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넓게 공명하는 그만의 감수성
〈로그 인 벨지움〉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1년 12월 4일(토) 오후 1시 상영 후
참석 유태오 감독
진행 김현민 영화저널리스트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정연 님의 글입니다.
'태오, 너는 누구니?' 답이 없는 질문은 고통스럽게도 자신을 극한으로 몬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타인이 날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는 시도되는 카테고리화. 하지만 락다운으로 모든 사회 관계망에 끊긴 상황에서 그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정성껏 쌓아 올린 돌탑이 작은 돌 하나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처럼. 내가 나를 규정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짜 나'이지 않을까?
우리는 비난을 받을 두려움, 판단을 받을 두려움에 놓여있다. 고립된 태오, 가끔 태오를 찾아 불쑥 나타나는 신(God)태오, 그림자로 표현된 과거의 태오. 그들은 근원적인 외로움과 두려움, 자유를 향한 갈망 그리고 삶과 존재의 의미에 관해 한국어, 영어, 독일어로 대화하며 내면을 드러낸다.
영화는 유태오만의 감수성으로 채워진다. 그의 멜랑꼴리는 모두가 간직하고 있는 멜랑꼴리와 공명한다. 마지막 장면, 신태오가 태오를 향해 말한다. "약해지거나 외롭거나 두려워질 때 네 안의 누군가가 너를 지켜줄 거야, 나처럼."
김현민 영화저널리스트(이하 김현민):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가 아주 생생한데요. 완성되지 않았던, 한국 촬영 부분이 거의 다듬어지지 않았던 편집본으로 처음 봤었는데, 저는 그 날것의 느낌이 신선하고 좋았던 기억이 나요. 이렇게 정식 개봉을 하고 관객들을 만날 거라고는 계획을 하고 찍은 영화가 아니잖아요. 요즘 소감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유태오 감독(이하 유태오): 일단 신기하고 그냥 고마워요. 어떤 시스템 안에서 무언가를 완성시켜야 한다는 목적보다는 오롯이 소통하려는 목적에서 실행한 작품이기 때문에 진솔함이 통하는구나, 그런 보람을 느꼈죠. 많이 고마워요.
김현민: 어떤 분들께 제일 고마워요?
유태오: 일단은 옆에 계신 니키에게 고맙고. 주변 지인분들, 현민 씨도 그렇지만 배급사인 엣나인필름 주희 이사님께도 보여드렸는데요. 사실 엣나인필름의 힘으로 이 영화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내가 나를 솔직하게 바라봐야 하고, 개인적으로 주관적으로 느끼는 감수성을 통해 소통해야 한다는 숙제를 같이 풀어주신 분들. 그리고 이 영화는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누구한테 보여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공개되면 음악 저작권을 처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김현민: 저도 처음에 봤을 때 ‘음악 판권을 어떻게 다 해결하려고 하지?’했어요.
유태오: 그러니까요. 인디음악부터 독일에서 상업적으로 굉장히 유명한 곡까지 판권을 얻기 쉬운 곡들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다 저작권을 풀어주셨고, 제가 원했던 감수성과 저의 비전을 순수하게 전달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셔서 너무 고맙죠.
김현민: 이 영화는 제작비보다는 후반 작업비가 훨씬 많이 들어간 영화로 기록되겠네요.(웃음) 작년 봄쯤 촬영된 작품이고 한국으로 들고 오면서 한동안은 꺼내 보지 않았다고 들었거든요. 굉장히 진솔하게 자신의 상황을 거의 토해내듯이 뱉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촬영본들은 자기객관화나 거리두기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그 과정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어요.
