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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수프와 이데올로기〉 인디토크 기록: 잘 먹는 힘에 대해서

by indiespace_한솔 2022. 11. 17.

 

잘 먹는 힘에 대해서

 〈수프와 이데올로기〉  인디토크 기록

 

 

일시 10월 23(일오후 6시 상영 후

참석 양영희 감독

진행 김윤석 감독/배우

 

 

 

*관객기자단 [인디즈] 임다연 님의 글입니다.

 

 

양영희 감독의 카메라는 음식 냄새 가득한 안에서 트라우마적 사건을 담담하게 비춘다. 어머니랑 싸운 뒤에도, 반가운 손님이 왔을 때도, 눈물 날만큼 힘든 이야기를 나눈 후에도, 마지막에는 언제나 같이 모여 따뜻한 수프를 나누어 먹는다. 양영희 감독이 먹는 수프를 만드는 사람과 함께 나누는 사람은 어떻게 변화하는지, 양영희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지. 수프에서 비롯된 가족의 역사는 시대의 변천사이다.

 

 

양영희 감독(이하 양영희): 안녕하세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영희입니다.

 

김윤석 감독/배우(이하 김윤석):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질문 받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으로 참석한 김윤석입니다.

 

양영희: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사회자 없이 서로 자유롭게 이야기하듯이 진행되면 좋겠습니다. 우선 김윤석 감독님, 배우님께서 GV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을 같아서 설명을 드려야 같아요.

 

김윤석: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감독님의 다큐멘터리 3부작 중에서 세번째 작품입니다. 1, 2부가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인데, 2005년도에 만들어진 〈디어 평양〉을 저는 2007년도쯤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충격과 감동을 크게 받고, 부산국제영화제에 오신 감독님을 뵙고 말씀을 드렸어요. 〈굿바이 평양〉을 2009년에 보고, 〈수프와 이데올로기〉까지 12년을 기다렸습니다. 제가 전작들을 보면서 가장 궁금했고 경이롭게 생각했던 분이 어머님이셨어요. 작년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상영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득달같이 달려가서 보았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이야기라는 점이 제일 궁금했어요. 거의 15년을 넘게 감독님의 영화를 기다려온 셈이네요. 기간 동안 카메라 옆에서 분들을 바라 같은 느낌이 들만큼 실감나는 영화였습니다.

 

양영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났다고 말씀해주셨는데, 배급사 파티에 친구의 초대로 우연하게 참석을 했었어요. 저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무명의 가난한 감독인데, 극영화 감독들과 유명 배우들이 파티에 있으니까 내가 여기 있어도 되나 싶더라고요. 양익준 감독한테 계속 옆에 있어달라고 했었어요. 러다 김윤석 씨가 파티에 오신거예요. 얼굴을 아실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가오셔서 정말 팬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옆에 하정우 배우님도 계셨는데 소개해주시고. 〈디어 평양〉을 좋게 보셨다고는 전해 듣긴 했는데, 직접 말씀을 해주시니까 어쩔 모르겠더라고요. 일본에 가서 자랑을 정말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런 날이 줄이야. 작년 서울독립영화제 때도 〈수프와 이데올로기〉 GV 깜짝 게스트로 참여해주셨었어요. 너무 감사했습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에 대해 잠깐 설명을 드리자면, 어머니는 국물을 중시하던 분이셨어요. 편의점에서 주먹밥을 하나 사먹을 때에도 국물 없이 먹냐고 말씀하실 정도였고, 조선은 국물의 나라라고 하시면서 매번 마늘을 그렇게 많이 넣고 삼계탕을 만들어주셨어요. 그랬기 때문에 수프는 예전부터 저에게 소울푸드였어요그리고 이제는 남편인 카오루씨가 저기 앉아있는데, 첫만남에 삼계탕까지 만들면서 환영을 해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그날 영상을 찍으면서 , 이건 장편으로 만들어야겠다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수프가 중요한 의미인데, 그런만큼 어느 나라에서도 제멋대로 번역하지 못하는 제목으로 짓고 싶었어요. 그래서 〈수프와 이데올로기〉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김윤석: 전작들 번역이 모두 다르게 되었었지요.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도 다르게 나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 같아요. 같은 영화를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주고 받기가 너무 어려워지잖아요.

