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수인의 새로운 챕터 인디돌잔치 〈야구소녀〉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1년 6월 29일(화) 오후 7시
참석 배우 이주영
진행 김현민 영화저널리스트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유진 님의 글입니다.
작년 6월, 프로를 꿈꾸는 고등학생 야구선수 ‘주수인’을 진솔하게 그려내 많은 사랑을 받았던 독립영화 〈야구소녀〉의 1주년을 맞아 인디돌잔치가 진행되었다. 객석은 오랜만에 만나는 이주영 배우와 김현민 기자를 반갑게 맞이하는 관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즐거웠던 그날의 기록을 전한다.
김현민 영화 저널리스트(이하 김현민): 안녕하세요, 오늘 사회를 맡은 김현민입니다. 날씨가 많이 궂은데도 표 취소가 없다고 들었어요. 너무 감사하고요. 이 자리의 주인공인 이주영 배우님 모셔보겠습니다.
이주영 배우(이하 이주영): 안녕하세요. 〈야구소녀〉에서 주수인 역을 맡은 배우 이주영입니다.
김현민: 오픈채팅방에 감상이나 질문 남겨주시면 저희가 답변해 드리도록 할게요. 주영 배우님, 이런 GV 자리가 오랜만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주영: 진짜 오랜만이에요. 그래서 저 지금 되게 어색해요.(웃음) 아마 작년 인디돌잔치 〈메기〉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요? 거의 11개월 만에 GV 하는 것 같아요.
김현민: 그때 제가 이 자리에서 진행을 봤는데, 구교환 배우님과 이옥섭 감독님과 셋이 GV를 한창 하고 있을 때 이주영 배우님이 깜짝 등장을 하셨죠.
이주영: 부르지도 않았는데...(웃음) 스케줄이 있어서 못 온다고 말씀드렸는데, 스케줄이 일찍 끝나서 ‘심심한데 가볼까?’ 하고 왔죠.
김현민: ‘심심한데?’ 정도의 마음이셨나요.(웃음)
이주영: 그럼 심심해서 오지 뭐...(웃음)
김현민: 그런 분 치고는 상당히 즐기는 모습이었어요.
이주영: 배우들은 관객 분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잖아요. 저는 GV 행사를 관객과 만나는 창구로 생각하는데, 지금도 오랜만에 뵙는 얼굴들이 많이 보여서 반갑네요.
김현민: 관객분들도 굉장히 반가우신 것 같아요. 다들 눈이 반달눈이 될 정도로 웃고 계시네요. 인디스페이스는 배우님에게 조금 남다른 공간이실 것 같아요. 인디돌잔치도 여러 번 하셨고, 여기 주영 배우님 이름이 새겨진 의자도 있잖아요.
이주영: 맞아요. 팬 분께서 제 나눔자리 좌석을 만들어 주셨죠. 첫 인디돌잔치는 〈춘몽〉으로 2017년도에 왔었던 것 같고, 〈메기〉 때 다시 왔을 거예요.
김현민: 그리고 주영 배우님 'Save Our Cinema' 캠페인도 함께 참여하셨죠. 캠페인 포스터에도 수인이 캐릭터가 귀엽게 웃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고요. 최근 인스타그램에 “주수인 보고 싶다”라고 올리셨더라고요. 주영 배우님에게 주수인은 각별한 캐릭터구나, 생각했어요.
이주영: 얼마 전에 방 청소를 하다가 〈야구소녀〉 찍을 당시에 캐릭터 분석했던 노트를 발견했어요. 그걸 살펴보는데 되게 아련해지더라고요. 주수인이라는 캐릭터는, 그때의 제가 좀 낯설면서도 마음이 많이 가는 인물인 것 같아요.
김현민: 주영 배우님이 이런저런 자리에서 주수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때 저는 어떤 느낌을 받았냐면, 배우 본인이 그 캐릭터가 굉장히 강하고 확신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해서 기대고 싶어 하는 느낌? 의지할 사람이 필요할 때 생각나는 존재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어요.
이주영: 맞아요. 많은 분들이 ‘배우 이주영’의 캐릭터를 강인하고 기댈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주시는 것 같은데 저는 스스로 나약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거든요. 그래서 〈야구소녀〉 촬영할 당시에도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수인이가 대단하게 느껴지고.
김현민: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모두가 반대하는 길을 가는 모습 때문인가요?