유태오: 일단 촬영하는 과정에서 노트 한 장 정도의 줄거리를 적었어요. 내가 나랑 대화했을 때, 대화가 편집점 안에서 어긋나면 안 되니까 대충 한 문장의 앞과 뒤만 키워드로 잡았고, 거기에 내가 대답을 해야 한다는 상상을 하면서 이어간 건데요. 대충 구조만 써서 한 거지 시나리오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로지 내 뇌 속에 있었던 감정을 전달하는 식으로 계속 찍은 거예요. 여기서부터 씬이 시작하면 이렇게 끝날 수도 있고, 그 다음 트랜지션을 다 상상만 하면서 찍었거든요. 그리고 만에 하나 연결이 껄끄러워질 수 있으니 많이 찍자. 진짜 많이 찍었어요.
김현민: 인서트로 쓸 수 있으니까.
유태오: 네, 인서트로 쓸 수 있으니까. 거리를 이동하면서 진짜 많이 찍었고, 그러면서 겁이 났었죠. 이 커다란 덩치를 집중하면서 다 봐야 하는데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오랫동안 고여 있던 상태에서 벗어났는데 신나게 놀면서 해소하고 싶지 다시 그 상태로 돌아가려니 두려움이 있었던 거죠.
김현민: 막상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촬영본을 보니까 기분이 어떻던가요?
유태오: 음, 그래도 상상만큼 했네?(웃음)
김현민: ‘잘 했네?’ 그런 느낌인가요? 예전에 집에서 이 영화를 볼 때는 TV가 아무리 크더라도 완벽하게 빛이 차단되었거나 사운드가 최적화된 그런 공간은 아니잖아요. 극장에서 큰 스크린으로 이 영화를 관객들과 함께 보다 보니까 굉장히 새롭게 느껴지더라고요. 감독님도 본인이 계속 편집실에서 편집하면서 보다가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유태오: 카타르시스가 느껴졌죠. 편집실에서도 후반 작업을 하면서 많이 배웠는데, 전하고 싶었던 흐름과 감수성 안에서 여러 가지 기술을 덧붙여서 더 명확하게 무언가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많이 배웠죠. 색 보정부터 사운드까지. 사운드 후반 작업하시는 기사님의 노하우에 제 감수성만 전달하면서 좋은 조언들을 받았죠.
김현민: 편집을 직접 하셨지만, 또 편집을 같이 해주시는 감독님이 계시잖아요, 편집 기사님. 내가 촬영부터 구성까지 모든 걸 한 작품이잖아요. 오히려 제3자가 봤을 때 더 좋은 거리나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하는데요.
유태오: 그렇죠. 혼자서 단독적으로 찍었지만, 필름이라는 매체 자체가 팀워크이거든요. 극장까지 걸으려면 무조건 팀이 함께 하는 일이니까 많은 뇌가 의견을 내야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이제 얘가 내 자식이 아니고 모두의 자식이 돼 버린 거죠. 그런데 좋은 의미로.
김현민: 저도 작품을 모니터링을 하거나 의견을 줄 때가 있는 직업이잖아요. 창작자에게 의견을 드린다는 게 엄청 조심스러운 일이거든요. 그런데 태오 감독님은 의견들을 굉장히 편안하고 유연하게 받아들여준다, 별로 곤란해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건 단련된 건가요?
유태오: 네, 니키는 비판을 효율적으로 해주는 사람이고. 제가 발전하기 위해서 옆에서 조언을 해주는데 자존심만 내세울 게 아닌 거 같아요. 제가 생각했던 감수성 안에서 내 의견보다 좋으면 그것을 선택하는 것도 감독으로서 제가 하는 거잖아요. 물론 제 아이디어는 아닐 지라도 어떻게 보면 나의 책임이니까. 그래서 많은 의견을 듣는 건 항상 좋은 것 같아요.
김현민: 생각하는 이미지나 정서를 시각화하고 구체적인 결과물로 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저는 제작사 ‘테오닉 모’에 어울리는 또 다른 작품들, 꼭 영화가 아닐 수도 있겠죠? 그런 작품들이 기대가 돼요.
