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리뷰: 여성, 귀신, 신뢰의 언어를 받아 적을 준비가 되셨나요?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해수 님의 글입니다.
영화 속 박인순의 당당한 ‘기세’는 어느 시야에 놓이는지에 따라 ‘세기’가 확장된다. 이를테면 인순의 진술을 듣고도 ‘앞뒤가 일관되지 않아 난감했다는’ 평은 그를 단번에 신뢰할 수 없는 화자로 위치시킨다. 이때 우리는 연결되는 유모차 신으로 낙차(落差)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유모차엔 인순의 생계를 위한 상자가 켜켜이 접혀있었다. 자갈이 보폭을 막아 잘 밀리지 않았다. 분명 인순은 나아가기 위해 계속 힘을 주고 있었다. 이때 유모차의 ‘정지’를 말의 엉킴으로 치환하여 보자. 문장이 턱에 걸린 것 같아도 원인을 발견하면, 그럼에도 그 길목을 감수한 이유까지 들으려는 의지가 있다면, 결코 오독으로 기울지는 않을 터이다. 그러니 번복된다는 성질로 타자의 발화에 제동을 거는 건, 가장 배제해야 할 태도가 아닐까. 청자로 섰던 그들이 애초에 말의 유효를 그은 건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는 생각이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를 보며 들었다.
그렇다면 인순의 기세는 어디에서 상승하게 될까. 바로 귀신과 저승사자 앞에서이다. 뺏벌엔 여전히 인순의 동료인 기지촌 여성들이 떠돌고 있었다. 이름을 부여받지 못해 저승으로도 ‘호명’될 수 없던 혼. 그들이 꿀렁거리며 외친 욕과 웃음 그리고 울음. 그 소리는 다수에게 문을 잠그는 행위로 거부되었다. 인순을 쉽게 결론지었던 이와 일행이던 작가도 그들을 소재로써 선점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막상 파자마를 두른 귀신과 대면하자 잔디의 거스러미를 뜯어가며 도망간다. 유일하게 인순만 ‘꽃분이’의 (영화 속 석 자가 존재하지 않는 여성 귀신에게 임의로 붙여진 칭호) 욕을 버티고, 고구마의 껍질을 까 손에 넣어주며 출입을 허가한다.
뺏벌은 ‘귀신’을 제외하고 설명될 수 없음에도, 꾸준히 제외된다. 그들이 세계 내에서 기록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가지며 보고 있었는데 그 지점에서 저승사자가 전면에 나온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측면으로 우회하는데, 이 연속이 무척 재미있었다. “명부가 없으니 이야기를 만들어줘야 데리고 갈 수 있습니다.” 세 명의 저승사자는 일렬로 앉아 인순에게 이런저런 사연을 기워넣으려 하지만 번번이 탈락된다. 그때 인순이 본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저승사자가 있는 옆에 착석한다. 늘 ‘본인이 강해서 살아남았다고’ 믿은 인순이기에, 죽음을 가까이 두고도 화장을 수정하며 태연한 자세를 보인다. 오히려 긴장하는 건 저승사자의 몫이었다. 그들은 이어 ‘믿음’의 문제에 관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사람들이 믿으면 이야기가 되고, 그때부터 자연스레 증거들이 만들어진다.”
“그럼 사실이 되는 거야?”
“저 여자를 봐라. 이 마을에서 우리를 믿는 건 저 여자뿐이다.”
결국 믿음은 수에 따라, 믿는 당사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분명한 실체가 있음에도 의심의 영역에 잔류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순은 반복되는 지루한 이야기가 참을 수 없었다’는 내레이션 후, 미군의 목을 서걱서걱 자르는 장면에서는 통쾌함을 느끼게 되었다. 모두가 인순의 이야기를 재조립하기에 몰두하고 있을 때, 인순은 희생이 반복되는 이야기에서 타자를 꺼내어줌으로써 이야기를 새로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맥락에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보여주는 인순이란 인물의 다면성은 무척 유의미하다고 느꼈다. 나 역시 창작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이야기’ 안에 꼭 서 있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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