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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사랑의 고고학〉인디토크 기록: 21세기의 기사도라는 것

by indiespace_가람 2023. 5. 8.

21세기의 기사도라는 것

〈사랑의 고고학〉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3. 04. 16(일) 오후 2시 상영 후

참석 이완민 감독, 옥자연, 기윤 배우

진행 위근우 작가

 

*관객기자단 [인디즈] 임다연 님의 기록입니다.

 

 

한 명의 꾸준한 사람이 있다. 어찌 보면 미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요즘의 세상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끈기와 올곧음은, 정말이지 ‘기사도’라는 단어와 걸맞는 모습이다. 상대가 누구가 되었든, 한 발 한 발 꾸준한 걸음을 내딛으며 8년이란 시간을 파헤쳐 간 끈기의 고고학자를 영화는 마찬가지로 긴 시간을 들여 묵묵하게 바라본다. 주인공과 꼭 닮아 있는 감독과 배우들은 이상하리만치 곧았던 영화와 주인공의 뚝심을 납득할 수 있게 한다. 8년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 시간의 이유들을 되짚어 본다.

 

 

 

 

 

 

위근우 작가(이하 위근우): 안녕하세요, 오늘 진행을 맡은 위근우라고 합니다. 맨 오른쪽부터 영화 연출하신 이완민 감독님, 영실 역의 옥자연 배우님, 그리고 계획에는 없었는데 오늘 기운내서 와주신 인식 역의 기윤 배우님까지 세 분 와주셨습니다. 차례로 인사 부탁드립니다.

 

이완민 감독(이하 이완민): 안녕하세요, 영화 연출한 이완민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옥자연 배우(이하 옥자연): 안녕하세요. 영실 역을 맡은 옥자연입니다. 이렇게 영화를 보러 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좋은 시간 되셨으면 합니다.

 

기윤 배우(이하 기윤): 안녕하세요. 인식을 연기한 기윤이라고 합니다.

 

위근우오늘 인디토크 제목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불온한 관계'입니다. 배급사에서 먼저 제안을 주셨는데 듣고 좋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걸로 하자고 말씀을 드리고 나서야 이 제목으로 무슨 얘기를 해야할지에 대한 걱정이 들었습니다. 고민을 하면서 영화를 다시 봤는데, 영화의 제목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잖아요. 이 사랑의 의미에 대해 관객 분들마다 해석과 입장이 갈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크게 세 가지 갈래로 생각을 해봤어요. 영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지만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관점이 있을 수 있을 것 같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랑의 본질이라는 게 원래 저렇게 '엉망진창'이라는 관점이 있을 것 같고. 또 다른 관점은 사실 사랑이라는 건 본질이 있는 게 아니라 어떤 관계에 우리가 그렇게 이름을 붙일 뿐이다, 우정이나 관심 같이 다른 단어를 붙일 수도 있지만 누구는 거기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는 관점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출연자분들이나 감독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우리가 작품을 해석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감독님과 배우 분들께 각자 생각하시는 작품 속의 사랑의 의미와, 영실과 인식이 느꼈던 사랑이 이 세 갈래 중에 어디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완민: 저도 작가님께서 말씀하셨던 것들이 모호하기도 하고 궁금해서 이 작업을 하게 됐고요, 이 상황이 사랑인지 아닌지 혹은 원래 사랑이 그런 것인지에 대해 같이 대화를 나누면서 찾아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기윤: 저는 인식을 연기할 때 이것이 인식만의 사랑이라고 생각을 하고서 연기를 했어요. 다만 영화 속에 나오는 인식의 상태가 불안정한 상태라고 생각하고 접근했고, 저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때를 상기했던 것 같습니다.

 

위근우: 불안정성은 관계 속에서의 불안정성인 걸까요, 아니면 내 삶에서의 어떤 불안정성을 관계에 투영하게 되는 걸까요?

 

기윤: 후자 같아요. 저도 배우 일을 하면서 불안감을 느낄 때가 있거든요. 그리고 살면서도 제 상태가 불안정해질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 사람을 만나면 안 좋은 것들이 전이가 되는 것 같다고 느꼈거든요. 영화 속에 나오는 인식의 상태가 그렇다고 저는 생각해요. 자존감도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고.