유태오: 감사합니다. 근데 사실 회사를 만들고 로고까지 만들면 브랜드가 되고 그에 관한 정체성이 생기잖아요. 예를 들어 미국 영화사, A24로고가 딱 나오면 어떤 기대되는 영화가 있잖아요. PLAN B는 아주 투박하고, 그런데 로고가 뜨면 이런 영화들이 나올 거라는 기대감 그리고 신뢰가 있죠. 그런 이야기도 미리 했어요. 만약 우리가 미래에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 생각에서 출발을 한 거 같아요. 영화의 스토리텔링도, 광고도, 예고편도 어떻게 보면 브랜드 콘텐츠로 시작하는 거니까요. 거기서부터 많은 고민을 했었던 거 같아요.
김현민: 뭔가 되게 설레게 만드는 그런 필름이었습니다. 오직 아이폰으로만 촬영을 한 영화잖아요.
유태오: 아니요. 갤럭시.(웃음)
김현민: 갤럭시요? 그럼 갤럭시 핸드폰의 촬영 기능에 대해서 이제 다 아시겠네요?
유태오: 그렇진 않아요. 그때그때 갖고 놀았던 몇 기능만 알지. 또 너무 많이 공부해야 하는 과정으로 들어가면 식상해서 하기 싫거든요. 편리한 걸 좋아해요. 그래서 하이퍼랩스 기능을 많이 썼고. 그런데 그런 위험성은 있었던 거 같아요. 핸드폰으로 찍으면 대부분 편리성을 위해서 핸드헬드로 찍거든요. 그런데 저는 영화적인 구도를 원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삼각대에 세워놓고, 컷이 넘어갈 때에도 제일 보수적인 스타일로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야 조금 더 영화 같기도 하고, 저도 스스로 조금 더 노력을 하게 되고.
김현민: 저도 영화를 보면서 ‘역시 유태오는 뭘 해도 제대로 하는구나. 허투루 하지 않네.’라고 생각을 한 게 방금 딱 말씀하셨던 부분이에요. 화면 전환이나 컷의 연결이 너무 익숙해서 지나가게 되는 씬들이 있어요. 가령 호텔에서 나가면서 마트로 가는 장면 있죠. 그런데 그 장면 보시면 세 번 끊어서 찍었잖아요. 그렇게 연출하기 위해선 끊고, 다시 가서 삼각대 세우고, 다시 걷고, 이 과정을 계속했다는 거잖아요.
유태오: 맞아요. 제 현실을 한 번 재연한 거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에 유일하게 핸드 헬드를 썼잖아요. 처음 세상으로 나간다는 그 설렘을 주려고 그렇게 가다가 끊고 다시 고정하기 시작한 거죠. 그 구도가 다 머릿속에 잡혀있었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여기 핸드폰을 두고 내가 그 앞을 지나가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또 핸드폰 두고 걸어나가면 누가 가져갈 수도 있어서 불안하고. 산에서 제가 저렇게 빠르게 운동하진 않거든요. 누가 가지고 갈까 봐 빨리 뛰어올라 갔다가 뛰어내려온 거예요.
김현민: 그 다급함이 느껴지더라고요. 근데 사람들이 또 얼마나 이상하게 봤겠어요.(웃음) 그런 걸 보면 ‘천상 배우구나.’ 싶은 게, 보통 사람들이 고립되어서 이 시간을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1인칭 시점으로 찍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태오님은 제3자의 관점에서 자신을 피사체로서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유태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힐 때 제 몸을 그냥 매체로 보게 되거든요. 마리오네트라고 할까? 가끔 혼돈이 있을 때가 있지만.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하죠.