이주영: 네. 저는 누군가의 압력에 아주 약한 것 같거든요. 금방 흔들리고, 금방 쓰러질 것 같은데 수인이는 자기중심이 확실히 있잖아요. 그런 면에 있어서 저 아이는 아직 18살인데 정말 강하다, 저런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했어요.
김현민: 저는 그게 영화 주인공이라서 가능한 것 같아요. 서사의 주인공이라서.(웃음) 우리 모두가 나약하기 때문에 심지가 굳은 인물을 보고 싶다는 염원을 담아 주수인을 응원했던 거죠. 다들 아시겠지만, 일본에서도 〈야구소녀〉가 개봉했어요. 일본에서도 한국 독립영화가 굉장히 관심을 많이 받고 있는데 〈야구소녀〉 일본 프로모션이 정말 인상 깊었어요. 일본에는 실제로 여자 야구 프로 구단이 있잖아요. 그분들이 주수인을 응원하는 모습을 보는 게 감회가 새로웠어요.
이주영: 저도 봤어요. 주수인을 통해 응원을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들이더라고요. 그걸 보는데 눈물이 났어요, 제가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 편인데도. 제가 연기한 캐릭터를 보고 실제로 야구를 하고 있는 선수들이 응원을 받았다, 힘을 얻었다고 해주신 것이, 그리고 그분들이 "주수인 파이팅!"하고 외쳐주시는 것이 꼭 저한테 하는 말처럼 들렸어요. 저에게 주수인은 이미 지나간 캐릭터인데도 영상 속의 선수분들이 “주수인 멋있다” 같은 말씀을 해 주시는 걸 들으니 가슴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도 울컥하네요.
김현민: 조금 거창한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팬데믹 시대라 더 그런 감동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 모두가 고립되어 있고,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모두를 고독 속으로 빠지게끔 만드는데. 특히 이런 시기에 언어도 다른 나라에서 ‘주수인’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정말 마음이 전달되었다는 거잖아요. 그런 현상을 보면서 저도 이 영화는 참 좋은 영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또 이 영화에 대해 왓챠 코멘터리 작업을 하셨잖아요. 거기에서 모두가 아마 좋아하실 것 같은 오프닝 씬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어요. 주영 배우님이 오프닝 씬을 좋아하신다고. 그런데 감독님께서 원래는 그 장면이 오프닝이 아니었고, 중학생 주수인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장면을 담으려고 하셨대요. 그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연기하는 것도 좀 어려울 것 같고...” 이러셨어요.
이주영: 중학생 연기가 어려울 거라고 말씀하셨다는 건가요? 쳇.(웃음)
김현민: 네.(웃음) 솔직히 저도 고등학생까지는 아직 위화감이 없다고 느끼거든요. 그런데 중학생은 감독님도 차마 요구하실 수 없었던 모양이에요. 지금은 어때요? 10대 역할이 들어오면 소화하실 수 있나요?
이주영: 저는 뻔뻔하게 커버 가능합니다.
김현민: 위, 아래로 몇 살까지 커버 가능하신가요?
이주영: 아래로는 아직 고등학생까지는 할 수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고. 위로도 대여섯 살까지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김현민: 주영 배우님은 기본적으로 청량감 있고, 정의롭고, 젊은 청춘! 이런 이미지가 굉장히 강해서 충분히 어린 느낌을 낼 수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성숙한 이미지, 혹은 퇴폐적인 이미지에 대한 갈증이 있으신지 궁금하더라고요.
이주영: 제가 '타임즈'라는 드라마에서 ‘서정인’이라는 캐릭터를 맡았어요. 직업이 기자이고, 사회생활을 잘해나가는 전문직 역할인데, 그런 역을 맡다 보니까 제 스스로 좀 성숙해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나 봐요. 연기도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게끔 하고. 그랬더니 감독님께서 너는 그렇게 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억지로 성숙해 보이는 연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던 기억이 나요. 그 이후로는 나이에 대한 부담을 버리고 자연스럽게 연기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김현민: 이제 관객분들의 질문을 받아볼게요. 첫 번째 질문이네요. 〈야구소녀〉 1주년을 지나며 돌이켜봤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하세요.
