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투 서울〉리뷰: 공허의 공간으로
* 관객기자단 [인디즈] 임다연 님의 글입니다.
처음 본 악보를 바로 연주하는 일은 다소 무계획적일테고, 악보를 그대로 따라가기보다도 악보에 기반한 우연의 연속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눈 앞에 닥치는 음표를 넘어 달리기 위해 간신히 무마하는 임기응변의 타래들로 이어진 음악은 작곡가의 의도보다 순간의 우연과 연주자의 손이 가닿는 운명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초반 ‘시주(視奏)’에 대해 설명하는 프레디는 앞으로 〈리턴 투 서울〉이 어느 곳으로 향할 것인지를 설정한다. 악보에 무작정 달려든 연주자처럼, 상황의 높낮이를 가늠하지 않고 단박에 타고 넘는 프레디는 종종 깨지고 떨어지기도 하며, 유연하게 흐르기도 한다.
영화는 어릴 적 프랑스로 입양을 간, 한국계 프랑스인 프레디를 조명한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나이에 한국을 떠난 프레디가 다시 돌아온 것은 의도한 여행이라기보다는 우연의 산물로, 일본을 가려다 기상 악화로 인해 한국으로 발걸음을 돌린 탓이다. 별 생각 없는 관광객처럼 보였던 프레디는 친부모를 찾을 생각이냐는 질문에 의아해 하고 당혹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프레디의 양부모와의 통화에서 그의 한국행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가 결정한 한국행은 마치 ‘시주’처럼, 두려움의 징후를 파악하고 곧장 달려든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입양 후 좋은 부모를 만나 부족함 없이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친부모에게 버림 받았다는 사실은 프레디의 마음 한 켠에 깊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하다. 나자마자 버림 받았다는 사실은 어릴 적에는 굳건한 둘레로써 작용했어야 할 ‘가족’이라는 개념에 금을 그어버렸고, 그로 인해 그가 겪어야 했을 결핍과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순차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서양 국가에서 동양인 여성으로써 자라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니, 아무리 좋은 부모라 할지라도 프레디의 외로움을 해결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을지 모른다. 타자가 아니라고 생각해도 끊임없이 상기될 수 밖에 없는 타자성은, 프레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이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의 삶에는 고독과 결핍이 자리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그에게 서울은, 빈 자리의 근원지이다. 그가 버림 받은 국가이고, 그를 버린 부모가 살고 있는 곳이다. 언제든 서울을 방문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굳이 서울에 오고자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 빈자리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친부모를 찾고자 하지 않았고, 거주지를 듣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자신이 버림 받았던 사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거부감을 느낀 프레디는, 그러나 도망가지 않고 맞닥트리기를 택한다. 술자리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자리 배치를 이리저리 바꾸며 긴장을 만들어 내는 프레디는 두려움을 회피하기보다는 끝까지 마주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도에 무색하게 한국의 프레디는 끊임없이 단절된다. 스스로가 아무리 프랑스인임을 어필해도 주변인에 의해 자연스럽게, 어쩌면 폭력적으로 한국인으로 인식된다. 한국에서 만난 가족들은 그에게 한국 남성과 결혼해서 한국에서 자리 잡으라고 말하고, 처음 본 사람들은 그에게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말을 건다. 테나 역시 처음 본 프레디에게 한국어로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할머니마저도 한국어로 말을 건다. 외모가 동양인이고, 한국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프레디를 손쉽게 한국인으로 만들려는 주변의 태도는, 그가 커오면서 겪었을 인종차별과 정체성 혼란을 자연스럽게 상기시킨다. 영화에서도 수없이 비추어진 지레짐작으로 알 수 있듯이, 그의 외양이 한국인과 닮았기 때문에 그는 프랑스에서도 온전히 프랑스인이지 못했을 것이고, 당연히 프랑스인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한국인일 수 없다. 그가 하는 말마저도 절제되고 완곡한 언어로 가려질 수 밖에 없는 공간에서, 프레디는 본래 자신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가 한국으로 계속해서 돌아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러한 빈 자리를 오히려 해소하기 위함이다.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프레디를 만나기를 끊임없이 거부한다. 어머니의 이러한 태도는 프레디로 하여금 그가 정말로 버려진 사람이라는 것을 무의식 중에 상기시킨다. 만나자마자 구차하게 매달리고 전화하던 아버지와 달리, 도시가 좋아 아버지를 떠났다는 어머니는 프레디의 간절한 연락에도 무시로 일관한다. 과거와 현재까지도 자신을 버리고 있는 어머니의 존재는, 프레디가 무의식 중에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결핍을 가중시킬 수 밖에 없다. 그 무엇도 신경쓰지 않을 것 같은 프레디가 스쳐 지나가는 말로 엄마가 자신의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고 말하는 장면은 그의 이러한 빈 구멍을 넌지시 제시한다. 어떤 식으로든 어머니를 만나기 전까지 프레디의 결핍은 사라질 수 없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를 버렸고, 여전히 버리고 있는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어머니까지 만나고서야 그의 한국행은 종점을 찍는다. 철저하게 프레디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짧지만 강렬한 재회 장면은 어머니를 차마 마주 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안으로 무너지며 우는 프레디의 모습에 방점이 찍혀있다. 그것은 그 울음이 모녀의 극적인 상봉 때문이 아닌, 명상을 하며 자신을 다스리던 프레디를 항상 무너트렸던 서울에서, 자신을 그곳으로 끌어들이던 공허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의 울음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공간적 배경은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서울이 아닌 곳에서는 자신을 다스리는 데 열심이었을 프레디의 명상과 같은 맥락에서, 순례자의 길로 추정해볼 수 있다. 어머니가 건넸던 메일 주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프레디는, 아버지가 갑자기 택시를 태워 보냈을 때와 달리 자신이 딛고 선 공간을 박차고 나가지 않는다. 대신 피아노 앞에 앉아 음악을 연주한다. 올려진 악보를 훑어 보고 바로 연주에 돌입하는 ‘시주’로, 그가 처음 한국에 와서 설명했던 것이고, 한국을 오가는 내내 그가 겪어야 했을 마음의 오르내림을 뜻하기도 한다. 더이상 자신의 육체로써 ‘시주’를 행하지 않고, 드디어 피아노 앞에 앉아 잔잔한 노래를 연주하는 모습은 프레디가 작게나마 안정을 찾았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의 발버둥은 그제서야 종점을 찍고, 앉을 수 있는 것이다. 온 몸을 소진하고 발버둥 치던 프레디가 더 이상 서울에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그가 돌아와야 한다면, 그의 공허가 안정되고 그의 두려움이 친숙한 것이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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