 

양영희: 영화 작품은 전세계적으로 제목이 다르잖아요. 그래서 해외 영화제에서 이야기 너무 힘들었어요. 무슨 영화를 말하는지 몰라서 낭비하게 되는 무의미한 시간이나 스트레스, 짜증 같은 것까지 모두 제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전세계 어디에서든 같은 제목이 있도록 노력하는 편이에요.

 

김윤석: 참고로 〈황해 일본 제목은 슬픈 짐승이었습니다.

 

양영희: 죄송합니다.(웃음) 아무 곳에나 슬픔, 사랑을 붙이네요, 정말. 질문 있으신 계실까요?

 

<수프와 이데올로기> 스틸컷

 

관객: 카오루 씨에게 여쭤보고 싶어요. 한국에 장모가 사위를 대접하고 싶을 씨암탉을 잡아주는 문화가 있는데, 삼계탕이 그런 의미였을 같아요.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잊었을 같은 문화가 교포 사회에서 지켜지고 있는 같아 인상적이었습니다. 카오루 씨가 그러한 문화적 의미를 알고 계셨는지 궁금했습니다.

 

출연자 카오루: (양영희 감독의 통역) 몰랐습니다. 식사 대접을 받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마늘을 그렇게 많이 넣은 요리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디어 평양〉을 스무번 넘게 봤기 때문에 일본인 사위를 싫어하시는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소금을 맞거나 배추김치로 뺨을 맞을 각오를 하고 갔는데, 제가 한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던 같습니다. 예상 외의 환대를 받고 너무 기뻤습니다.

 

관객: 부모님께서 다른 자식 분들이나 형제 분들을 모두 북으로 보내셨는데, 따님인 감독님은 곁에 두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양영희: 복잡한 문제이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제가 너무 어렸기 때문일 같습니다. 저는 당시 조국이나 북송의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요. 당시 김일성이 상당히 매력적인 연설을 했어요. 남한을 부정하고 싶지만 일본의 차별로 고통받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북으로 간다면 행복해질 있다는 연설을 한거예요.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한다면 집도 제공해주고, 교육이나 의료도 무료고, 직장도 생기고, 차별도 없이 환대를 해주겠다고 하니까 다들 믿고 간거죠.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속은 알았다고 해요. 하지만 되돌아올 수가 없었죠. 저희 부모님은 통일이 금방 될거라고 믿으셨어요. 당시 분위기가 그랬고요. 길면 10, 아마도 3년이나 5 안에 통일이 것이라고 저도 교육을 받았어요. 부모님은 통일이 되면 제주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다고 하셨지만, 전까지 어차피 고생을 한다면 차별이 심한 일본보다 조국으로 믿기로 북한에서 하는 낫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일단 아들들을 먼저 보내서 공부를 시키자고 결심하셨죠. 사실 첫째 오빠는 일본에 남을 알았어요. 하지만 오빠는 김일성의 환갑이었던 1972년에 인간 선물로써 북한에 갔어요.

 

김윤석: 〈수프와 이데올로기〉 촬영 기간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어요.

 

양영희: 엄청 길었어요. 아버지가 '미국놈 안돼, 일본놈 안돼' 하시던 장면은 〈디어 평양〉에 장면이긴 해요. 사실 비슷한 장면이 되게 많아요. 이건 제가 다큐를 찍는 방법인데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질문을 여러 하는 거예요. 장면을 얻으려고 짧은 기간 동안 여러 같은 질문을 하는 아니고요. 그건 너무 연출이니까요. 가족이라는 사실 매일 비슷한 이야기를 하잖아요. 커피가 맛있다, 비가 왔네, 반찬이 맛있다, 많이 먹어 같은 말을 하죠. 찍어보니까 생활이라는 크게 변화가 없더라고요. 같은 곳에서 비슷한 먹고 비슷한 생활을 하니까 없이 같은 것만 계속 찍었는데, 편집 단계에 오니까 그게 좋았어요. 아무튼 비슷한 장면이 많아서 헷갈리긴 하는데, 〈수프와 이데올로기〉에 선택된 장면은 2001년에 찍은 장면일거예요.