 

옥자연: 영화 보신 분들이 올려주신 평 중에서 기억에 남은 문장이 '누구도 해답을 줄 수 없는 관계, 사랑의 어려움을 잘 그려내줬다'라는 말이었거든요. 정말 해답은 없는 것 같아요. 작가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에 대한 세 가지 답 안에서 저도 계속 진동하는 것 같거든요. 살아가면서도 그렇고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도 그랬고, 어느 순간부터 어디까지가 사랑인지를 알기가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저도 이제는 사랑이 아닌 것 같지만 책임감으로 유지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영실은 그것을 쭉 밀고 나간 케이스잖아요. 그 점에 있어서 존경심 비슷한 걸 느끼기도 했던 것 같아요. 이 지점은 어떻게 보면 영실의 실패이자 오류이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저는 든든함을 느꼈어요. 이런 상황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으면 안 되는 상황이지만서도, 이런 사람이나 캐릭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종의 안심을 주는 것 같아요.

 

 

 

 

 

위근우: 영실과 인식의 '약속' 장면 중에 인식이 화상 통화를 하면서 자신은 너무 유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헤어지는 것을 견디기가 힘들다고 말하자 영실이 알겠다고 하거든요. 저는 영실이 승낙을 한 이유가 당시에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약속을 한 것인지 아니면 영실이 말한 것에 대한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너무 궁금했어요. 그 궁금증이 생긴 이유는 영실은 굉장히 일관성을 지키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고 타인의 비일관성은 잘 못 참는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부당한 말을 들을 때에도 잘 참다가 인식의 비일관성은 바로 지적을 하는 걸 보면서 저 사람은 저런 걸 되게 못 참는구나, 라고 생각 했어요. 물론 이름 붙이기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영실이 일관성을 지켜내는 감정을 을의 입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고, 다른 인터뷰의 표현에 따라 기사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자연 배우님께서는 영실이 그것을 스스로 사랑으로 느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옥자연: 스스로 이게 사랑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면 사실 끝난 거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친구한테 내가 아직도 사랑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하면 이미 마음 정리가 된 거라고들 하는데, 영실은 그 질문을 하지 않은 것 같아요. 스스로에게 이게 사랑인지 아닌지 묻기보다 인식이 언제 괜찮아질지 들여다 보는 데 추가 많이 기울어져 있었던 것 같고, 이 사람이 해방되면 그 때 자신도 해방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질문의 대상이 영실이라면 그런 것에 대한 생각조차 없었다고 지금의 저는 얘기할 것 같고, 영실을 연기한 사람으로서 영실이 인식을 사랑한 것 같은지 물으신거라면 말씀하신대로 이름 붙이기 나름이지만,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너무 파괴적인 경우인 것 같긴 하지만.

 

위근우: 영화의 제목이 〈사랑의 고고학〉인만큼 관객의 입장에서도 고고학적 입장으로 접근을 해야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고고학이라는 분야가 딱 파서 나온 비석에 모든 정보가 다 적혀 있는 게 아니라, 유물을 이것저것 본 다음에 아마 그러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고 재구성 해야하는 학문이잖아요. 다른 인터뷰에서 감독님께서 인식과 영실의 관계가 소위 가해와 피해의 서사로 단순히 환원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씀 하셨는데, 저에게는 가해와 피해 서사로 읽혀졌거든요. 하지만 이건 말씀드렸다시피 제 개인적인 해석이고, 영화 자체는 항상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졌어요. 예를 들면 인식은 가해자이고 인식의 행동은 폭력이라는 것을 카메라의 관점이나 연기의 톤으로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데, 주인공들 스스로도 가해자나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고, 카메라의 시선 역시 판단을 계속해서 보류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상황을 보여주되 해석하지 않기 위한 카메라의 거리감이나 인물에 대한 접근 방식에 대해 여쭤보고 싶었어요.

 