김현민: 이 영화는 촬영기기도 한정되어 있고, 주인공도 본인이고. 혼자 모든 것을 조율하다 보니까 그 안에서 변주를 위해 노력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앵글의 변주라든가 프레임의 변주라든가. 호텔방 안에서도 다양한 시각으로 담아내는 흔적들이 보였는데요. 저는 그 소나무 트랜지션 부분이 참 좋았는데요. 감독님은 어떤 장면들이, 어떤 연결들이 탁월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유태오: 예를 들어 오디션 씬을 찍을 때, 저 태오가 저보다 뭔가 조금 더 거대하고 위협적으로 느껴지도록 했어요. 조금 더 갑의 위치, 그런 느낌을 주려고 했고. 실제로 제 눈높이에서부터 시작해요. 저 태오를 찍을 때는 카메라를 눈보다 살짝 아래에 두고, 저를 찍을 때는 눈보다 살짝 위에 두었어요. 미세한 차이잖아요. 그래도 다른 한 사람은 올려다보고 한 사람은 내려다보는건데, 그 미세한 차이가 보는 사람의 감정을 건들거든요. 미세하게 무의식적으로 느껴지는 거죠. 이 사람이 조금 더 위축되어 있고, 저 사람은 이 사람을 리드해주는구나. 그리고 소나무 트랜지션은 우리 집에서 우희하고 제훈이랑 놀다가 집에 있는 소나무와 가장 비슷한 소나무를 지도 앱에서 찾았어요. 로케이션 헌팅을 집에서 네이버 지도로 했어요. 로드뷰가 있잖아요. 그래서 관악산을 찾았고. 관악산 꼭대기에 있는데, 트랜지션을 위해서 일단 가야 하잖아요. 정상에 올라가서 그 장면을 찍고 편집으로 계속 산을 올라가는 장면을 그 뒤에 붙인 거죠. 우리 영화의 기승전을 위해서. 그런데 괜찮았던 거 같아요.(웃음)
김현민: 감독들은 또 그렇게 하고 나서 편집실에서 ‘오, 괜찮은데?’, 오, 좀 천잰데?’ 이렇게 생각하기도 하죠. 방금 두 명의 태오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저는 그게 정말 흥미로웠거든요. ‘신태오’라고 부르시던데.
유태오: 노트에 ‘신태오’라고 적었어요. 신 같은 존재다.
김현민: 'God'의 신(神)인 거죠?
유태오: 네. 그리고 마지막 이미지도 〈베를린 천사의 시〉 오마주잖아요. 혼자서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이 씬을 거의 마지막에 찍었어요. 제가 계속 앤트워프를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로케이션을 탐색했어요. 어떤 건물 옥상에 가고 싶은데 갈 수가 없는 곳이라서, 몰래 문이 어디인지도 보고 어떻게 올라갈 수 있는지 보고, 일주일동안 방법을 찾으려고 밤을 샌 거 같아요. 그런데 결국은 호텔에서 했어요. 그런데 질문이 뭐였죠?
김현민: 질문을 딱히 안했어요.(웃음) 신태오라고 부르시는데. 아까 눈높이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이 높이도 높이인데 뭔가 계속 현실의 태오가 수세에 몰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연기를 그렇게 하셨고. 신인 태오가 짓궂고 날카롭게 파고드는 연기를 하신 거 같고 몸짓도 커 보였고요. 왜 그런 느낌을 받았을까 계속 생각을 해보니까, 신태오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어서 그런 거 같아요. 이 사람은 계속 질문을 받고, 응수하면서 대답해야 하고, 그것도 쉽지 않은 질문에요. 저는 태오가 질문 공세를 받으면서 약간 움츠러들기도 하고 어떨 때는 겁에 질린 거 같기도 하면서 그 안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솔직한 이야기를 뭉뚱그리지 않고 펼쳐 놓을까?’ 고민하는 모습들이 되게 감격적이었던 것 같아요.
여러분들의 감상과 질문을 읽어볼게요. ‘혼자서 어떻게 촬영하시고 카메라 설치하셨는지 궁금해요.’ 이건 아까 좀 이야기를 했는데요. 혹시 더 얘기하고 싶으신 부분들이 있을까요?
유태오: 딱히 없어요. 카메라 설치를 해놓고 감으로 한 번 찍어보고 돌아와서 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세팅을 하거나 연기를 바꾸거나 하면서, 혼자서 계속 연출하면서 한 거죠.
