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 리뷰: 텁텁한 사랑의 되풀이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진하 님의 글입니다.
얼마 전,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출간되자마자 밭은걸음으로 서점엘 갔다.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 썼다는 그 책은 언제나처럼 내게 새로운 관점을 선물해주었다. 당신과 있을 때, 다른 이들과 있을 때, 홀로 있을 때 나는 각각 다른 사람 같다. 당신이 바라보는 내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하고, 동시에 거짓말로 누군가와 관계 맺고 있는 걸까 고민한다. 이 묘한 죄책감의 끝은 결국은 모든 모습이 다 '진짜 나'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작가의 문장을 빌리면, '나'란 나눌 수 없는 '개인(individual)'이 아니라 여러 개의 나, 즉 '분인(dividual)'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다 보면 그 앞에서만 작동하는 나의 어떤 패턴이 생긴다는 것. '나'란 바로 그런 분인들의 집합이라는 것. (신형철, 『인생의 역사』)
홍상수 감독의 신작 〈탑〉에서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와 탑 속 위치에 의해 달라지는 주인공 병수를 발견할 수 있다. 인물들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한다. 종교는 인간이 필요해서 만들어낸 것이라던 병수가 하나님을 실제로 만났다 말하고, 건강을 위해 채식을 하던 사람이 입안 한가득 고기를 욱여넣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위로 향할수록 달라지는 인물들에게서 종종 감독을 발견하며 웃고, 이따금 자신을 발견하며 찝찝한 기분을 느낀다.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와 당신이 보는 내가 있다. 이 둘의 모습이 일치할 때, 우리는 '서로의 진짜 모습'을 아는 것처럼 느낀다. 당신이 진정한 나를 알아준 것만 같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많은 것을 사랑할 수 있다. 아름다운 너, 함께 한 약속, 2층의 우리 집, 이 모든 것이 포함된 우리의 관계. '당신만 진짜 나를 사랑해준다'는 말은 이런 말이다. 당신이 바라보는 나와 당신을 바라보는 나를, 사랑이라 이름 짓겠다는 결심.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기로 한 결정이 끝나서, 사랑은 끝난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줄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기로 결정하면 사랑할 수 있기에 사랑이라 부르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 것이다. 종교가 인간의 필요에 의한 발명품이듯, 사랑 또한 발명품이다. 발명하기로 하면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은 비슷하고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된다. 병수는 2층의 물 새는 방 대신 3층의 옥상을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고기를 먹고 비밀번호를 바꾸고 신을 필요로 한다. 현실의 사랑은 영화와 다르게 대체로 텁텁하고, 이 텁텁한 영화는 희한한 방식으로 낭만적이다.
내가 서점으로 달려가던 마음과 비슷한 마음으로, 홍상수 감독의 〈탑〉을 기다린 관객들이 있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들만큼 '감독 홍상수'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를 좋아하는 이에게 그다우면서 그답지 않은 영화라 전해 들었다. 인생에서 몇 가지 사건을 겪으며 변해가는 작가의 모습에는 사라진 것과 새로운 것이 있다. 하나하나 아쉬워하고 즐거워하며 매번 단숨에 끝까지 읽어버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다. 서울이 아니어도, 치기가 사라져도, 그가 계속해서 영화를 찍기로 결정하길 바란다.
'Community > 관객기자단 [인디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디즈 Review] 〈만인의 연인〉: 사랑의 친밀한 이웃은 도우이기도 해서 (0) | 2022.12.13 |
---|---|
[인디즈 Review] 〈트랜스〉 :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0) | 2022.12.05 |
[인디즈 Review]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부러진 손톱은 다시 자란다 (0) | 2022.11.22 |
[인디즈] 〈수프와 이데올로기〉 인디토크 기록: 잘 먹는 힘에 대해서 (0) | 2022.11.17 |
[인디즈 Review] 〈낮과 달〉: 두 여성의 귀엽지만 다소 허망한 힘겨루기 (0) | 2022.11.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