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백히 유유(愉愉)하기
〈흐르다〉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3. 4. 15(토) 오후 1시 상영 후
참석 김현정 감독
진행 정성일 평론가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해수 님의 기록입니다.
나는 대개 낙관을 허밍 하며 사는 편이다. 막막해도 완결을 믿으려 한다. 문득, 산다와 살아낸다는 약간 상이하다고 느꼈다. 허밍을 뗄 의지가 차마 발휘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 시기에 듣는 후자의 말은 꼭 독려하는 구령이 들리는 것만 같다. 살아내자와 이 영화 제목의 종결만 바꾼 흐르자는 상통하는 면이 있다. 흐르자. 희망이 온통 연체된 듯해도 사실 이 대여는 횟수로 막힐 일은 없어. 괜히 속닥이고 싶은 마음도 든다. 이 일련은 인디토크에서 감독님이 〈흐르다〉를 “명백한 해피엔딩”으로 밀봉해 주셔서 비롯되었다. 급류와 같은 방해가 일어도 우리는 흘러낼 수 있을 거예요.
정성일 평론가(이하 정성일): 김현정 감독의 첫 번째 장편 〈흐르다〉를 감독과의 이야기로 진행할 정성일입니다. 〈흐르다〉를 본 다음 제 동료들이 쓴 비평을 읽었습니다. 비평에는 옳고 그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 동료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합니다. 다만, 대부분이 〈흐르다〉를 딸과 아버지의 이야기로 한정해서 풀어내고 있었습니다. 김현정 감독께 질문하는 쪽도 대부분 그랬습니다.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영화 〈흐르다〉가 가진 특별한 점은 대구 가족에 관한 민족지학적 관찰의 느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앞부분에 어머니의 교통사고 사망이라는 커다란 사건이 있긴 하지만, 거의 기복 없이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갑니다. 영화는 일정하게 진영의 가족을 쳐다보는 것처럼 진행됩니다. 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머니의 부재가 발생합니다. 영화의 1/4이 넘으며 어머니가 사라집니다. 가까스로 균형을 이루고 있던 이 가족에서 부재가 생깁니다. 그 중심엔 진영과 아버지가 있습니다. 진영은 할 수 없이, 하지만 자발적으로 부재하는 어머니의 자리에 갑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장면을 보게 되죠. 진영은 우성 산업에 가서 미수금 이야기를 하고, 새로운 공장장이 된 호진과 언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캐나다 워킹 홀리데이를 포기한 것도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떠나는 준비를 멈추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 〈흐르다〉가 훌륭한 점은 이 두 개의 힘. 아버지와 딸의 관계, 집과 세계의 관계. 떠나려는 힘과 집으로 잡아 당기는 힘. 구심력과 원심력 사이에서 관계의 원근법 사이에 있는 긴장으로 영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시키려는 패기만만한 김현정 감독의 노력은, 감정을 애매하고 희미하고 불확실하게 만듭니다. 때론 영화를 보는 우리를 일정한 거리의 바깥에 머물도록 둔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시나리오엔 있었지만 영화에선 사라진 한 씬을 환기시킨 다음 감독과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이는 진영이 세무사를 두 번째 만나는 씬입니다. 거기서 진영은 취업 패키지를 결제하기 위해서 법인 카드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알고 있었는데도 말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영화엔 없습니다. 이 차이를 여러분들이 한 번 곱씹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본 종종 희미하고 불확실한 진영의 감정이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김현정 감독께 질문을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김현정 감독을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박수로 맞아 주십시오.
김현정 감독(이하 김현정): 안녕하세요. 〈흐르다〉 연출한 김현정입니다. 감사합니다.
정성일: 아무래도 저는 이렇게 질문을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김현정 감독께 대구란 어떤 도시인가요. 좀 더 밀고 들어가서 질문드리고 싶어져요. 대구에서 아버지란 어떤 존재이며, 그 아버지와 살아야 하는 딸은 어떤 존재인지요. 도시들이 갖고 있는 역사의 과정에서 결정된 것이기에 한편으로는 보존할만한 가치가 또 있지 않을까, 라는 쪽입니다. 말하자면 긍정의 질문입니다.