김현민: 우리가 이렇게 쓱 보는 장면 하나하나가 엄청난 공이 들어가 있는 장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혼자 한다는 일이 이렇게 힘든 거 같아요. 만약에 누군가 함께 있다면 모니터링을 해줄 수 있는데. 혼자 앵글을 맞춰야 하니까요.
유태오: 근데 할 때는 힘든 게 하나도 안 느껴져요.
김현민: 재밌죠?
유태오: 네! 너무 만족하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사람들이 더 보고 싶다고 하니까 한국까지 와서 더 찍을 수 있고. 혼자 벨기에에 있을 땐, 행복하기보다는 더 이상 불안하지 않구나, 했죠. 뭔가 할 일이 있으니까 이상해지지 않는구나! 이런 마음으로 간 거죠.
김현민: 그게 참 좋은 거 같아요. 용기내어 내 작업을 꺼내 놓으면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잖아요.
유태오: 그렇죠. 고립된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한다면 용기를 내야 하는데, 만약 내가 내일 죽는다고 상상하면 하나도 겁나지 않아요. ‘와, 이거 안 찍으면 큰일 나겠다!’, ‘안 찍으면 사람들에게 내가 그냥 잊어버려지는 존재가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니까 힘들지 않았고 고민도 없었고 그냥 막 찍었던 거 같아요.
김현민: 팬데믹 시대에 볼 수 있는 최선의 생존법이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많은 클래식 중에 오프닝 곡을 ‘라 캄파넬라’로 지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유태오: 제가 어렸을 때부터 항상 ‘라 캄파넬라’를 좋아했었는데 예브게니 키신이라는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있어요. 그 피아니스트가 런던의 큰 공연장에서 혼자 사람들을 압도하는 태도. ‘너희들은 지금 내 공간에 와 있고 즐겨라.’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라 캄파넬라’를 치기 시작하는데요. 20대 중후반의 나이에, 내가 그 나이일 때를 생각하면 난 진짜 아무것도 아니고 코찔찔이었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싶었어요. 그 곡에 빠져서 여러 피아니스트들의 해석을 듣다 보니까 살짝 설레고 시작하는 느낌도 있고, 뭔가 정신없기도 하고, 그런데 안정성도 있고, 멋있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거예요, 이 한 곡이. 래서 이 매력을 느꼈고. 제가 유튜브로 박지찬이라는 어린이가 이 곡을 치는 걸 봤는데. 이 드라이한, 굳이 해석이 되지 않은 느낌이 담백하게 잘 어울리더라고요. 너무 부드럽지도 않고 너무 파워풀하지도 않고. 그래서 이 곡을 쓰게 된 거죠.
김현민: 말씀하신 대로, 상황은 그렇지 않았지만 안정감을 주는, 안전하다는 느낌이 있는 오프닝이었던 거 같아요. 저도 이게 궁금했는데, “과거의 태오는 왜 그림자로 표현했을까요?”라고 물어보셨네요.
유태오: 많은 미술이나 영화 안에서 그림자를 상징적인 요소로, 자신의 뒷모습이나 과거로 쓰잖아요. 그래서 저도 단순한 이유였어요. 그런데 그게 너무 단순하니까 신태오가 비난을 하는 거죠. “바보야, 너무 뻔하다.”라고 독일말로. 사실 이것도 오마주인데,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오손 웰스 감독이 극영화를 많이 만드셨지만 에세이 형식의 영화가 딱 하나 있어요. 〈fake F(거짓말 F)〉라는 영화가 있는데, 그 안에서 그림자로 내레이션 하는 부분이 있어요.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딴 거죠.
김현민: 저는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거든요. 빠르게 지나가는 군중 사이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찍다가 사라지잖아요. 사라지고 나서 하늘에 비행기가 지나가고, 그 다음에 서울로 넘어가는데.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으로 연출하신 이유가 궁금하더라고요.