이완민: 제가 GV에서 들었던 얘기인데, '자니?'라는 문자 있잖아요. 새벽 2시에 이성 친구 혹은 뭐 아는 사람한테 저런 문자가 오는 상황에서 그 의미에 대해 이제는 좀 친숙한 편이죠. 그런데 친숙해지기 이전, 그런 논의들이 있기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웠을 거예요. 이게 정말 나한테 호감을 표하는 것인지 혹은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을 수 있을 것 같고, 물론 작가님 말씀하셨던대로 이 사람이 지금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빨리 파악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런 것들이 이야기 되면 명확해지는 부분들이 있지만, 이야기 되기 이전에는 모호한 지점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폭력이 존재하지 않아 판단하기 더 어려운 상황에서, 특히나 그것이 내밀한 관계일 때에 대한 가시화가 필요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제 개인적인 판단을 개입시켜서 기승전결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그 상황에 존재하는 모호한 지점들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관찰자적으로 봤을 때 영실이 자신의 이전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순간에, 그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인식을 수단 삼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찬가지로 인식 또한 전 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스스로 극복한다기보다는 구원자를 찾고 그를 통해서 극복하려 했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래서 이 두 사람의 타이밍이 잘 맞아 떨어진 것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가 타이밍이 맞은 사람들끼리 불타오를 때의 파토스 상태를 사랑이라고 표현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게 정말 사랑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졌기도 해요. 물론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가 찾아봤던 많은 서적에서 착각이라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렇다면 어떤 것이 사랑인지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옥자연: '거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내면의 갈등을 겪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몇 년 전에 미투을 겪었고, 이러한 역사를 가진 채로 36살이 된 인간 옥자연은 시나리오를 볼 때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경유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을 대외적으로는 잠깐 묻어둬야 되거든요. 왜냐면 영실은 미투보다 조금 더 과거의 인물이기 때문에, 인식과의 관계 속에서 이 사람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부분에 집중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영실의 이야기의 어떤 지점들에서 제가 분노하는 부분이 있기도 해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서 제가 감정선이 어긋날 때 감독님이랑 많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방향을 잡아갔어요. 제가 영화를 찍으면서 상기하고 싶었던 것은 영실은 어떤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려고 한다는 특징이었던 것 같아요.

 

 

 

 

 

 

위근우: 인식은 자신의 불안정성을 가스라이팅의 형태로 투영하고 표출했지만, 본인은 분명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영실의 재능을 비하하고 착취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 때 인식의 마음은 어땠을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런 행동이 안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그냥 했을까요, 알면서 모르는 척 한걸까요?

 

기윤: 알면서도 모른 척 했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저도 자연 배우님이랑 마찬가지로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인식이라는 인물에게 거리감이 있었어요. 감정선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는데, 표현하는 방식이 제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았어요. 비슷한 감정들을 느꼈을 때 대처하는 방법이 다 다른데, 인식의 대처 방식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촬영 전에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을 했었던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감독님과 일대일 리딩까지 하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감독님과 인식 캐릭터를 잡아가기 전에 제가 생각하는 인식에 대해서 준비를 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인식과 감독님깨서 생각하시는 인식이 많이 달랐어요. 사랑을 시작할 때까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영실이 넌 나한테 트라우마를 줬어'부터 시작되는 집착이나 의심이 제 생각에는 이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부분이 많았어요. 하지만 대사는 쳐야 하니까 표정이나 대사 톤으로 상대방 기분이 최대한 안 나쁘게끔 해서 준비를 해갔거든요. 영화에서 인식은 굉장히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내뱉고, 표정과 대사의 톤이 똑같잖아요. 그런데 그런 대사를 내뱉으면 영실이 상처를 많이 받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좀 덜 상처가 될 것 같은 방향으로 준비를 했었는데, 감독님이랑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부분을 줄여 나갔던 것 같아요.

 

위근우: 영실이 상처받길 바라지 않는 것은 기윤 배우님이 착한 사람이라서 그런 건가요, 아니면 인식이 어쨌든 사랑을 하기 때문에 적어도 그 정도까지는 안 할 것이라는 본인의 해석이 있었던건가요?

 

기윤: 저의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연기를 하는 과정에서 감독님께서 그건 아니라고 말씀을 해주셨었고,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처음에는 이해가 잘 안되고 머릿속에 ’왜?‘라는 질문이 많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이해가 되고 공감이 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제가 스스로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었고, 감독님께서 도움이 될 만한 레퍼런스 영상들도 좀 보내주시기도 했어요.

 

위근우: 어떤 레퍼런스가 있었나요?

 

이완민: 동명의 프루스트 소설을 영화화한 샹탈 아커만의 〈갇힌 여인〉과 브레송의 〈온순한 여인〉이라는 영화를 가스라이팅과 관련된 레퍼런스로 사용했습니다.

 

 

 

 

 

 

위근우: 영화에서 서동요가 언급되잖아요. 저는 서동요와 인식의 행동을 함께 보면서 세상에 참신한 나쁜 놈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500년 동안 비슷한 행동이 반복되는 모습을 보면서 일종의 전염성이 느껴지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기윤 배우님을 딱 봤을 때에는 어딘가 선하면서도 금방 짜증을 낼 것 같은 느낌이잖아요.

 

옥자연: 영화를 보셔서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처음 기윤 배우님을 뵈었을 때 너무 놀랐거든요. 내가 생각한 날카로운 인상의 사람이 아닌 동글동글하고 말도 조용하게 하는 사람이 등장해서,

 

위근우: 딱 봐도 나는 가스라이팅 할 사람이다, 하는 배우가 올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거죠.