김현정: 우선 많이 바뀌긴 했지만 제게 대구는 블루 칼라가 많은, 노동의 도시로 각인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에서 공장이 중요하게 작용을 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어떤 의미인가 궁금해서 영화를 만들게 됐는데요. 생각해보면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인 것 같아요. 너무 투박하게 말씀드리는 것 같은데. (웃음) 아버지는 결핍에 콤플렉스가 강하게 자리 잡혀서, 드라마틱한 성취를 해야 한다는 가치관이 박힌 인물이에요. 진영에게도 그 가치관이 뼛속 깊이 박혀 있어요. 이를 포함해 벗어나기 힘든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정성일: 〈흐르다〉를 보면서 이 영화가 시작된 시나리오가 궁금했습니다. 순식간에 쓴 것 같기도 하고, 오래 고쳐서 결론에 도달한 시나리오처럼도 보여요. 이 시나리오는 어디서 시작되었는지요. 이걸 쓰는 과정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김현정: 제가 당시에 첫 장편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동기가 잘 안 생겨서 대구에서 시나리오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제 주위엔 장편을 만드는 분들이 없었어요. 단편 시나리오 수업에서 장편까지 쓸 생각이 있는 분들을 모아 스터디를 구성했어요. 이게 저한테는 출발 지점이었어요. 언젠가는 부녀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정확하게 봐주신 게, 처음에 쭉쭉 써나가진 못했어요. 아버지와 관련된 에피소드나 파편화되어 있는 저의 기억을 수집하듯 썼고요. 어느 정도 부피가 되었을 때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럼에도 속도가 안 붙던 이유가, 이 부녀 관계는 중요한 모티브로 소통이 없다 보니 둘을 붙여놓을 사건이 발생하질 않는 거예요. 고민을 하다가 어머니의 죽음을 넣고, 남은 둘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다는 가설이 세워진 다음에서야 글이 진행되었어요. 저는 어머니의 죽음을 상상만 해도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글은 수월하게 써졌는데 감정에 북받쳐서 많이 지체됐어요. 이후에는 부녀가 직접적인 부딪힘이 없어서, 진영이 공장에서 어머니의 빈 자리를 채워나가는 형식으로 써야 했어요. 그런 디테일을 고민하고 채운 이후는 수월하게 진행이 된 것 같아요. 이렇듯 진행이 되다가 멈췄다가 하며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엔딩이었던 것 같아요. 구치소 장면을 써도 될까, 만으로도 고민을 오래 했었거든요. 어머니 죽음도 있어서 너무 드라마틱한 설정은 아닌가 하고요. 완성하고 보니 그런 상황을 만들어야만 대화가 되는 가족이더라고요. 이전에는 단편만 해왔는데, 단편에도 사건이 있긴 하지만 현실로 생각하면 〈흐르다〉는 드라마틱한 사건들이잖아요.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가 구치소까지 가는 상황들, 딸이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게 되는 지점이요. 이걸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정성일: 김현정 감독께서 좋아하는 영화나 영향 받은 영화, 혹은 〈흐르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이 감독을 목표로 해서 나가보고 싶어, 했던 명단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그러면 〈흐르다〉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김현정: 처음엔 레퍼런스를 열심히 찾았는데, 딱 들어맞는 이야기는 찾지 못했고요. 한참 쓸 당시 〈토니 에드만〉이란 영화가 개봉했어요. 거기도 이 영화와 비슷하게 부녀 관계를 다뤄요. 여자 주인공이 얽매인 채 억눌러져 있는데, 그걸 치고 나가는 도발적인 모습이 영감이 많이 된 것 같아요. 그 영화만큼 과감하진 못했던 것 같고요. 소재에 관한 건 아닌데 영화의 결이나 이런 건, 요즘 생각해보면 에릭 로메르 감독님의 톤이라고 해야 될까요. 그분의 책 부제가 “아마추어리즘”인데, 이 단어에 요새 꽂혔어요. 그런 점들을 지향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것 같아요. 영화의 제목에서 감을 잡으셨겠지만 나루세 미키오 감독님도 굉장히 좋아해요. 일상의 이야기를 다루시는 걸 굉장히 존경하고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정성일: 영화 전체에 관한 질문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호준이 아버지를 부추겨서 기계를 사게 만든 일로 진영과 언쟁을 벌이는 장면을 제외하면, 카메라를 세워놓고 진행합니다. 물론 미세하게 움직이는 순간은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그렇게 촬영하면, 롱테이크로 진행하는데 이 영화는 아닙니다. 계속 장면을 나눠 나갑니다. 저는 김현정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보기에, 감독의 스타일인지 아니면 〈흐르다〉는 이 방법으로 진행해야만 전달되는 게 있다고 판단한 건지 판단하기 힘들었습니다. 분명한 건 ‘어떻게’의 문제죠. 관객에게 영화를 어떻게 느끼게 할 것인가라는 목표가 있으셨기에 이 방법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진행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김현정: 저는 질문을 들으면서 정직이란 단어가 생각이 났어요. 그걸 크게 의식하고 영화를 만든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영화를 공부하면 숏을 나누는 기본적인 이론을 익히잖아요. 마스터를 찍고, 이야기가 진행될 때 인물을 따서 들어가는 방식이요. 영화를 전공하지 않아서, 제도권에서 방식을 배운 이후부터는 거의 그대로 활용한 것 같아요. 시나리오를 연출화 시킬 때 정직하게 담아내는 방식을 그동안 선호해왔던 것 같습니다. 대사나 강조해야 할 부분에서 인물이 넘어가는 식으로요.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제겐 정직한 방식으로 담아내고자 구성을 했습니다.