유태오: 제가 막 찍었다고 했잖아요. 우연히 해가 지나가고 있는데 경찰도 안 보였어요. 그래서 서있으니까 고맙게도 25분 안에 해가 지나가더라고요. 실루엣이 살짝 천사가 자기 날개를 접고 서 있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고, 그래서 장면 전환으로 사용하게 됐는데 원래는 제가 벨기에에 있을 때 그걸로 마무리하려고 했어요. 태오가 벨기에에서 코로나 걸려서 죽었다는 이야기로 만들려고 했던 거예요. 그런데 니키가 좋은 조언을 줬어요. ‘그런 식으로 편집하면 안 되고 그런 해석을 하면 안 된다. 그래야 재미있고 많은 사람들이 안 불편하게 느껴진다.’
김현민: 끝나고 죽어버리면 어떡합니까?
유태오: 원래 아이디어는 그 태오가 죽고, 서울로 넘어오면 제가 하얀 외투를 입고 차에 앉아 있잖아요. 그냥 까만 옷을 입고 있다가 옷을 벗고 하얀 옷으로 갈아입을까 했어요. 그렇게 찍었더라면, 어떤 한 부분의 태오를 벨기에에 놔두고 신태오가 이제 태오로서 한국에서 생활한다는 이야기가 되어 버리죠. 침대에 누워있는 태오를 마지막으로 보여주려고 했거든요. 가만히 심드렁하게 끝나게. 근데 그렇게 안 하길 잘 한 거 같아요.(웃음)
김현민: 이 질문도 궁금하네요. “가장 질려버린 음식 뭐가 있을까요?” 벨기에에 있었을 때.
유태오: 오트밀이요. 견과류와 오트밀. 나갈 수가 없으니까 한 번 마음먹고 나가서 장을 본 건데, 조리할 필요 없는 음식들을 사게 되고 그거를 며칠 동안 계속 먹은거죠.
김현민: 영화 보면서 태오가 팥을 사가지고 오길래 ‘뭐 하려는 걸까?’ 했는데요. 팥을 쒀서 앙버터를 만들다니! 정말 먹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유태오: 없으니까 그렇게 하게 되더라고요.
김현민: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이유가 있을까요?’라고 여쭤보는 분들이 계신데, 저도 이 영화에서 먹는 장면들이 인상적이라고 생각해요. 굉장히 일상적이고 본능적인 행위임과 동시에 제한된 상황에서 어떤 음식을 먹는지도 이 사람을 알 수 있는 부분이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유태오: 제 인생이 영화에 들어간 거예요. 단순해요. 제 인생을 제가 기록했기 때문에. 그래도 편집할 때에 일상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스토리 전개를 위해서 요리 장면을 넣는 게 맞는지 고민했는데요. 전 저를 칼같이 객관화하는 편이거든요. 근데 오트밀을 두 번 먹는 것을 보여주면 ‘일상이 되게 지루하고 이거 하나를 집요하게 먹는구나.’ 그런 게 느껴지잖아요. 그런 이유로 있었기 때문에 요리 장면들을 넣었고. 만두 만들 때도 신태오가 태오를 위해 만들어주는, 어떻게 보면 응원하고 보살펴주는 느낌을 주려고 한 거예요. 사실 만두를 빚으면서 카메라를 보면서 혼자 되게 중얼거린 게 많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조금 이상했어요. 그래서 그냥 혼자서 묵묵히 애쓰면서 만드는 것으로 편집한 거죠.
김현민: 우리가 처음에 볼 때에는 먹는 장면 자체에 압도당하다 보니까 안 보이지만, 사실 그런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쌓이면서 느껴지는 결들이 있거든요. 그런 점들이 저는 탁월했다는 생각이 들고. 크리스 버든의 ‘빔 드랍’을 이야기하시는 거 같은데, “철골구조가 떨어져서 바닥에 꽂히는 장면은 무슨 의미인가요?”라는 질문이에요. 런저런 인터뷰에서 굉장히 좋아하는 퍼포먼스 아트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는데 저는 그 무의식이 또 궁금하더라고요. 왜 저 작업을 좋아할까?