어머니의 증언을 찍기 시작한 2009년쯤인데, 전에 카메라 없이 듣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특히 4.3 대한 어머니의 말씀은 계속 달라졌어요. 처음에는 제주도에 가본 적도 없다고 하셨다가 조금 살았다고 하시고. 제가 자꾸 물으니까 제주도는 너무 옛날이고 좋은 없었다고, 잊었다고 하셨어요. 어느날은 친척들이나 사람들은 해줬다는 이야기도 조금씩 하셨고요. 그러다 사실은 4.3 겪었다는 이야기를 조금씩 시작하셔서, 촬영을 하려고 카메라를 옆에 두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오랫동안 카메라를 받아들여주시던 어머니가 처음으로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4.3 특히 무서우니까 건드리지 말고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본인이 조금씩 이야기해주시고 저도 조금씩 촬영을 했어요.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 제주도에 약혼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해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아버지 돌아가시니까 이야기 하시는거냐고 여쭈어봤더니, 남자들은 원래 옛날 남자친구 이야기 듣는 싫어한다고 저한테도 조심하라고 하셨어요.(웃음) 말문이 제대로 트인 계기는, 제가 한국 사회가 얼마나 변했는지 말씀드렸기 때문이에요.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사람들은 한국에 오니까 현재 한국 사회가 어떤지 몰라요. 신문에서나 조금 읽지 실제로 민주화 이후 한국을 겪어보지 못해서 믿지를 않았어요. 하지만 제가 계속 대통령도 4.3 학살 인정했고, 평화재단이나 공원도 있고, 조사하면서 생존자를 찾고 있다고 안심을 시켜드려서 어머니의 증언 양이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5년쯤 찍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증언만이면 단편영화 정도밖에 안될 같은거예요. 그래서 고민을 하던 , 인생에 이상한 일본 남자가 나타났어요. 사람이 어머니를 만나러 가겠다고 하는데,

 

김윤석: 이건 분량 나오겠다, 싶으셨겠네요.(웃음)

 

양영희: 아직도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가 있는 미친 재일교포 집에, 더군다나 일본 사람은 안된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거길 가겠다는 일본 사람이 나타난거잖아요. 진짜 미친 집에 미친 사람이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코미디가 있을 같아서 날만 찍고 단편영화를 만들려고 했어요. 이런 말 어머니의 딸에게 이런 남자친구가 생겼다, 후에는 어떻게 될까? 하는 식으로요. 사실 4.3 이야기가 너무 힘들기도 해서 빨리 끝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만남이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환대해주실지 몰랐고, 사람의 대화 방식도 인상적이었어요. 마치 외교관처럼 불필요한 이야기를 전혀 하더라고요. 정치 이야기나 김일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도 안하고, 북한의 가족들은 계시냐고 물어보면 네에, 하고 말고. 진짜 사람들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혼자 어린애 같이 사상이나 가치관이 다르다고 년을 촬영을 하고, 고민을 하고, 우울증 걸리고.(웃음) 나만 어렵구나, 이런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영화는 장편으로 찍어야겠다고 결심을 했어요. 당시에는 어머니랑 제주도에 있을지도 몰랐고 치매에 걸리실 줄도 몰랐지만, 카오루 씨가 장편으로 찍으라고 북돋아줬어요. 하지만 장편을 만들려면 돈이 필요하잖아요. 오사카도 계속 다녀야 하고, 최소한 우리는 제주도에 가봐야 하니까요. 그래서 카오루 씨에게 장편을 만들려면 앞으로 년간 당신을 착취해야한다는 허가를 받고 촬영을 시작했어요.

 

김윤석: 만약 헤어지더라도 당신을 찍은 영상에 대한 권리는 나한테 있다, 지우라는 자격이 없다는 허가까지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양영희: 이런 말씀 죄송합니다만, 양영희 오타쿠가 아니신가...(웃음) 그런 허가를  받으면서 증거도 남겼어요. 재판에 가더라도 내가 이겨야 하니까. 우리가 헤어져도 영화는 남는다, 영화제에  수도 있고, 개봉할 수도 있다. 그래도 절대 상영 금지라고 하지 않을 . 저작권은 나한테  . 사실 협박이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세상에 나올  있었어요.