정성일: 저는 이 영화의 언어에 정치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언어가 갖고 오는 효과는 영화의 방법 중 하나일 텐데, 이 구사에 대한 설명이 듣고 싶습니다.
김현정: 서두에 제가 대구를 노동의 도시로 인식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진영 가족의 대화는 에둘러 표현하기도 하나, 적나라하게 표현되는 지점이 있어요. 사투리여서 뉘앙스가 더 묻어나고, 의뭉스러운 느낌이 직접적인 대사지만 묻어난다고 생각했어요. 사투리로 영화를 만드는 걸 좋아하는 편이에요. 텍스트에서 그대로 전달되는 내용도 있지만, 그걸 둘러싼 다른 의미가 덧붙여진다고 사투리를 인식하고 있거든요. 실제로 제가 다른 작업을 할 때 표준어로 고쳤다가 되돌아간 경험도 있었어요. 그런 일이 많아서 영화를 만들며 사투리를 선호한 것 같습니다.
정성일: 여러분들도 공감하시겠지만, 진영을 연기한 이설 배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배우들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더 하고 싶어 합니다. 장면마다 다르겠지만, 〈흐르다〉에서 이설 배우는 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 연출자와 배우 사이에서 긴 이야기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촬영 전에 이설 배우에게 요구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김현정: 감정이 제 기준에서 과하게 표현되면 억눌러 달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 것 같아요. 그리고 현장에 갔는데 너무 뛰어나게 하시는 거예요. 어느 인터뷰에서 제가 동물적인 감각이 있는 것 같다고도 말했어요. 시나리오의 이해도가 굉장히 높은 배우라고 인식했습니다. 몇몇 씬에서 디테일한 감정을 드러내는 정도의 차이는 의견을 계속 맞춰 갔어요. 가장 의견이 기분 좋게 갈렸던 건 엔딩 장면이에요. 2층 침대에서 진영이 아버지 사진을 보며 미소 짓는 정도를 오래 촬영했어요. 이설 배우는 누적된 것들을 이젠 벗어났기 때문에 더 환하게 웃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저는 이 영화는 이후의 삶도 있기 때문에 완전히 해피 엔딩은 아니란 이야기를 드린 기억이 납니다.
정성일: 진영이 코 수술을 한 상태로 영화가 시작합니다. 얼굴에 부목대를 했죠. 곧 성형외과에 가서 부목대를 제거합니다. 영화는 진영이 수술했다는 자체를 잊어버린 것처럼 진행합니다. 한참 보는 동안 저는 그 사실을 잊어버렸어요. 그러다 아버지가 바이어들과 술을 마시며 자신의 코가 휘게 된 경위를 설명합니다. 둘은 이유가 다르지만 코의 (장면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 게 좋을까요?
김현정: 진영은 취업을 위한 성형을 한 거예요. 일이 풀리지 않으니 원인을 고민하면서, 코를 성형하면 원활하게 풀리지 않을까, 생각했을 거예요. 아버지도 코 때문에 일이 어그러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어요. 문제의 본질은 다른 곳에 있는데, 본인만 꽂힌 콤플렉스나 강박의 면을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아주 일치하진 않지만 묘하게 이 부녀가 닮은 모습 중에 하나로도 작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진영이가 과거의 굴레에 얽매였던 시점을, 이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나마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단계부터 시작해요.
정성일: 〈흐르다〉의 첫 장면을 어떻게 시작하실지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 결과가 효과가 있었던 건 “음?” 이러면서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영화는 진영이 샤워를 마치고 김이 서린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말리며 시작합니다. 이때 진영이 보이는 거울을 찍고 있습니다. 이제는 반사된 진영의 모습을 계속 보는 셈일 텐데요. 거울에 물방울이 흘러내립니다. 흘러내리다. 흐르다. 마치 영화 제목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거울이 얼룩덜룩해지니 진영의 이미지도 휜 상태가 되는데, 이 이미지가 진영의 내면 상태로 보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이후의 삼십 분과 바꿀 만하다고 작법서에 쓰여있기도 하죠. 여기서 시작했을 때 관객에게 알려주고 싶었을 연출 의도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김현정: 단순하게 영화가 좀 진행되어야 부녀 이야기임을 알 수 있으니 서두에 조금은 설명해주고, 암시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젖은 화장실에서 밖으로 나갈 때, 아버지가 있으면 편하게 가지 못하고 옷을 꾸역꾸역 입어야 하잖아요. 그 상황 자체가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할지 설명해주는 장면이 될 것 같아서 넣었어요. 말씀해주신 부분은 부수적인 효과였던 것 같아요. 시놉을 쓸 때는 불편한 옷을 젖은 화장실에서 입는다, 여기까지만 생각했어요. 실제 촬영하는 과정에서 김이 서려 있는 진영의 얼굴, 코에 뭐가 있는 것 같은 희미한 이미지가 본인이 인식하는 현재 상태를 설명해줄 수 있겠다 싶었어요. 다음 장면도 나름의 트릭을 쓴 건데 아마 거의 눈치 못 채실 거예요. 보통 POV는 인물이 안 들어오잖아요. 진영이 POV처럼 보였다가 쑥, 지나가는 장면이 있거든요. 위치가 아직 명확하지 않은 이 집에서, 본인이 인식하는 자신이라던가 위치를 초반에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정성일: 영화 〈흐르다〉는 한글 제목과 영어 제목이 다릅니다. 영어 제목은 〈On the Sand House〉, ‘모래 집에서’로 번역할 수 있을 텐데요. 모래 집처럼 이 집이 부서지기 쉽다는 건지 메마른 건지, 이 영화는 양쪽이 다 포함될 수 있지만요. 그래도 제목을 다르게 지은 것과 〈On the Sand House〉 뉘앙스에 대해 설명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현정: 이 가정 안에서는 가정 내지는 가족의 의미는 이미 없어졌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모래 집에서 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현재 이 집의 위태로운 상황들, 가정에서의 모습들을 설명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정성일: 제목으로서 어느 쪽이 영화에 더 가까울까요?