유태오: 글쎄요. 취향인 건데, 어떤 아티스트를 왜 좋아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가... 솔직히 딱 예술을 봤을 때의 감정이 있잖아요. 상징적으로 아티스트들이 잘 쓰는 재료, 흙과 시멘트, 하늘에서의 추락 같은 것들은 죽음과 삶에 대해 부각시키는 건데, 크리스 버든이 항상 그런 경계선에서 작업을 하거든요. 파워풀하고 동시에 너무 아름답고 더불어 순수한 그 천진함이 느껴져요. 그래서 크리스 버든을 너무 좋아해요. ‘빔 드랍’을 맨날 유튜브로만 봤는데 앤트워프 옆 미들하임이라는 동네에 설치미술 작품이 있는 거예요. 아직 벨기에가 락다운을 하지 않은 때였는데 뮤지엄에 가서 책도 사고, 괜찮다고 하셔서 올라타서 사진도 찍고. 저한테는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아티스트인데요. 제 기승전결에서 태오가 신처럼 혹은 천사처럼 느껴지려면 어떤 연결성이 필요하잖아요. 뭔가에 올라타서 하늘을 찍으면 날아다닌다는 상상을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이 작품이 적합하게 잘 맞았던 거 같아요.
김현민: 확실히 이 영화가 개인적인 필름이기 때문에 유태오에 대한, 유태오라는 사람에 대한 아카이빙이기도 해요. 굉장히 많은 레퍼런스들도 있고 목록도 확인하실 수 있기 때문에 찾아보시면 각자의 해석이 더해질 거 같아요. 질문 읽어드릴게요. “신태오와 대화할 때 ‘특권적인 고통’을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가 궁금합니다.”
유태오: 영어권에서 'privilege'라고 쓰는데요. 긍정적으로 표현할 수는 있지만, 부정적으로 많이 쓰게 돼요. 특히 미투(me too) 운동 이후 소수자에 대한 공평성을 미국 사회가 찾고 있거든요. 그 안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백인 30대 남성은 ‘privilege’가 많아서 소수자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사회적인 서열에 관한 의미 자체를 이 단어가 담고 있어요. 배우가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감히 네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나? 잘 먹고 잘 사고 잘 지내는데.’ 이런 식으로 제가 저를 비판한 거죠. 제가 저를 객관화한다는 증거를 남겨두고 싶어서 그 대사를 쓴 거예요. 나중에 그게 특권적인 고통으로 번역된 거죠.
김현민: ‘하지만 또 배우이기 때문에 사회에, 세상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이 있어.’라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끝나는데, 배우라는 업에 대해서 평소에 많이 생각을 하시는구나 싶었어요.
유태오: 네, 그렇죠. 본의 아니게 15년간 무명으로 활동하다가 갑자기 잘 되었는데, 객관화해서 다시 스토리텔링 측면으로 보자면 기나긴 노력 끝에 갑자기 빵 터지는 이야기는 우리가 다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어필하려는 것도 아니고, 오랫동안 힘들었기 때문에 지금 잘 되어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솔직한 제 마음이거든요. 감히 내가 이러고 있어도 되나?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고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예를 들자면, 지금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는데 남자 주인공으로서 작가님과 대화를 하면서 재미있는 부분을 만들어보고자 하거든요. 제가 그게 너무 미안한 거예요. 15년 동안 그러면 안 된다는 훈련이 되어있었는데, 연기자가 왜 그런 행위를 하고 있는지 무서운 거예요.
김현민: 월권을 행사하고 있다?
유태오: 네. 하지만 제 커리어가 잘 되면 제가 스스로 편해져야 하는 거죠. 뭐가 내 욕심이고 사치인지, 내 가치관 안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지. 고민이 너무 많고 감정이 많으니까 제 감정을 그렇게 넣게 된 거예요.