 

옥자연: 네, 맞아요. 그래서 기윤 배우님이 연기를 잘 하셔서 그렇게 보시는 게 아닐까 싶어요. (웃음)

 

기윤: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옥자연: 절 봤을 때요?

 

기윤:  저도 이제 옥자연 배우 캐스팅 됐다는 소식을 듣고 되게 의아했어요. 자연씨가 나오는 작품 두 개를 봤었는데, 둘 다 강한 역할이었거든요. 상상을 해도 대입이 안 되고, 오히려 제가 잡아 먹힐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위근우: 네가 가스가이팅을 하면 나는 주먹을 보여주마, 하는 느낌의?

 

기윤: (웃음) 네, 그럴 것 같은데 근데 첫날 작품과는 너무 다른, 굉장히 수수하고 청순한 느낌의 영실이 들어와서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옥자연: 되게 행운이라고 느끼는 게 감독님이 드라마를 거의 안 보셨어요. 그래서 캐스팅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완민: 아니에요. 저는 그 드라마들이 존재하기 전부터 자연 배우님을 알고 있었어요.

 

위근우: 말씀하신 것처럼 작품을 통해 선입견이 생기기도 하겠지만, 두 분의 이미지가 흔히 영실과 인식의 캐릭터를 두고 생각하는 이미지와 다르다고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감독님께서 배우 분들의 조금은 다른 느낌을 끌어내셨다고 느껴져요. 물론 감독님께서는 미켈란젤로처럼 돌 안에 이미 있는 이미지가 바로 보였다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웃음) 그래서 감독님 입장에서 캐스팅에 영향을 미친 이유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완민: 일단 제가 가지고 갔던 구도는 강한 영실이 여린 인식을 끝까지 지켜주고자 한다는 구도였어요. 그런 맥락에서 자연 배우님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 지구력이 있을 것 같은 강한 느낌을 받아서 생각했던 구도가 가능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기윤 배우님의 경우는 다른 작업들을 보면서 연인에 대한 모습이 따뜻하다라는 느낌이 들었고요. 그래서 전형적인 피해자와 가해자 구도를 벗어나는 데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요청을 드리게 됐습니다.

실제로 연습할 때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a 상태와 b 상태로 나눠서 왔다 갔다 하는 연습을 했었어요. 그래야 영실이 끝까지 떠나지 않는 것이 성립될 것 같았거든요. 너무 안 좋은 상태만 지속되면 인식을 진작 떠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식이 화를 내다가도 영실이 강하게 나오면 금방 기 죽는 듯한 모습은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졌어요.

 

 

 

영화 〈사랑의 고고학〉 스틸컷

 

 

 

위근우: 사실 저는 인식이 기가 죽는 모습을 보면서도 연민이 생기기보다는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관객 분들도 보시다가 당황스러운 장면이 몇 개 있으셨을텐데, 인식이 영실에게 트라우마라고 말하는 장면도 그랬고요. 저한테 가장 큰 물음표가 되었던 장면은 인식이 커트 코베인을 닮았다고 하는 장면이었어요. 요새 젊은 사람들이 커트 코베인을 모른다고 감독님 이렇게 막 하셔도 되나, 싶었고. (웃음) 그 순간 직감을 했어요. 저 캐릭터가 분명히 또 한 번 쓸 데 없는 말을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인물이 쓸 데 없는 말을 또 하는데, 그 때의 인식의 변화가 재미 있었어요. 처음에는 인식이 영실을 두고 자신에게 과분한 사람이라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영실을 추켜세움으로써 스스로가 ‘능력자’라는 걸 과시하고 싶었다고 느껴졌어요. 그런데 대화를 통해서 영실이 사실 자신만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 굉장히 분노를 한 것처럼 보였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애를 하는 것 같던 인식의 표정이 갑자기 굳으면서 영실에게 전화를 거는데, 그 순간의 인식의 감정을 연기하신 기윤 배우님의 해석이 궁금했습니다.

 

기윤: 인식이 영실을 녹음실로 데려와서 처음으로 스킨십을 하려는 장면이 있어요. 그런데 인식이 갑자기 예약이 있다고 가버리잖아요. 저는 이 장면에서 인식이 너무 이해가 안 됐어요. 그래서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인식은 자신이 여성을 지배하길 원하고 주도권을 잡고 스킨십을 하고 싶어하는 인물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영실이 주체적으로 스킨십을 원하는 모습을 보이자 인식이 스킨십을 멈춘거예요. 인식은 그런 인물이예요. 자신이 주도권을 잡아야 하고, 원하는 여성상이 뚜렷해요.