김현정: 영화를 보시고 마음이 텁텁해지실 걸 생각하면 (웃음) 영어 제목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드네요.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묶어낼 서사가 또렷하지 않다는 생각을 좀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글 제목을 짓는 데에 애를 먹었습니다. 서사의 방향성을 꽉, 묶어주는 영화는 아니어서 ‘흐르다’라는 중의적인 단어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네요. 영제는 Flowing, Flow 이런 단어를 쓰다가 고친 경우인데요. 이 영화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해보고 정했어요. 영화를 항상 만들고 나서 주제를 떠올리는 편이어서요. 그제서야 이 가정은 부서진 상태이고 거기서 존재하는 거 자체가 불가능하나, 어쨌든 살아가려는 인물들의 모습이 이 영화에서 말하려는 가정인 것 같아서 영제를 바꿨어요.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해준다고 생각해요.
정성일: 진영은 캐나다 워킹 홀리데이를 떠납니다. 영화가 시작한 지점에서는 캐나다를 가고 싶던 것도 아니고, 워킹 홀리데이를 목표로 삼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작별 인사를 나누다가 갑자기 결정해버립니다. 영화는 진영이 시간에서 흘러가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흘러감의 순간에 분명 단절이 있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 결심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 했다면 더 쉽게 이해했을 텐데요. 이건 어머니가 계실 때 한 결심입니다. 단지 경험을 쌓기 위해서라고 말하기엔 잘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 심리적인 변화의 곡선을 영화에서 어떻게 쫓아가야 할까요?
김현정: 이 영화를 되게 비약적으로 말씀드리면, 캐나다를 가기로 한 여성이 캐나다를 간 이야기라 할 수 있어요. 처음의 캐나다와 이후의 캐나다는, 같은 장소이지만 너무 다르게 해석이 돼요. 그래서 완전히 다른 결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우선 진영이 초반에 캐나다를 가겠다고 결정한 건 느끼셨겠지만 일종의 도피성 측면이 강해요. 진영은 과거에 만족스러운 성취를 해내지 못했기에 반대급부적으로 외국계 회사를 가겠다고, 더 나아가서 캐나다 워홀을 가야겠다고 드라마틱한 선택지만을 생각하는 인물로 초반엔 그려지는데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오기이기도 해요. 계속 가야 한다는 액션을 취하면서 왜 캐나다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정리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본적으로 취업이 문제가 아니라 얽매여 있던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게 가장 필요하고, 나의 목숨과 바꿀만한 중요한 일로 인식했을 거예요. 인식하는 본인이 일련의 과정에서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기에, 저는 나름의 해피 엔딩이라고 생각하고 이 영화를 썼습니다.
정성일: 〈흐르다〉를 보면서 영화가 암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으셨을 겁니다. 발에 상처를 입는 건 신화에서도, 꿈에서도 항상 암시였습니다. 문득 떠오른 일차적인 해석은 떠나려는 걸 붙잡으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긴 페이드가 나오고 첫 장면이 반창고를 떼는 장면입니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와 연결해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발에 상처를 내서 어떤 효과가 일어나길 기대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김현정: 서사의 중요한 축으로서 영화의 영제처럼, 부모가 이뤄놓은 불안정한 가정의 묘사를 꼭 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부모님들이 크게 다투시는 게 자식들에겐 큰 상처가 돼요. 그것도 진영이 주춤하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부모의 다툼과 폭력이 진영에게 오래 누적되었고 내재되어 있다는 게, 제게 중요한 설정이었어요. 싸움으로 인해 진영이 간접적으로 다치게 된 것도 이날만 일시적인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겪은 가정이란 설정으로 넣고 싶었습니다.