김현민: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오가고 또 그것을 자문자답하는 분이라서 대화 장면들이 매끄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궁금했던 질문인데요. “연출된 부분이 상당히 많은 다큐라고 느꼈는데, 왜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가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요즘에 극영화와 다큐의 경계가 굉장히 모호해지고 있고 서로가 서로를 넘나들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편의적으로 혹은 감독님의 의도로 다큐멘터리로 규정되었는데,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이 영화의 장르가 무엇일까 궁금했어요.
유태오: 저는 에세이 영화라고 생각해요. 단지 대중문화 안에서 편하게 어필하려면 쉽게 이해하는 게 좋으니까요. 카테고리에 집어넣어서 규정하는 습관이죠. 제일 쉽게 어필할 수 있는 키워드는 ‘다큐’ 혹은 ‘다큐 픽션’이었던 것 같아요. 마케팅 측면에서 사용하는 용어고, 일단 영화도 그 규정 안에서 실망스럽지 않게 정한 것이지만 에세이라는 카테고리가 제일 적합한 것 같아요. 대부분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에세이식으로 책을 써서, 자기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만 거기에 어떠한 상상적 요소를 넣어서 자신의 감수성과 역사를 전달하는데요. 단지 에세이 영화라고 어필하면 그런 규정이 영화 역사 안에서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갸우뚱하게 되고 어렵게 생각하실 수 있죠.
김현민: 정말 많은 질문들을 보내주셨어요. 시간 관계상 이렇게만 소개하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하고, 이 채팅방은 태오 감독님께서 다 보실 거예요. 그리고 이런 영화 만들어 주셔서 고맙다고 전해달라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유태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김현민: 영화 속에서 멜랑꼴리가 있는 디지털 영화가 없다는 볼멘소리를 하셨는데, 본인이 만드셨나요?
유태오: 사실은 그런 영화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대사로 이렇게 치면 ‘어, 그러네. 진짜 없네’ 이렇게 생각하게 되거든요. 어떻게 보면 보호망처럼 대사를 친 거 같아요.(웃음)
김현민: 공간 자체가 우리 기억의 덩어리라는 느낌이 들어요. 앤트워프는 어떤 공간, 어떤 장소로 기억되고 있나요?
유태오: 음, 제가 느낀 감정을 말씀드리자면. 러시아에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하고 비슷한 느낌인데요. 물론 벨기에는 프랑스 쪽이지만 백인 문화 속에서 멜랑꼴리한 도시들 중 하나인 거 같아요. 물론 저는 저의 색안경을 통해서 세상을 보게 되고 저의 상황에서 비롯된 자기연민에 빠져서 본 느낌도 없지 않아 있지만. 아무튼 저한테 그런 도시 같아요. 아름답고 너무 크지 않아서 자전거 타고 다니기에 너무나 적합하고. 그래도 세계적으로 봤을 때엔 자기 정체성이 확고하게 있는. 그리고 패션 캐피털로 불리는. 앤트워프에 패션학교가 있어서 그냥 눈이 즐거워요. 다니면서 많은 문화와 예술을 즐길 수 있고 건축도 너무 좋고.
김현민: 저는 태오님께서 평소 본인과의 거리두기가 잘 되고 웬만하면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평소에도 많이 받았는데, 방금 대답에서도 받았어요. 이렇게 고립되어서 특수한 경험이 있는 곳을 무대로 영화까지 만들었는데 그 도시를 되게 객관적으로 표현하지 않아요? 그래서 재미있다고 생각이 들었는데요. 오늘 긴 시간동안 이렇게 집중해서 경청해주신 관객분들께 인사를 드릴까요?
유태오: 지금까지 이렇게 남아주셔서 너무 고맙고요. 제 팬 여러분들께 고맙고. 처음 보는 분들도 여기 계시나요? 꽤 계시네요. 너무 감사하고 많은 입소문을 내주시면 좋겠고요. 저도 예술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지루한 것은 싫어서 적어도 최대한 재밌게 만들려고 했어요. 오늘 이렇게 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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