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춘언니〉 리뷰: 흰 수염의 오필리어는 그럼에도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임나은 님의 글입니다.
영화 <재춘언니>는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 복직 투쟁의 현장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4464일의 싸움, 그리고 합의서를 받아내는 순간까지 강산이 변하고도 남았을 그 세월을 고스란히 카메라 안에 담았다. 이수정 감독은 수많은 얼굴 사이에서 임재춘을 선택해 집중적으로 그려낸다. 밴드, 연극, 일상 등 다양한 모습을 스스럼없이 꺼내는 재춘의 모습에서 주인공적 면모를 발견하고 그를 중심으로 투쟁의 단면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영화는 재춘의 현재를 제외하고는 전부 흑백으로 표현되는데 이러한 표현 방식이 답답함을 자아내기보다 노동자들이 느꼈을 외로움과 고통을 시각화하고, 컬러로 전환되는 시점을 부각해 짜릿함을 배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희곡 ‘햄릿’을 모티브 삼아 만든 연극의 한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의 주인공인 임재춘은 비련의 여성 ‘오필리어’를 맡아 연기한다. 투박한 중년 남성이 젊고 가엾은 오필리어를 연기하니 관객은 깔깔대며 웃지만, 임재춘은 웃지 않는다. 가장 믿었던 햄릿에게 배신당해 미쳐가는 오필리어가 본인과 다르지 않은 처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그의 모습을 더해 20살이 넘은 두 딸에게 밥 한 끼 제대로 지어주지 못해 슬퍼하는 임재춘에게서 우리는 일반적인 남성 노동자와는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무대 위, 그리고 사장과의 면담 앞에서 핏대를 세워가며 의견을 피력하다가도 농성장에서 또 다른 노동자를 위해 따뜻한 밥을 짓고 빗자루를 이리저리 쓸어가며 청소를 이어가기도 한다. 재춘이 남성임에도 ‘언니’로 불리는 이유를 다큐멘터리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해고 노동자의 현실을 담아낸 <휴가> 속 주인공의 모델이 재춘이었고, 남성 노동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자 했다는 이란희 감독의 말을 떠올려본다면 좀 더 설득력 있는 호칭이 된다.
‘한동안 뜸했었지. 속절없이 화풀이를 달님에게 해대겠지.’ 사랑과 평화의 1978년도 음악 ‘한동안 뜸했었지’를 비롯해 카프카, 니체의 문학 등 다양한 예술의 형태가 영화에 등장한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임재춘을 비롯한 노동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기록된 절망, 자유 의지의 역사를 농성장에서 여러 갈래로 재생산하며 분노와 슬픔을 역동적으로 풀어낸다. 기타를 치며 다 함께 노래를 불러대기도 하고, 서툰 몸짓으로 연극을 하기도 한다. 답답한 현실이라고 절망만을 드리우지 않고, 거대한 건물 앞에서 저항의 목소리를 힘차게 이어간다. 사실 무언가를 향한 투쟁을 13년간 이어온다는 것은 꽤 끔찍하다. 약자의 현실을 너무 쉽게 등져버리는 회사와 대법원의 모습을 스크린 너머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비참함과 절망을 느낀다. 그 모든 순간을 피부로 느꼈을 재춘은 영화 중간중간에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고, 힘들다고 말한다. 자신을 바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계속 묵묵히 자리를 지켜내는 재춘의 표정에서 관객은 그가 짊어진 커다란 사명감과 책임감을 목도한다. 그 단단함이 겹겹이 쌓이고, 굴복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연대한 노동자가 모여 박영호 사장과의 교섭을 이뤄냈고,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언젠가의 희망을 위해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수고로움과 고통, 처절함을 동반할지 가늠할 수 없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 마음에 대해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단어로 글을 내뱉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와 무성한 수염 틈새에서 재춘언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뿐이다. 오필리어는 미쳐버렸고 물에 빠져 허무하게 죽었다. 하지만 임재춘은 달랐다. 농성장에 걸려있던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라는 문구처럼 그는 끝까지 ‘삶’을 선택했다. 물론 얇디얇은 합의서 한 장으로 그의 삶이 180도 달라지진 않겠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이 이어지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좀 더 후련한 마음으로 그리고 행복을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을 테다. 그래서 현재의 재춘언니는 흑백이 아니라 컬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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