정성일: 〈흐르다〉는 감정적 흐름이 종종 너무 고요하거나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상관없다는 자세로 이 영화는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뚜벅뚜벅이란 표현을 쓴 것인데, 감독께서는 보는 쪽이 어디까지 들어오면 충분하다고 여기면서 영화를 찍었습니까? 내가 관객을 어디까지 믿어야 될 것인가. 이를테면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감독은 관객이 본인 수준이라 생각하며 영화를 찍습니다. 영화가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 “제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에 잘 못 들어오신 분 같아요.”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어떤 감독은 설명적이어도 내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은 다 이해시켜야 해, 라고 해요. 그건 연출자의 선택입니다. 관객과의 만남에 대한 선택인 셈인데요. 저는 (스터디 장면을 보면서) 김현정 감독은 관객이 어디까지 들어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설정하고 계신지 궁금해졌습니다.
김현정: 영화 만들 때 제일 고민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저는 균형을 많이 생각하는 축인 것 같습니다. 이 영화 서사가 어렵지는 않잖아요. 내용적 측면에서 충분히 따라오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분명히 연출할 때는 제가 생각하는 감정이 있었거든요. 대부분 무력하고 우울감이 있긴 하지만, 조금은 기쁘고 슬픈. 아주 미세한 정도의 저만의 정답지는 있긴 했는데요. 그것을 곧이곧대로 알려드리면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조금은 불친절하고 의뭉스럽게 표현된 것 같은데요. 늘 고민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상황마다 복합적인 감정들이 있는데, 그걸 어느 정도의 수위로 표현해야 될지요. 보통 혼자 결정하진 않고 스태프들과 의견을 교류하는 편인데요. 균형을 생각한다고 말씀드리는 게 지금으로선 제일 적합할 것 같아요. 워낙 주된 감정 자체가, 그리고 진영 자체가 감정을 막 요동치게 겪는 인물이 아니어서 아마 계속 의아하셨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성일: 같은 질문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께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서사는 모든 사람들이 쫓아오지 못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 감정은 모두 느껴보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건 김현정 감독이 이야기한 것처럼 선택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진영과 나눴을 대사가 무엇일지 고심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진영이 자고 있을 때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와서 차 키를 달라고 합니다. 진영이 어머니에게 질문합니다. “엄마, 나 캐나다 가도 되나?” 하지만 진영은 어머니로부터 허락의 대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나중에”라며 떠났고, 허락을 받지 못한 상태로 캐나다로 갑니다. 저는 이 허락 받지 못한 질문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머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영의 마음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많은 의도가 담겼을 것 같은데, 첨언을 듣고 싶습니다.
김현정: 진영은 호주 워홀에 선정됐지만 가지 않은 전사가 있는데요. 그만큼 가족이 걸리는 인물이지만, 더는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해서 어렵게 그 결심을 하게 돼요. 그걸 어머니께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말하는 게 아니라 약간 잠에 취하듯이 하는데요. 저는 일종의 용기를 낸 거라고 생각했어요. 의도하진 않았는데 어머니의 “나중에”라는 온전치 못한 대답이 영화의 끝까지 신경 쓰이겠구나, 생각하게 됐네요. 영화는 진영의 부채감이 계속 따라오는 내용이다 보니 그런 게 작용이 되면 좋겠다고, 말씀을 들으면서 새롭게 (웃음) 생각하게 되었어요. 대사를 그 타이밍에 넣은 이유는 딱 그거였어요. 진영은 이제 진짜 해볼 마음을 먹었는데 말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완전히) 깨어있을 때가 아닌, 그런 시간이었기에 낼 수 있었던 거죠. 그조차도 온전한 대답을 듣지 못해서 내리 고민하는 영화인 거고요. 말씀해주셔서 다시 깨닫게 됐습니다.
정성일: 제가 질문을 더 드리고 여러분들의 질문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37분 조금 지난 지점, 여기서부터 〈흐르다〉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나뉩니다. 영화는 장례식을 찍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서 이 가족의 슬픔을 거의 표현하지 않습니다. 다만 깊은 페이드를 사용했습니다. 이때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어머니에 대한 애도를 인물들이 하는 게 아니라 영화가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화에서 더 깊게 확인한 건, 진영이 언니인 소영 그리고 소영의 아이들과 함께 어머니의 묘를 방문한 장면이었습니다. 언니는 묘에서 절을 하는데, 진영은 하지 않습니다. 문득, 어머니와 진영이 갖는 애틋함 사이에서 제가 계산하지 못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페이드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김현정: 그럼에도 이 영화의 정체성은 부녀 이야기라고 생각을 했고요. 40분이나 전체 가족의 관계성을 설명하며 할애했기 때문에, 조금 더 빨리 본론으로 가야 되는 일종의 미션이 있었어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고민을 당연히 했지만, 관객분들이 뒷이야기에 어서 진입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생략을 해야겠다고 시나리오에서부터 결정을 했어요. 긴 블랙을 넣어서 마치 영사 사고 같이 만들고, 감각을 “어, 뭐지”라는 인식이 되게끔 죽음의 최소한 각인만 시켜드렸어요. 그리고 이 영화가 주목하려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성으로 들어오시길 바라며 처리했어요. 저는 영화를 설정하면서 궁금했던 게 슬픈 감정보다도, 현실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 보고 싶었어요. 보통은 드라마틱한 상황을 보여주니까요. 그다음에 우리는 뭘 하지, 이게 더 궁금했어요.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디테일도요. 동사무소에서 신분증을 건네는 아주 쓸데없는 장면이 (웃음) 저는 궁금해서, 장례식장 같은 장소를 배제하고 현실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간을 더 묘사했습니다.
