 트랙을 한 번 더 달릴 힘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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