그리고 집에서 진행됐던 두번째 스킨십 장면에서 인식이 영실에게 어떤 걸 좋아하냐고 물으니까 영실이 해적선이라고 하거든요. 그랬더니 인식이 그게 뭐냐고 묻고는 콘돔을 가져와요. 저는 그 행동을 당연히 상대방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습관적으로 콘돔을 가져오는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촬영 하면서 감독님께 여쭤보니까 그게 아니라 인식이 성병이 옮을까 걱정되어서 가져온거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위근우: 인식이 건강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는 캐릭터거든요. 갈비뼈 금 가는 것도 신경 쓰고.

 

기윤: 자연 배우님이랑 둘 다 놀라서 인식을 두고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말한 기억이 있어요.

 

위근우: 알다가도 모르겠는 것은 인식에 대해서인가요, 아니면 인식을 쓰신 감독님에 대해서인가요?

 

기윤: 인식에 대해서요. 인식은 자기가 원하는 여성상이 명확한데, 다른 사람이 그것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니까 부끄럽고 창피한거죠. 그 장면을 통해서 인식은 타인의 시선을 많이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기도 했고요. 그래서 이후에 전화를 하는 장면도 비슷한 감정으로 이어갔던 것 같아요.

 

위근우: 그리고 인식의 추궁에 대해서 영실이 쿨해보이는 줄 알았다고 답변을 하잖아요. 그 대답이 영실이 상황을 회피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 정말 그 때의 영실은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겠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영화가 노골적으로 젠더적인 부분을 이야기 하지는 않지만, '쿨함'이라는 개념이 분명히 여성에 대한 이중 구속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쿨함'을 요구해서 그렇게 행동하면 다시금 왜 이렇게 헤프게 구냐는 이야기를 할 수 있잖아요. 직접적으로 피해와 가해의 구도나 가스라이팅에 관한 영화는 아니라고 하셨지만, 이런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쿨함'에 대한 이야기를 넣으셨을 때 감독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또 자연 배우님은 연기를 하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셨는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옥자연: 저는 그 장면이 너무 슬펐어요. 영실이 잘해보고 싶었다고 말하잖아요. 사람들이 영실에게 뻣뻣하다고 하니까 잘 해보고 싶어서 나답지 않은 시도를 한 건데, 그게 몇 년이 지나서 험담으로 돌아온거잖아요.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감독님께서 해주신 말씀인데,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것도 남성에게 붙을 때와 여성에게 붙을 때 사회에서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영실에게는 후회가 되고, 인식에게 사과해야 할 상황으로 가는 것이 개인적으로 많이 속상했습니다.

 

이완민: 앞서 말씀하신 트라우마와 관련해서 먼저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는 인식의 '넌 나에게 트라우마를 줬어'라는 대사를 굉장히 중요한 순간으로 잡았어요. 그 순간이 바로 영실이 오류를 갖게 되는 순간이예요. 아, 내가 이 사람에게 트라우마를 줬구나. 그러니까 내가 상처를 보듬어주어야겠다, 혹은 끝까지 책임져야겠다는 마음을 갖도록 한 오류요. 그리고 실제로 가스라이팅이 벌어지는 관계에서 책임 전가가 많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자료를 통해서 접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 장면을 인식이 책임 전가를 하고, 영실이 오류를 가지게 되는 순간으로 잡았습니다.

커트 코베인 관련해서는 기윤 배우님을 보고 쓴 대사는 아니에요. 아무래도 그 말을 하는 효은의 입장에서 그라면 얼평이나 몸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에 그런 대사를 넣게 되었어요. 음악하는 사람이니까 자기가 아는 잘 생긴 사람을 이야기한 것이고요.