정성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 서사의 차원이 아니라 영화의 진행 차원에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었습니까? 이건 기분이라서 매우 부정확한 표현인데, 진영으로부터 카메라가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보다 뒤로 물러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냥 기분으로만 전해진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연출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궁금합니다.
김현정: 어머니 죽음 이후는 무거운 정서가 계속 있어서 그걸 표현하고 싶었던 게 있었고요. 전에도 아주 다정한 가족은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노력으로 인해 얽혀서 관계 맺고 있었으니까요. 어머니 죽음 전에는 쉐이킹 핸드헬드를 넣었거든요. 조금은 동적으로 느껴지길 바라서. 위로 카메라가 조금씩 흔들려서 움직이는, 아주 약간은 생기가 있는 장면으로 표현을 했고요. 이후엔 완전히 바스러진 이 집에서 그럼에도 다시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했어요. 전체를 아우르는 무게나 톤은 무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차이를 두게 되었습니다.
정성일: 〈흐르다〉는 아버지와 진영 사이의 원근법으로 진행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떤 순간은 더 붙이는 것 같다가도 영화에서 둘을 계속 멀게 만드는, 거리의 원근법으로 찍고 있다고요. 이게 〈흐르다〉의 미학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와 딸 사이의 원근법을 어떻게 설계하셨습니까?
김현정: 글을 쓸 때 많은 작가님이 그러시겠지만, 주인공에 본인을 이입해서 하시잖아요. 저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덩그러니 남은 우리는 어떻게 지낼지 상상하며 후반부를 썼어요. 그러다 보니 제가 있을 것 같은 위치로 자연스럽게 인물을 배치했던 것 같아요. 영화에서도 어머니의 죽음이 굉장히 중요한 축인 만큼, 진영이 캐나다로 가기 위한 과정을 겪으면서도 문득 어머니가 생각날 때 하는 행동들, 침대에 잠깐 눕는다든지 등을 필연적으로 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 것들을 포함해서 진영에게 몰입해서 내가 있을 위치와 아빠와 앉아 있는 거리를 생각해서 영화에 넣었어요. 영화적으로는 공장에 점점 익숙해지는 것이 부녀 관계의 가까움과 굉장히 비례적으로 갈 거라 생각했고요. 영화가 전체적으로 핸드헬드도 아니고, 픽스로 가기로 결정한 다음부터는 제가 활용할 수 있는 부분에 제약이 있으니까요. 그런 부분은 인물의 거리나 앉은 높이 등으로 최대한 활용해서 진영과 아버지의 거리를 설정했습니다.
정성일: 이제 여러분들의 질문 받겠습니다.
관객 1: 며칠 전 인디스페이스에서 단편 〈나만 없는 집〉을 봤는데요. 여기서도 언니와 동생의 대비되는 성격 묘사가 비슷합니다. 실제 감독님 가족의 성격이 반영된 건지 궁금합니다.
