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가족 베일이 걷힐 때
〈가족의 탄생〉, 〈어느 가족〉, 〈우리집〉을 중심으로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정연 님의 글입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부부와 같이 혼인으로 맺어지거나, 부모-자식과 같이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집단 또는 그 구성원’을 말한다. 오늘날 가족은 한부모 가정, 재혼 가정, 별거 가정, 맞벌이 부부, 무(無)자녀 부부, 동성 부부, 독신 등 가족의 구성과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여전히 혈연을 바탕으로 한 부계 혈통의 직계 가족을 그 범위로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파생된 ‘부모’와 미혼의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 정상가족으로 정형화되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정상으로 일컬어지는 가족 형태를 제외한 다양한 다른 가족 형태를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위험을 지닌다. 영화 〈가족의 탄생〉과 〈어느 가족〉 그리고 〈우리집〉은 경계를 구분하고 규격화된 정상에 벗어난 것을 비정상으로 배제하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폭로한다. 세 편의 영화를 중심으로 ‘정상가족 베일이 걷힐 때’를 포착해보자.
영화 〈가족의 탄생〉 엔딩 장면을 먼저 보자. 기차역에서 ‘주어진’ 가족 구성원들과 ‘만들어진’ 가족 구성원들, 그리고 아무 연고 없는 인물들이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원초의 상태에 놓인 인물들은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잠재한다.
〈가족의 탄생〉은 3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의 현 시점에서 경석은 고향으로 향하는 연인 채현과 함께한다. 경석의 질투로 사랑 싸움을 치른 후다. 화해가 이루어지는 곳은 채현의 고향집인데, 그곳에서 경석은 채현의 가족을 만난다. 채현의 가족 이야기는 영화 첫 번째 에피소드에 담겨있다. 5년 만에 누나 미라를 찾아온 형철은 무신이라는 큰 나이차의 연상의 여자를 소개한다. 게다가 무신의 전 남편의 전 부인의 딸(채현)까지. 이들의 기묘한 동거 생활이 시작된다. 이 상황을 초래한 형철은 “책임지겠다”는 공허한 말만 내뱉고 사라진다.
15년이 흐른 후, 미라와 무신과 채현이 구성한 새로운 가족 형태가 경석의 눈에 들어온다. 경석의 시선을 빌려 이 장면을 지켜보는 관객들 역시 낯섦을 느낀다. 이 가족은 아버지라 일컬어질 사람이 없으며 그 누구도 혈연관계로 이어지지 않았다. ‘두 명의 엄마’와 ‘딸’이 있을 뿐. 미라와 무신은 시누이와 올케 사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형철과 무신이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인 관계가 없다. 채현은 두 사람 모두를 ‘엄마’라고 부른다. ‘엄마들’이라는 아직 한국 사회에서 낯선 단어. 아버지의 공석을 남겨둔 채 비혈연으로 이루어진 여성들을 중심으로 공백이 메워진다.
영화는 가부장제가 뿌리 깊게 박힌 한국사회의 가족에 반문한다. 아버지가 한 가정의 가장이고, 아버지의 부재 시 큰아들이 가장이 된다는 논리는 이 영화에서 유효하지 않다. 영화 속 ‘아버지’는 집과 가정을 책임지는 주체가 아니라 갑자기 나타났다 말없이 사라지는 존재이다. 형철은 20년 만에 미현이라는 여성을 데리고 다시 미라 앞에 나타나지만, 이번에 미라는 형철을 내쫓는다. 무책임한 남성으로부터 남겨진 여성들은 주체적으로 새로운 가족을 구성한다. 〈가족의 탄생〉은 ‘우리집’을 탄생시키는, 그리고 집을 지키는 주체가 여성이 될 수 있을 제시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의 원제는 ‘훔친 가족(万引き家族)’이다. 하츠에 할머니가 받는 죽은 남편의 연금이 이 가족의 주된 수입이다. 어머니 위치의 노부요는 일을 하지만, 회사의 퇴사 압박으로 일을 그만두게 된다. 여성청소년 아키는 성매매를 통해 돈을 벌고, 아버지 위치의 오사무는 어린 남자아이 쇼타와 마트에서 물건을 훔친다. 그들은 전형적인 일본 가옥에서 가족처럼 생활한다. 식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는다. 사회는 그들을 ‘만비키(万引き)[1]’ 가족이라 명명하겠지만, 그들은 ‘어떤’이라 정의할 수 없는 가족이다.
쇼타와 유리는 ‘만비키 가족’의 균열을 체현하는 인물로서 괄목할 만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이미 형성되어 있는 하츠에, 노부요, 오사무, 아키, 그리고 쇼타로 구성된 가족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가족이 되었는지 상세한 과정을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의 대사를 통해 짐작할 뿐. 하지만 우연히 길에서 떨고 있는 유리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와 가족처럼 함께 살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영화 바깥에 존재하는 가족의 탄생을 유추할 수 있다. 유리를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며 하츠에와 노부요가 주고받는 대사는 인상적이다.