그리고 쿨함의 이중 구속에 대해서는 실제로 저도 많은 혼란을 겪었어요. 예를 들면 연출부에서 일하고 있을 때 촬영 중에 스탭 분이 갑자기 제 손목을 잡으셨던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욕을 하면서 뿌리쳤었는데, 나중에 불러서 혼을 내더라고요. 그 일 때문에 영화 현장에서는 이런 일을 용인하고 쿨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대응하지 못하고 '쿨함'이 일종의 미덕인 것처럼 행동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엉뚱한 순간에 사과했던 그 때의 순간들이 지금에 와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되어서 영화 속에서나마 표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위근우: 저는 영화 중반까지는 끝을 볼 수 있을지 걱정을 하면서 봤어요. 제가 혈압이 높은 편이거든요. 영실과 인식의 관계가 분명히 이상한 관계잖아요. 주변 인물들도 어떤 관계냐고 궁금해하고, 심지어 영실도 궁금해하잖아요. 그런데 분명 저뿐만 아니라 많은 관객 분들이 가스라이팅을 하면서 여성을 착취하는 남성 대 착취 당한 여성의 구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오랜 시간 힘을 발휘해왔던 서사는 여성이 스스로 자기 팔자를 꼬았다는 서사인 것 같아요. 누군가는 이 영화를 싫다는 말을 못하는 여성이 스스로 팔자를 꼰 이야기처럼 느낄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하지만 이것을 분명히 피해갔어야 하고, 실제로 연출적인 부분이나 연기를 통해서 피해갔다고 느껴졌어요. 자연 배우님께서 영실의 든든함이라고 말씀을 해주셨는데, 영실의 그런 면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영실이 분명 인식과의 관계에서 폭력을 당했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지만, 비일관성을 인식하고 대처를 하는 모습이나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해나가는 단단함이 인식과의 관계 바깥의 세상과도 여전히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리하자면 영실이 거절을 못해서 하지 않은 게 아니라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감독님께서는 어떤 서사를 통해서 영실의 모습을 연출하고, 팔자를 꼬았다는 서사를 피해가려고 하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이완민: '피해자다움'을 요구할 때가 많은데, 저는 의식적으로 그것을 피하려고 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전형적인 구도에서 탈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되게 강했고요. 영실도 한 사람으로서 오류의 순간들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순간순간 생각하고 들여다보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담는 데 초점을 두었던 것 같아요.

 

위근우: 자연 배우님은 혹시 영실이 답답하진 않으셨는지, 그리고 거절을 잘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어떤 면 때문에 단단하다고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옥자연: 교수님과의 장면이 있잖아요. 교수님이 어떻게 보면 심한 간섭을 하지만, 인식에 대해서 영실이 꿰뚫어보지 못한 부분을 이야기 해주잖아요.그 때까지도 영실이 왜 이렇게 당하고만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상처를 누군가에 준다는 것 자체를 할 수 없는 사람의 기사도로 끈을 잡았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기준이 남한테 상처를 안 주는 것 자체가 되어버릴 때가 있기도 하잖아요, 저도 그렇고요. 어떤 판단을 하거나 결정을 할 때 우선순위가 상황이나 사람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때로는 그 기준이 ‘무엇을 안하기’에 매몰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영실은 좀 컸던 것 같아요. 내가 조금이라도 어떻게 했을 때 인식이 다쳤다고 난리가 나니까 영실은 점점 아무것도 못하게 되고, 인식이 내가 뭐라고만 하면 쓰러져 버릴 사람 같아지는 거죠. 처음에는 영실의 이런 상태가 너무 오랜 시간 지속되는 게 아닌가 생각을 했지만,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지켜본다는 점에서 배우로서 흥미롭기도 했어요.

 

위근우: 인식은 영실의 미덕일 수도 있는 부분을 취약함으로 공략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인식은 그것이 영실의 미덕이자 취약함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그랬다고 생각하시나요?

 

기윤: 인식은 알고서 그랬을 것 같아요. 연기 다 끝내고 홍보 준비를 하면서도 솔직히 인식보다 영실을 더 이해를 못 했거든요. 제가 영실의 입장인 경우도 연애하면서 있었는데, 어느 정도까지는 참는다 하더라도 보통 상대방이 나한테 함부로 대하면 나도 복수를 하고 싶어지잖아요. 그런데 영실은 끝까지 참고 견디는데, 그게 잘 이해가 안 됐어요. 그래서 영실의 대처 방식이 좀 달랐다면 인식도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직접적으로 인식에게 비난을 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요. 물론 영실이 인식을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은 아니고, 가능성에 대한 생각이에요. 인식이 어떤 행동을 하든 영실은 잘 받아주니까, 인식이 개선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해요. 제가 인식을 연기할 때 유약함과 미성숙이란 단어를 계속 떠올리면서 연기를 하려고 했어서 그런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완민: 덧붙이자면 저는 이상적인 인물을 그리는 데는 크게 관심이 없었어요. 그저 문제적인 인물을 그리고 싶었고, 그런 면에서 영실과 인식 모두 문제적이라고 생각 했어요. 영실의 경우에는 원칙주의자로써 그냥 끝까지 밀어붙이고 싶었던 게 있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답답하다고 느끼시는 건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결코 영화는 그런 영실을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고요.

 

위근우: 그런데 저는 인식은 싫어도 영실이 싫지는 않았습니다. 둘 다 문제라고 생각 하진 않았습니다. (웃음)

 

이완민: 그래서 영실이 스스로를 바꾸고 싶다고 했던 장면을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강조시켰던 것 같아요.

 

위근우: 어떤 오해인가요?

