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세계〉 리뷰: 1인분의 세계가 차지한 부피의 외연을 따라서
*관객기자단 [인디즈] 은다강 님의 글입니다.
현실을 사랑할 자신이 없을 때 전시회장을 찾는다. 사진으로 그림으로 투영된, 작가의 눈에 비친 세상을 보고 있노라면 새삼 이곳이 아름답다는 걸 깨닫는다. 냉담한 마음이 그제야 사르르 녹는다. 북촌에 여행 온 소피(아나 루지에로)를 둘러싼 현실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사랑할 수 없다. 소피의 시선이 아니라면.
소피가 머무는 집의 주인 부부, 수영(김새벽)과 종구(곽민규)는 실은 그 집의 세입자다. 그들은 소피에게 집주인을 만나면 여행객이 아닌 친구인 것처럼 거짓말해 달라고 부탁한다(그리고 이것은 불법이다). 소피는 닫힌 방문 너머로 부부의 울음과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목소리를 듣는다. 종구는 어머니 수술비를 위해 집을 팔아야 하는 상황 때문에 수영이 자신을 원망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미안하고 속상한 마음을 상대를 다그치고 고함치는 것으로 대신한다. 수영은 종구의 마음이 작아져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괴롭다고 토로한다. 힘들어하는 수영을 보고 나서야 종구는 반성한다. 그들은 이것도 사랑이라 눙치지만, 일련의 상황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던 나는 하염없이 괴로워진다.
다행히 한국어를 잘 모르는 소피의 세계에는 닿지 않는 말들이다. 소피는 “모르는 말 사이에 있는 거 정말 힘들”다며 수영과 소피 사이에서 영어가 서툴러 소외되는 종구의 입장을 헤아려주지만 정작 모르는 말 사이에 있는 건 그래서 다행인 건 소피다. 소리의 날카로움이나 높낮이로는 헤아릴 수 없는 지저분한 사정을 걸러내면 그 아랜 수영과 종구의 슬픔, 서로를 향한 미안함, 애틋함만이 남는다. 소피에게 두 사람은 가끔 서로 날 세우지만, 꽃과 함께 사랑을 주고받는 사랑스러운 외국인 부부일 뿐이다.
소피가 겪는 세계는 언어의 장벽을 보호막처럼 두르고 있다. 수영의 집을 조카에게 보여주기 위해 찾아온 집주인이 세입자가 아닌 소피가 집에 혼자 있는 걸 보고 한바탕 난리를 치지만 짜증 섞인 뉘앙스 너머 무례한 말까지 통역되지는 않는다. 소피가 북촌까지 와서 찾았던 친구, 주호(김우겸)의 삶을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다. 소피는 그가 자신을 구해준 과거의 일을 재차 고마워하지만, 관객은 주호가 치킨집에서 자신 때문에 우는 여자를 두고 도망가는 장면을 꼼짝없이 목격한 뒤다.
사실 〈소피의 세계〉의 주인공은 소피가 아니다. 소피의 북촌 여행으로부터 2년여가 흐르고 우연히 그의 블로그를 발견한 수영의 내레이션이 이야기를 끌어간다. 수영은 인생의 밑바닥이었을지 모르는 순간을 외부인의 눈으로 다시 복기하며 흐려지고 성긴 기억을 아름답게 덧칠한다.
소피를 통과해 본 북촌의 기억이 따스해 보이는 건, 불가해한 영역의 공백을 그대로 두어서일까. 수영이 자신을 탓하고 원망할 거라며 종구가 괴로워했던 것처럼, 주호가 방황하는 이유가 자신에게 있을 거라고 짐작한 여자처럼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곡해하지 않고 보이는 만큼만 이해하고 더 파고들어 마음 쓰지 않는 게 답일까.
소피의 세계는 그가 겨우 닿은 타인의 외피다. 우리는 손톱만 한 타인의 껍데기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그것이 전부라고 착각하며 악을 쓰고 고함치고 있지는 않았나. 우리는 소피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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