 

 

관객: 제주도에서 있었던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하셔서 감독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이렇게 몰랐다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4.3 대해 알게 되면서 다른 어떤 감정이 드셨는지 궁금합니다.

 

양영희: 복잡했습니다. 나레이션으로 제가 어머니는 어떻게 이런 고향의 기억을 가지고 살았나, 섬과 나라와 어머니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했는데요. 자신의 어머니, 자기 가족에 대해 몰랐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몰랐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나왔는지, 어떤 사람이 나를 키웠고 어떤 영향을 받고 내가 자랐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사실을 살이 넘어서 알았어요. 제가 밀항자의, 난민의 딸이라는 정체성을 50 넘어서 발견한거죠. 정말 대발견이었어요. 어머니가 이야기를 해주시고 치매에 걸리셨다면 저는 그것조차 몰랐을거예요. 어머니가 이야기를 많이 해주신 것이 이제 와서 감사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무슨 내용이든 간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많이 안다는 것은 곧장 자신에게 이어져 자신감을 준다고 생각해요. 의문이 많으면 고민만 하게 되고 불안해지니까요. 그러나 사실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안에서 답을 찾을 있게 되니까, 정체성이라는 문제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소수자들이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모두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재일교포라는 의미에서 소수자이기도 하지만 주제를 바꾸면 제가 다수가 수도 있는 것처럼, 소수자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니까요. 따라서 시선을 바꾸어서 자기 자신이나 스스로의 배경에 대해 생각해보는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부모의 정치적 선택에 대해 모두 찬성이나 공감하는 아니지만, 이유를 알고 나니 만약 내가 시대에 살았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적어도 모든 인생의 선택에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결과가 다르다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유를 알고 계속 소통을 해야한다고 느꼈습니다. 조금 겸손해진 같아요.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이런 사람이야, 라는 말을 많이 해왔거든요. 과연 저는 얼마나 알고 그런 말을 했을까요? 저에 대해서 남편이 우리 와이프는 이런 사람이라고 말하면 조금 화날 같은데 말이에요. 이제 고작 6 정도 사람을 마치 아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거니까요. 사람을 아는 것도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 일인데, 하나의 사회를 이해하고 가족을, 국가를 이해한다는 정말 방대하고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것을 염두에 두고 사람을 만나고 사물을 대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관객: 영화 속의 이데올로기가 삼대에 걸친 이야기이자 결국 한국 사회 전체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감독님께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개인사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저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다음 작품 또한 비슷하게 이데올로기에 관한 이야기일지 궁금합니다.

 

김윤석: 작품 내용은 누설하시면 안됩니다.

 

양영희: 내용은 비밀입니다.(웃음) 다음 작품은 영화를 생각입니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고요, 이데올로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데올로기 바깥에서 사람들이 생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정면으로 보여주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있지만, 우리의 하루하루는 아주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뤄져 있어요. 커피 잔의 값이나 권의 값도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있습니다. 저는 아주 정치적이고, 아주 개인적이고, 아주 독특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정치적이지만 재미있는, 조금 비극적이지만 웃을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고민 중입니다. 생각해둔 배경은 여러 개가 있는데요, 도쿄일 수도 평양일 수도 있습니다. 비밀이라 말씀 드리지 못하는 점은 죄송합니다.

 

 

관객: 딸로서의 감독님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요. 영화 속에서 문제가 남아있었잖아요. 어머님의 빚이었던 40만엔은 갚으셨는지 궁금했습니다. 더불어 북한에 계신 가족 분들에게 돈을 보내거나 어머니의 유골을 평양으로 보내는 방식에 대해 생각을 해보셨는지, 조카분께 편지를 보내실 생각인지 궁금했습니다.