 

이완민: 마치 영화가 영실과 같은 캐릭터를 응원하거나 혹은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위근우: 이런 사람이 있다는 걸 그저 보여주고 싶으셨던건가요?

 

이완민: 극단적으로 원칙주의자일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탐색해보고 싶었다는 측면이 더 강했습니다.

 

옥자연: 저도 감독님이랑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서 그런지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인식의 행동이 어느정도 영실의 탓이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잖아요. 그것이 어느정도 사실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지 않으려는 마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윤: 저도 영화를 네 번 정도 봤는데 볼 때마다 느낌이 달랐어요. 두 번째까지는 저도 비슷했어요. 영실이 싫진 않아도 인식은 싫었거든요. 그런데 몇 번 보다 보니까 인식에게도 연민이 가더라고요. 본인도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볼 때마다 생각이 계속 달라졌고, 지금은 인식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어요.

 

위근우: 연민을 가지게 된 건 인식의 유약함 때문일까요?

 

기윤: 아니요. 저도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대외적인 이미지를 신경을 쓰는 편이예요. 인식은 저보다 더 그런 것 같고요. 저의 이런 모습에 대한 극단을 보여주는 느낌? 그래도 영실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되돌아보잖아요. 그러면서 본인이 원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하는데 반대로 인식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쓰럽게 느껴졌어요. 영화의 마지막에 인식이 더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영실보다 성장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아 안쓰럽기도 했고요.

 

 

 

 

 

 

위근우: 영실은 매우 이상한 8년을 보냈지만서도 그 속에서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어요. 작게는 걸음걸이를 교정하려고 한다든지, 인식이 쓸 데 없는 짓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잡지를 만들려는 욕구를 버리지 않는다든지 하는 모습을 통해서요. 말하자면 영실은 분명히 폭력에 노출되었고 스스로 거절하지 못했지만, 그런 일에 크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조금씩 찾아간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식상할 수 있지만, 8년의 시간 안에서 영실이 무언가를 배우고 나은 삶이 됐을거라고 생각하시는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완민: 저는 분명히 변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스스로도 변화하고자 한다고 얘기했고, 실제로 서사 속에서도 느리지만 발전하고 있는 일련의 과정들이 있었기 때문에 변화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옥자연: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학생들을 대면하는 영실과 마지막에 '할 얘기가 있어요'라고 말 할 때의 영실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영실이 썼던 시를 인식이 빼앗아갔는데, 그 이후에 영실이가 노래를 만들어보려는 시도를 하는 부분이었어요. 그 장면이 참 좋았습니다.

 

위근우: 저는 그 장면이 없었다면 홧병이 나서 지금 이렇게 웃는 얼굴로 앉아있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웃음)

 

옥자연: 나쁘거나 힘든 연애라도 두 사람의 세계가 만나서 확장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영실에게도 똑같이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관객: 개인적으로 인식이라는 인물에게 매력을 느낄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고고학이라는 분야에 뚝심을 가지고 일하는 영실이 왜 사람에 있어서는 매력 없는 남자에게 끌려다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인식이라는 인물을 조금 더 매력있게 만드실 생각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완민: 그 부분에 대한 힌트는 두 장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영실이 전 애인에게 나가달라고 하지만 실패하잖아요.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저는 인식이 영실에게 하나의 수단이었던 것 같아요. 인식이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인물이어서 영실이 그를 좋아했다기보다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끝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끌어왔다는 생각을 살짝 해봤습니다. 다른 장면은 비슷한 고민 선상에서 넣은 장면이에요. 인식이 핸드폰을 들고 영실에게 까치소리를 들려주잖아요. 그런 장면을 통해서 인식의 낭만적인 면이나 영실과 소통할 수 있는 지점을 넣었던 것 같습니다.

 

기윤: 현장에서 영실과 인식과의 좋았던 시절이 좀 더 그려졌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관객: 영실이는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인가요?

 

옥자연: 감독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실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그런 것 같아요. 매번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금사빠인 순간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위근우: 인식과 우도에 있어서도 그렇다고 볼 수 있을까요.

 

옥자연: 네, 우도 같은 경우도 후광이 보였다는 표현을 하거든요. 다만 다가가는 데 2년 이상이 걸리긴 하지만 어떤 순간에 딱 반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저도 약간 그런 스타일이어서 안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거든요.

 

이완민: 저는 영실이 환상을 쫓아다니는 건 그만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었고, 그래서 인식이든 우도든 저는 전부 환상이었다고 생각을 해요. 마지막에 영화를 그렇게 끝낸 것도 영실이 이제 혼자 좀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위근우: 영실이 금사빠라고 해서 관객들에게 사랑 찬가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이 영화가 연애를 권장하는 영화는 아니잖아요.