김현정: 지금은 저의 삶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쓰려고 해서 〈나만 없는 집〉과 이 작품에서, 저의 많은 면이 반영된 것 같고요. 다만, 〈흐르다〉에서는 언니 캐릭터가 후반부에 중요한 역할을 하잖아요. 〈나만 없는 집〉에서는 어릴 때 인식한 언니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다는 것에서 멈췄다면, 〈흐르다〉의 캐릭터는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의미로 현실을 살아내는 인물로 설정했어요. 진영은 못내 극 초반에는 현실적인 모습, 결혼하고 대단치 않아 보이는 가게를 운영하는 가치에 대해 낮게 평가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오히려 충실하게 본인의 삶을 살아내는구나, 알게 돼요. 도움까지 받게 되고요. 언니가 현실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 진영의 생각 차이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관객 2: 워킹 홀리데이를 계획하면서 여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주인공 태도에 많은 공감을 했어요. 공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분과 아버지의 마찰은, 아버지의 성격을 드러내는 의도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현정: 아무래도 진영이 지금까지 봐온 아버지가 썩 좋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가족 내에서의 모습이잖아요. 공장 안에서의 모습은 또 진영이가 익숙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것들을 좀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정성일: 아마 여러분들도 깜짝 놀라신 순간이었을 텐데요. 이제까지 보던 진영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는 진영이 우성산업 사장을 찾아가서 미수금을 묻는 장면입니다. 진영이 부쩍 어른이 되었다기 보다는 어머니의 자리에 갔다는 느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진영이 아버지와 은행을 방문하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갔을 때는 아버지가 서류를 주도적으로 정리하고 진영은 그냥 옆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에는 은행원의 질문에 진영이 대답하고, 아버지가 듣는 자리로 물러나 있습니다. 진영이 어머니의 자리로 가는 건 아버지와의 관계 변화이자, 힘의 변화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집에서 떠날 준비를 멈추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 이 영화가 흥미진진하다고 생각합니다. 집을 중심으로 원심력과 구심력이 동시에 작동되기 시작합니다. “이제 모두 진취적으로 나갈 거다. 이제 아무도 안 봐준다.” 아버지는 이전에 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딸도 아버지에게 어떤 것을 결정하는 공장 일에 질문한 적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아버지 옆에서 진영이 감을 깎아주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장면이 있기 전까지 우리는 진영이 아버지 곁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큰 의미에서는 같은 집에 있었고, 공장에 있었지만 한 프레임에서 무얼 한 적은 없습니다. 어머니의 자리라는 것에 진영이 진입하는 것. 이 설계에 대해 설명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현정: 진영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죠. 다만, 아버지가 조금은 무능력하고 의존적인 걸 알기 때문에, 책임이 혹여나 자기한테 올까 계속 경계하며 어쩔 수 없이 도와줘요. 다른 인물이 고용된다니 본인의 책임이 조금은 덜어져도 되겠지, 믿으면서 조금은 가벼워진 태도의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후반부에 언니한테 모른 척 했다는 말이 굉장히 중의적이잖아요. 여러 의미를 내포한 걸 거예요. 무엇보다 아버지가 누군가의, 특히 본인의 도움 없이는 안 될 걸 알면서 제3자가 오면서부터 괜찮을 거라 스스로 속이는 생각을 한 거죠. 그렇게 조금씩 손을 떼려는 행동들이 있어요. 이 집이 자기가 떠나게 되면 위태로울 상황이어도, 여기서 더 머물면 영원히 떠날 수 없을 거라 온몸으로 느꼈다고 생각했어요. “새로 오기로 했다.” 이 말을 들은 순간부터는 진영이 약간 후련해 보일 정도로 행동의 변화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다만 감을 깎는 부분에 있어서는 어머니 자리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본인이 책임을 안 져도 되니 속이며 가까울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정성일: 아버지와 진영이 트럭을 타고 가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두 번째로 함께 타고 갈 때 진영이 아버지에게 오백만 원을 빌려 달라고 하자 거절당합니다. 아버지는 돈이 없다기보다 캐나다로 떠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영은 그걸 법인 카드로 결제합니다. 이건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 재무제표 감사에서 이런 항목은 치명적인 결과를 맞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것도 아니고, 신중한 진영이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가 진영을 절대적으로 이해한다는 태도로부터 물러난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오백만 원을 둘러싼 과정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십시오.
김현정: 저는 사실 조금은 물렀고 무지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진영이 아버지 앞에서 소신 있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여전히 현실적인 부분에서 모르는 게 많고요. 법인 카드를 쓰는 게 위험하다는 인식을 뼈저리게는 못해서 긁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쁜 행동인 걸 알고 했다기 보다는요. 공장 전화번호도 모르는 상태에서 조금씩 나아졌잖아요. 그 과정에서 자기도 어느 정도 알고, 익숙해졌다고 생각을 하지만 여전히 무지한 상태예요. 시종일관 진영은 노력하지만 모르는 것도 많고 현실적으로 여전히 무른 부분이 많아요. 저는 그게 나쁜 인물이라기보다는 아직은 미숙한 면이 있고, 배워야 할 게 많은 청년의 모습이라고 인식했어요. 그래서 그 장면을 넣고 싶었습니다. 아까 계속 자기를 속인다는 표현을 썼는데 (잇자면) 법인 카드를 쓰면 안 되는 걸 어렴풋하게는 알 텐데요. 아버지가 식당에서 필요하면 쓰라고 했고, 본인은 돈이 필요했으니까요. 마치 어머니가 자동차 할부금을 대신 갚아주듯이, 좀 나아진 것 같지만 다시 후퇴한 거죠. 시종일관 줄다리기를 하는 인물인 것 같아요. 마지막에는 완전히 그것이 와장창 깨지고 말지만. 그만큼 우리는 변화하는 게 쉽지 않으니까요. 성장한 것 같다가도 후퇴하는 일련의 과정을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정성일: 이건 문법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앞에 한 것과 조금 다릅니다. 주문 문제로 진영과 호진이 말싸움을 하는데, 여기서 갑자기 핸드헬드로 찍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핸드헬드는 감정적 흥분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지만, 〈흐르다〉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습니다. 여기서 카메라를 들고 찍을 때는 진영의 감정적인 흥분 이상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진영의 머리를 때리는 장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영에 대한 폭력적인 제스처가 나오는 것 역시 처음입니다. 이 장면을 위해 핸드헬드를 아껴두었다는 느낌까지 있었습니다. 이 핸드헬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김현정: 대사 중 진영이 아버지에게 적나라하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장면이거든요. 어머니를 괴롭혀가면서 일궈진 공장이지 않냐, 라는 거요. 굉장히 적나라하지만 사실은 늘 하고 싶었던 말을 어머니를 대신해서 영화 전체에서 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이유에서 핸드헬드로 결정은 했는데 우려가 많긴 했어요. 앞에서 워낙 정적인데다가, 영화가 2.35:1의 비율을 가지고 있어서요. 인물에 집중하는 영화가 아니었고 톤이 극명하게 바뀌니까요.