 

양영희: 어머니와 문제로 다투는 장면은 제가 직접 촬영했어요. 카메라를 고정시킨 상태에서 촬영했는데, 어머니는 카메라가 켜졌는지 꺼졌는지 모르시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카메라를 의식하셨는데,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니까 의식에서 완전히 사라지는거죠. 촬영 중이니까 정도였지, 카메라가 없을 때는 잔인한 딸이었어요.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책도 쓰고 있지만, 돈이 안되는 작품만 만들어 왔다보니까 수중에도 많은 돈이 있지는 않아요. 그런데 아버지도 쓰러지시고 하면서 돈이 필요한 상황인데, 어머니가 도와달라고 말할만한 사람이 밖에 없으니까 너무 부담스러운거예요. 문제가 우울증에 기여를 했을만큼 머리가 많이 아팠어요. 어머니가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화는 나는, 아들 손자한테 보내는 돈이니까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내가 은행이야? 하고 억울해지기도 하고. 오빠 걱정은 하면서 생활이 망가지는 걱정 하냐고, 정말 욕까지도 했었어요. 그러고 나서 도쿄로 돌아가면 너무 미안해져서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시는 과일을 사서 보내드리기도 하고, 전화로 미안하다고 말씀드리기도 하고. 그렇게 한참을 울고 한달 뒤에 오사카에 가면 싸워요. 그걸 동안 해온 거예요. 카오루 씨를 처음 만났을 경고부터 했었어요. 베를린영화제 같은 데서 레드 카펫을 걷는 멋진 영화 감독이 아니다, 돈도 없어서 엄마랑 매일 싸우는 보잘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요. 친구 정도로 만나는 좋을 같다고 제가 설득을 했을 정도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재미있어 했어요. 그러더니 본인 집안 사정을 이야기해서, 어느새 고생 자랑이 되어버렸어요. 보통 선을 좋은 이야기만 하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무슨 회사에 다니고, 나는 어느 대학을 나왔고, 연봉이 얼마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는 거꾸로였어요. 얼마나 자기 가족이 이상한 가족인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부터 앞다투어 이야기하면서 우리 만나면 정말 큰일난다고 했으니까요. 이후에 서로가 편해졌어요.

편지에 대해서는, 〈디어 평양〉 이후에 제가 북한에 들어가게 됐거든요. 일본에서 북한에 가려면 조총련을 통해서 가야 하는데, 입국 된다 그러는거예요. 입국을 하려면 사죄문을 쓰라고 했는데 제가 쓰지 않았어요. 그러니 편지도 보내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해서 저는 편지도 일체 보내지 않게 되었어요. 영화에 나온 장면은 어머니가 북송이라는 말도 잊은 뒤예요. 어머니가 처음 죽은 가족들이나 평양에 있는 아들을 찾을 정말 무너질 것처럼 놀랐어요. 제가 사람들 평양에 있다고 하니까 전혀 모르시는 눈치로 되묻고, 귀국(북송)했다고 하니까 ", 귀…" 하셨어요. 단어를 완전 잊으신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어머니에게는 행복이죠. 매일 아들 생각, 손주 생각하며 걱정하던 것에서 해방되셨으니까요. 그건 좋은데 언젠가 오빠랑 다시 만날 날이 왔을 때에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모두 잊었다고 하기에는 오빠들에게 너무 잔인하고, 미안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한참 우울해있는데, 조카가 편지를 보낸거예요. 답장을 쓰고 싶었어요. 한참을 내가 결혼을 ,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할머니(어머니) 대한 이야기에 가니까 이상 쓰겠더라고요. 눈물도 많이 났어요. 어쨌든 편지는 보내지 않는 편지예요. 편지 쓰는 장면을 넣자고 구성안을 짜고 찍은 것은 아니었어요. 편지를 생각도 원래 없었는데, 촬영 감독이 우리 집에 와서 같이 밥을 먹었거든요.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가 속이 답답해져서 감독님 가시면 편지라도 써야겠다고 하니까 그걸 찍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네시간 동안 쓰고 버리고 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찍으셨어요. 속에서 초를 골라다 영화에 썼습니다. 이렇게 영화를 찍으니까 10년이 걸리나봐요.