 

이완민: 촬영하면서 그런 쪽으로 생각이 가서 그렇게 끝냈던거죠. 영실은 금사빠였고, 환상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아요. 소위 백마 탄 왕자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가, 여러가지 일을 겪으면서 내 안의 안정감을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거죠.

 

 

 

 

 

 

관객: 영실이 답사를 간 마을에서 이장님의 집이 불 타서 자료가 모두 손실되었다는 설정은 감독님의 의도가 개입된 것이었나요?

 

이완민: 우리가 연애 서사를 중심으로 이야기 했지만, 영화 속에는 다른 많은 것이 들어 있잖아요. 저는 촬영을 하며 만난 뜻밖의 풍경들이 모두 유의미하게 느껴져서 그런 것들 또한 담아내고 싶었어요. 영화가 이런 면에서 시대에 대한 일종의 아카이브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마침 촬영 장소가 산불이 났던 산이었어요. 그런데 그 모습이 굉장히 그로테스크하고 아프게 느껴졌고, 이장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이장님의 말 속에서도 아픔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 감정을 담고 싶었습니다. 원래는 더 긴 장면이었는데, 편집 감독님께서 선을 그으셔서 이 정도로 마무리 된 장면입니다.

 

위근우: 180분이 될 수도 있었겠네요.

 

이완민: 300분 버전도 있었어요. 저는 러닝 타임이 크게 중요하다 생각하진 않습니다.

 

옥자연: 그레타 툰베리가 나오는 장면도 많이들 궁금해하시더라고요. 마침 어제 만난 지인 분께서 그레타 툰베리는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감독님께서는 '어떻게 감히(How dare you?)'라는 문장에 굉장히 꽂히셨었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정의롭지 않는 것에 대해 정면으로 항의하는 사람을 봤을 때 전율을 느끼셨다고 전해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지인 분께서 그 장면이 너무 좋았다고 하시면서 두 개인간의 가스라이팅도 있지만 정부나 사회의 대중에 대한 가스라이팅 역시 그 장면을 통해 짚어주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스쳐지나가는 컷이지만 한 인물의 주변 환경을 보여주는 장면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객: 영실이 집에서 장어탕을 먹는 장면에서 병원 침대를 배치하신 의도가 있으실까요? 또한 영실이 장어탕을 먹는 걸 보면 식은 것 같은데, 어머니가 장어탕을 굳이 새벽에 주시는 데는 의미가 있는건가요?

 

이완민: 그 한 장면만 봐도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많은 모호함에 노출된다는 생각이 드실거예요.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생각될수도 있지만, 개인과 개인 사이의 선을 넘는 폭력적 혹은 억압적 상황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정신적 불안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또는 가까운 관계에서 누군가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처럼 느껴질수도 있을 것 같고요. 이렇게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넣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료 조사를 할 때에도 실제로 부모님과의 관계가 위계적이거나 억압적일 때 가스라이팅 상황을 허용하는 범위가 더 넓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차원에서도 부모님 장면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넣게 되었습니다.

 

 

영화 〈사랑의 고고학〉 스틸컷

 

 

 

위근우: 이제 관객 질문은 여기까지 받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와주신 관객 분들께 한 마디씩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윤: 오늘 와주셔서 너무 감사 드립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옥자연: 되게 천천히 진행되는 영화를 같이 봐주셔서 감사해요. 그동안 많은 생각이 드셨을 것 같아요. 제가 이 영화를 다 찍고 보고 나서 생각했던 것은 의외로 나를 돌아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거예요. 고통스러운 것은 생각하기 싫으니까요. 영화 속에서는 그런 것들이 아주 고통스럽지만은 않고 재치 있게 표현 되잖아요. 비슷한 방식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셨으면 참 좋았겠다 싶습니다.

 

이완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라고 포스터에 쓰여 있는데, 그런 식의 살펴보기는 개인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에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같은 상황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이 세월호 참사 9주기이고, 반 년 전에 이태원 참사도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 보는 작업들이 〈사랑의 고고학〉 말고도 많습니다. 동시대의 여러 작품들을 많이 봐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위근우: 어떤 영화를 이해하는 데는 영화 정보를 많이 보는 게 도움이 되는 영화가 있고, 어떤 영화는 여러 번 보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저는 〈사랑의 고고학〉이 후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관객 분들 두 번, 세 번 많이 봐주시길 바라고요, 오늘 진행을 맡았던 위근우라고 합니다. 오늘 모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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