“선택받은 건가, 우리가?”
“보통은 부모를 선택할 순 없으니까.”
“근데 스스로 선택하는 쪽이 더 강하지 않을까?”
“뭐가 강해?”
“유대… 정 같은 거.”
해변가를 걸으며 마음 다해 주워 담은 돌이 소중하듯, ‘선택한’ 가족은 ‘주어진’ 가족과는 다른 결로 깊고 진한 유대와 정을 공유한다.
한편 ‘만비키 가족’의 윤리 의식은 끊임없기 환기된다. 오사무는 쇼타에게 가게가 망하지 않을 만큼 털면 된다며 도둑질을 가르친다. 훔친 음식은 온 가족이 나눠 먹는다. 윤리성에 대한 의문이 절정에 달하는 부분은 하츠에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녀의 연금을 계속 받아 생활하기 위해 그녀를 몰래 매장하는 대목이다. 오사무에서 쇼타, 그리고 유리에게로 대물림되는 도둑질을 끊기 위해 쇼타는 경찰에게 잡히는 선택을 하고, ‘만비키 가족’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쇼타가 일으킨 균열은 이들의 비윤리성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결코 그들을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내지 않았다. 가족을 윤리적으로 재단하는 것을 유보하고, 판단에 앞서 바라보는 태도를 권한다. 이들의 비윤리성은 경제적 원인에서 기인하며 개인의 윤리성에 앞서 사회의 윤리성이 작용한다.
사회는 그들이 아버지 혹은 어머니로 불리지 못한다고 확언한다. 하지만 오사무를 뒤로 한 채 버스를 타고 떠나는 쇼타는 뒤를 돌아보며 “아빠”라고 소리 없이 오사무를 부른다. 무더운 어느 여름, 문지방에 모여 불꽃놀이를 구경하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는 가족들. 폭죽 소리만 들리고 정작 불꽃은 보이지 않지만, 오사무는 소리를 보라고 말한다. 하츠에 할머니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바다에서 뛰어노는 가족들에게 “다들 고마웠어.”라고 소리 없이 말한다.
영화는 소리 없는 말에 주목한다. ‘만비키 가족’의 소리에 끝끝내 귀 기울이지 않던 사회는 어린 소년 쇼타의 경찰 대치극에 이르러서야 그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여전히 사회는 ‘만비키 가족’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 그들이 훔친 것들. 소리 낼 수 없는 소리를 보고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보이는 어느 가족들. 우린 그들의 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
때론 아이들의 꿰뚫는 힘이 강력하게 작동한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진행된다. 이 낮은 눈높이는 상반된 효과를 자아낸다.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은 순수하고 귀여워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것들도 거대하고 압도적이다. 엄마와 아빠의 계속되는 싸움이 걱정스러운 하나. 잦은 이사로 친한 친구가 없어 외로운 유미, 유진 자매. 하나와 유미는 각각의 악당에 맞서 ‘우리집’을 지키려 직접 나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노력은 별 소득이 없다. 가족 문제는 아이들의 손을 떠난 일이다.
아무도 없는, 파도만 치는 해변을 마주한 아이들은 절망감에 정성스럽게 쌓아 만든 상자집을 부순다. “이게 뭔데. 이 쓸모도 없는 걸 왜 만들어가지고, 진짜.” 발로 차고 밟아버린다. 격정적이었던 순간은 가라앉고 아이들은 이내 누군가 남겨둔 텐트를 발견한다. 그곳에서 즐거운 하룻밤을 보낸다. ‘우리’라는 틀에서 벗어나 환상의 공간에서 잠시동안이지만 그들 만의 우리를 만들어낸다.
결국 아이들은 ‘우리집’을 지켜내지 못했다. 우리집을 이루는 상자는 빠질 수도, 그래서 무너질 수도, 때론 빠진 상자가 다른 상자를 만날 수도, 어쩌면 다른 상자가 중간에 끼어들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가 예상했던 우리집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가족의 해체가 아닌 가족의 다양성이라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래도 언니는 우리 언니 해 줄 거지?”라는 유미의 물음에 “그럼, 난 니네 언니 할 거야”라는 하나의 답처럼.
[1] [편집자주] 원제에 사용된 단어 ‘万引き’를 한국어로 음독하면 ‘만비키’가 된다. ‘좀도둑’이라는 명사로도 사용되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훔친다’는 능동적 의미 외에도 이중적인 의미를 담기를 원했기에 ‘훔친 가족’이 아닌 ‘만비키 가족’이라고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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