 

관객: 감독님께서 흔치 않은 상황이나 힘든 상황을 받아들이시는 태도가 상당히 유쾌하시고, 유머 코드가 남다르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까 말씀해주신 것처럼 생활을 하면서 노출되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힘들어하지 않고 유쾌하게 해석하실 있는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양영희: 잘 먹고 아주 잡니다. 2010년에는 우울증을 정말 심하게 앓으면서 힘들었지만, 후로는 괜찮았어요. 돈이 항상 없긴 했어도 사실 돈이 있는 집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재일조선인 중에서도 북한에 가족을 조총련 간부의 자식이면, 쉽게 말해서 흙수저 중에 흙수저라고 있어요.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면서 처지가 아주 특별하게 힘들거나 비극이 아니라는 느끼고 있어요. 저는 민주화 한국에 수도 있고, 자리에서 조총련 간부의 딸이라고 해도 잡혀가는 것도 아니고, 일본에서도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잖아요. 아주 행복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돈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나 가정이 제각각의 상처를 가지고 있고, 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미완성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족이기 때문에 모든 가족은 이상하다고 느껴왔어요. 그런 문제를 밖으로 드러내느냐, 내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저는 짐을 보이는 것을 업으로 선택했어요. 제가 이렇게 제가 짐을 보임으로써 여러분도 각자의 짐을 보이는 쉬워졌으면 해서. 그런 촉매가 되고 싶어요. 서로 짐을 보이면 소통을 있지 않을까요.

저는 작품을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창성과 개성이 중요하니까, 남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빨리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다른 사람이 비슷한 이야기를 먼저 내버리면 이야기는 신선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빨리 내려고 하는데, 제가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게 문제이긴 합니다한편으로는 가족을 소재로 사용하며 아주 뻔뻔하게 사는 인간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해방되고 싶기 때문이에요. 여자라는 , 일본에서 태어난 , 소수자의 딸이라는 , 그런 아버지의 딸이라는 , 오빠가 평양에 있다는 . 모든 배경에서 해방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봐야 같다고 20 후반쯤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예상도 못한 다큐멘터리를 편이나 만들어버린 겁니다. 이제는 가족 이야기와 종지부를 찍으려고 해요. 나이도 예순 가까이 되었으니 작품을 빨리 필요성도 느껴서요. 시나리오를 빨리 쓰려고 합니다. 혹시 제작 회사나 투자자 분들이 계시면 부탁드립니다. 한국 배우님들의 협력도 많이 받고 싶어요.

 

 

김윤석: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해야할 같아요. 감독님이 책을 내셨어요. 제목은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예요. 책도 영화 3부작에 포함되지 않을까 싶은데, 간단하게 설명 부탁드려요.

 

양영희: 책에는 영화에 없는 이야기를 썼어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이런 가족을 찍으며 자신을 보이는 과정에서 느낀 점이 담겨 있고요. 카메라 있이, 또는 없이 북한에 방문했던 경험들과 카메라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게 이후의 저에 대해서 여러 에세이를 썼습니다. 재일교포, 특히 북한과 관련된 재일교포의 삶을 그린 작품이 적으니까 관객 분들도 배경 지식이 없잖아요. 그래서 매번 처음부터 시작을 해야해요. 이럴 때는 독일이나 유럽의 영화들이 부럽습니다. 작품이 많고 교육도 되어 있으니까 아우슈비츠의 역사에 대해 다들 알잖아요. 이제까지 정말 많은 작품이 있었는데도 수준 높은 작품들이 거의 매달 나와요.(웃음) 그래서 재일교포의 이야기를 다룬 파친코 출간되었을 정말 기뻤어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파친코 본다면 앞으로 작품을 만들 때는 설명 없이 바로 사건에 들어갈 있을테니까요. 파친코 주인공 선자가 오사카에서 정착한 동네가 저희 어머니가 사시는 동네예요. 그러니까 저희 외할머니가 선자, 어머니가 자식 세대, 제가 손자 솔로몬 정도의 세대가 같네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다시 재미있게 보실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윤석: 이번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정식 개봉을 했지만, 전작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은 정식 개봉 했나요?

 

양영희: 는데 관객이 너무 적었어요. 그래도 지금 작품 모두 리마스터링 작업 중입니다. 정식 개봉은 어려울 같지만, 올해 보여드릴 있을 같아요. 아직 자세히는 말씀드릴 없지만, 발표가 될거예요.

 

김윤석: 우리가 가끔 집에서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틀어놓고 보는 것처럼, 감독님의 3부작을 극장에서 연달아서 보면서 속에 파묻히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멋진 기획자 분들이 기회를 잡아주셨으면 좋겠고, 리마스터링 끝나면 그런 일이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 와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양영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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