정성일: 촬영 감독도 쉽게 동의를 하던가요?
김현정: 이전 작업들을 계속 같이 해와서 저를 믿어주셨던 것 같아요. 저는 영화의 톤에 우려는 있었지만 다른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콘티에서부터 있었고, 숄더리그까지 준비해서 촬영을 했어요. 영화 전체에서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해서요. 오히려 뒤에 우는 장면에서는 다시 〈흐르다〉 톤의 정석처럼 거리를 멀게끔 했어요. 부녀에 대한 영화라고 목표를 삼았기에, 파사삭, 이는 모래의 집에서 진영이 가족을 대신해서 아버지한테 항변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장면이에요. 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정성일: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될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에는 있었다가 영화에선 사라진 장면입니다. 시나리오에선 진영이 세무사를 두 번 만납니다. 두 번째 만남 장면이 사라졌습니다. 세무사가 법인 카드로 취업 패키지 결제를 했다는 걸 아버지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굉장히 중요한데 영화에는 없습니다. 이 장면은 찍었다가 편집에서 없앤 건지, 시나리오에만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영화에서 보지 못했기에, 마지막 시퀀스의 진영의 감정에서 무언가를 놓쳤다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납득은 되지만요. 이 장면이 영화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현정: 실제로 촬영까지 마쳤는데 편집 단계에서 삭제한 거고요. 일차적으로는 너무 설명적이라는 생각을 했고, 오히려 감정선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 삭제했어요. 무지적인 행동을 했음에도 아버지가 생각해주었다는 감정이 쓰고 찍을 당시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완성된 영화를 보니, 아버지가 진영을 이해한다는 면보다는 진영이 현재에 느끼는 주된 감정이 더 드러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본인을 인식하고 나아가는 장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이야기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뺐습니다.
정성일: 마지막 질문 하나를 하고 끝내겠습니다. 가장 여러 차례 찍으셨다는 마지막 장면은 캐나다 워킹 홀리데이입니다. 해피 엔딩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빵집에서 일하는 진영은 행복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영화는 맨 처음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환기해주기 위해, 첫 장면처럼 진영은 머리를 감고 말립니다. 저는 진영이 여기서 행복했다면 가족의 사진을 보지 않고, 기숙사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을 것 같습니다. 진영의 두 번째 시작을 바라보는 데에서 영화는 멈추는데요, 이 해피 엔딩을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현정: 가족의 굴레에서 혹은 아버지가 추구하는 성공에 대한 가치관에서 끊임없이 벗어나지 못하다가, 조금은 벗어났으니까요. 장소나 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별거 아니게 보일 수 있지만, 진영의 속에선 엄청난 도약이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명백한 해피 엔딩이에요. 그만큼 가족의 신념을 벗어나기 너무 어렵죠. 이 영화도 시종일관 벗어나려고 했다가 다시 잡혀 오고 벗어나려고 했다가 잡혀 오는, 답답한 과정을 그리고 있고요. 거기에서 한 걸음 나아갔다는 측면에서 이 영화는 해피 엔딩이라고 말씀드리고 싶고요. 그래서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숏으로 마지막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정성일: 봄날 주말에 이 이야기를 함께 해주신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흐르다〉가 김현정 감독의 말처럼, 여러분들께 도약의 위로가 된다면 감독께 더없는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김현정 감독의 다음 영화가 진심으로 빨리 보고 싶어졌습니다. 다음 영화도 대구에서 만들어지면 더욱 감사할 것 같습니다. 김현정 감독의 다음 영화를 응원하면서, 여러분들에게 감사하면서 이 자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김현정 감독께 박수를 드리며 마무리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김현정: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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