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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인디피크닉 2022' 단편 3: 너의 이름의 획을 끌어 완성되는 사랑

by indiespace_한솔 2022. 4. 19.

 

 

 

 인디피크닉 2022 〈메이·제주·데이〉, 〈씨티백〉, 〈제씨 이야기〉, 〈돛대〉  리뷰:

너의 이름의 획을 끌어 완성되는 사랑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해수 님의 글입니다.

 

 

 

이름 명()은 가지런한 입()이 맘껏 움틀 준비를 하는 모양으로 읽힌다. 그러니 나도 선뜻 오독을 해보자면, 저녁 석이 입 위에 얹어진 게 꼭 이름은 시기를, 시절을 거르지 말고 내내 부르라는 상냥한 충고 같기도 하다. 단편 3 섹션의 제목은 나의 이름이 너를 부를 때이다. 너의 이름을 발음하는 어느 날은 탄성과 같이 통, 튀어 오르기도 했겠으며 무른 토마토가 픽, 터지듯 새어나가는 날도 있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왜 입은 너를 위해 존재하듯 여지를 가운데에 비워두는 걸까.1) 이에 답신으로 충실한, 호명으로 잇고 기대는 영화 네 편을 이어 소개하려 한다.

 

 

메이·제주·데이제주 4·3’ 당시 자장가를 가만가만 들어야 했던 아이들의 걸음을 조명한다. 그만큼 어렸던 이들에게 새로이 가락을 알려줄 어른이, 가사의 끝말로 장난을 던질 이웃 언니가, 아래의 화음을 맡았던 친구가 이어 희생을 당하였고, 사라졌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명랑하던 놀이 노래는 자주 중단된다. 다만, ‘제주 4·3’에 딛고 서 있던 아이의 홍채만큼은 멈추지 않고, 다음 세기에 와서도 기록을 이어가고 있었다. 색감을 신중히 골라 넣고, 같이 누워있던 가족들의 눈 모양을 기억하여, 행해진 폭력까지 모두 진술하여 도화지에 그려진 증언. 생존자분들께서 꺼내신 말의 마디들을 모두 놓치지 않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꼭꼭 나의 입 벽에 담아두다가 문득, ‘MAY DAY’란 도움을 요청하는 수신 사이에 ‘JEJU’가 삽입된 게 슬프면서도 무척 중요한 지점을 지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든 신호를 원활히 주고 건넬 수 있도록, 제주를 가운데에 주요히 두어야 할 테니까.

 

 

씨티백자세한 구별이 어려운 시간에 있는 여러 기현들에게 찾아가 말문을 두드리는 시선이 나온다. 청소년이 가장 락카 칠을 많이 해 일렬로 두었다는 씨티백 기종. 이 영화에 나온 그들의 위법 행위를 옹호하고 싶진 않지만, 모든 힐난을 그들에게 하고 싶지도 않다. 씨티백에선 뭉텅이로 보이는 시간대의 그들, 그러니까 어둠 안에서 질주하는 면면뿐 아닌 어떤 법으로도 급여를, 신변을, 죽음을 보호받지 못했던 말간 얼굴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중심 화자가 누구일지 궁금했는데, 이어진 인디토크에서 감독님께서 영화 자체의 화자를 자처했다는 말씀을 듣고 더 마음이 묘하게 물렁거렸던 기억이 난다. 더는 그들의 연락이 불시에 절단되지 않는 세계가 오길, 그러니까 해의 볕이 한 뼘도 들지 않아도 모두 구별이 되는, 구별을 애쓰려는 태도를 모두가 지닌 그 시기가 부디 도래하길 바라는 마음이 깊이 생겼다.

 

 

제씨 이야기는 제임순 할머니와 제임슨의 증편처럼 찰기 있는 우정 이야기이다. 발음이 비슷한 이름으로 인한 혼동을 계기로 안 둘은, 할머니가 운영하는 방앗간에서 또 만나게 된다. 이 영화는 떡의 물성과 만드는 수고로움을 제임슨이 고스란히 이해하게 된다는 과정의 담음이 다정하다. 카메라의 무빙 덕분에 갓 만든 떡의 증기, 들어야 할 재료의 무게, 랩에 쌓여 떡이 담기는 과정 등 둘의 분주함이 더 잘 읽혔다. 서사에 있어 제임슨의 노동이 꽤 비중 있게 등장하여, 제임순 할머니의 공간을 지키겠다는 마음에도 설득이 결연히 되었다. 모두가 만류하며 밀어내는 와중에도 셔터를 열고, 떡을 모락모락 만들고 싶어 하는 마음, 할머니께서 말해왔던 문장을 꼿꼿이 피력하는 태도들은 제임슨에게 매일 있었다. 그렇기에 결국 방앗간이 남게 되었다는 쟁취, 아이가 본인의 본관을 반듯하게 적는 기록들도 자리할 수 있게 되었다. 연속되는 단단한 말은 더없이 완고해진다는 걸 이 영화를 통해 증명받은 기분이어서 무척 기뻤다.

 

 

돛대는 진로, 연인, 가족 등 나와 관계를 거듭 흔드는 미끄러짐을 겪는 은구의 기로를 담고 있다. 담배에 수를 차례로 기입해두고 딱 하나에만 별을 그려둔 은구. 아마 흡연할 때마다 본인의 마지막, , 콜이 없는 암전만을 계획하며 태웠으리라. 그러나 우연히 휴게소에서 만난 명희와 마주하며 계획은 오묘하게 흐트러진다. 몰랐던 친구의 죽음을 태연히 듣게 되었고, 염두에 두었던 별표 담배마저 명희가 태우며 엉킨 걸음으로 왔으니까. 은구는 명희가 죽은 동생이 꿈에 와 나는 그 안에 있어.”라며, 즐겨 간 나무 부근을 꺼냈다고 말할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궁금했다. 은구는 끝을 멸()로만 꽉 닫아 생각한 인물 같았는데, 명희로 인해 그 끝에도 가늠되지 않는 무언가가 더 있을 수 있다는 지속을 어렴풋이 생각해보진 않았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해보기도 했다. 은구가 명희에게 받은 별만 총총 든 한 갑은, 하나의 세계를 다시 가동할 수 있게 만든 더없이 단단한 대()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네 편의 영화들은 의 이름을 부르고 있으나 동시에 의 이름과 마음의 내벽들도 차곡차곡 호명되어 꽉 찬 이름의 행렬을 만든다. 그러니까 나 역시 여러분들의 이름을 망각하지 않겠다고, 입 안을 이름 없이 비워두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마음이다.

 

 

 


1) 입 구의 한자가 틀만 있고 가운데는 빈 사각인 걸 곰곰 보다가, 그 여백은 어쩌면 부른다는 행위를 통해 더는 비지 않고 이름들이 찰랑찰랑 흐를 때까지 부르라는 의미에서의 존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러한 문장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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