이주영: 엔딩이요. 수인이가 깨끗한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고 구장을 둘러보는 엔딩. 사실 그 장면은 전체 촬영이 끝난 뒤, 보충 촬영 개념으로 3월 봄에 찍었어요. 그래서 머리도 좀 자랐고. 크랭크업한 기분으로 있다가 다시 찍은 거라서 촬영하면서 조금 위화감이 있지 않을까 우려했거든요. 추가 촬영이라 헤어, 메이크업도 새로운 분이 해 주셨는데 저는 그것까지도 좀 신경 쓰이는 거예요. 근데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 장면이 이전까지의 수인이와는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에, 뭐랄까요? 도와주세요, 기자님.(웃음)
김현민: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수인이가 좀 살기 편해졌구나 생각했어요.(웃음) 얼굴이 좋아졌더라고요.
이주영: 제가 봐도 그랬어요. 그리고 2월까지는 너무 추웠는데 날이 따뜻해져서 살기도 좋고. 촬영 끝나고 이것저것 많이 먹고. 마음 상태도 훨씬 편안하고. 그래서 좀 다르게 보이지 않았나 싶네요.
김현민: 그리고 저는 이 영화의 엔딩이 좋았던 게,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새로운 도전을 앞둔 수인이와 영화가 함께 기뻐해 준다는 점이었어요. 물론 수인은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현실의 벽에 부딪히겠지만, 그래도 영화의 엔딩만큼은 수인이 구장을 둘러보는 모습을 택했다는 점이 좋았어요.
이주영: 오픈채팅을 보니, 오늘이 6월 29일이잖아요. 수인이 생일도 6월 29일이래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아세요? 아, 수인이의 선수 정보가 적힌 문서에 생일이 6월 29일이라고 나와요? 그렇구나. 의미 있는 날이네요.
김현민: 수인이가 프로 계약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영화 속에는 소식을 듣는 어머니의 모습만 나와서 수인이의 반응이 궁금했다고 하시네요.
이주영: 그러네요. 기쁨도 잠시이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래요. 인생에서 바라는 게 있어도, 그게 막상 나에게 주어지면 그다지 기쁘지 않아요. 오히려 뭔가 바랄 때가 훨씬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느낌이 있거든요. 수인이도 어린 나이에 그걸 알았을 것 같아요.
저도 질문 읽어 볼게요. ‘저예산에 촉박한 일정으로 촬영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가장 테이크를 많이 갔던 씬이 있다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아, 이건 제가 몇 번 언급했던 이야기이기도 한데요. 슈퍼마켓 앞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씬을 촬영하면서 거의 아이스크림 스무 개가량을 먹었거든요. 근데 저는 계속 똑같이 먹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계속 테이크를 가시는 거예요. 거의 스무 테이크를. 저는 이유도 모르고 아이스크림을 계속 먹었는데, 어느 순간 오케이를 하셨죠.
김현민: 감독님께서 미묘한 차이를 보시고 스무 테이크까지 촬영을 하셨던 거군요. 저도 단편영화 한 편을 연출한 사람으로서 말씀을 드리자면(웃음) 풀샷일수록 눈에 보이는 게 너무 많아요. 배우의 연기만 만족스럽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미묘한 바람과 빛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서.
이주영: 한 가지 생각나는 디렉팅은, 아이스크림을 우걱우걱 먹어달라고 하셨던 거예요.
김현민: 그 장면은 아직까지도 임팩트 있고, 〈야구소녀〉 하면 떠오르는 장면 중 하나잖아요. 후반부에 배치되어 있는 만큼, 수인이가 지나온 날을 한 번 정리하고 새로운 챕터로 나아가기 전 어떤 결심을 하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이건 아까 나왔던 질문에 연결되는 질문인데요. 수인이가 프로 소식을 듣고 좋아하는 장면이 없는 건 삭제된 것인지 궁금하다고 하시네요.
이주영: 원래 없었어요. 〈야구소녀〉는 거의 시나리오대로 나온 영화예요.
김현민: 재미있는 포인트네요. 감독님께서는 수인이의 감정을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셨나봐요. 너무나도 목표가 확실한 인물이기 때문에. 또 다른 질문이 있는데요. ‘주영 배우님께서는 수인이 같은 딸이 있다면 응원해주실 것 같으신가요? 제가 부모라면 염혜란 배우님처럼 말릴 것 같아서요.’라고.
이주영: 아직 부모의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너무 딸의 입장이어서.(웃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말리지 않을 것 같아요. 수인이는 다른 이유로 이미 충분히 힘든데, 나라도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있을 것 같고. 그런 게 저의 성정인 것 같아요.
김현민: 주영 배우님도 하고자 하는 게 있다면 그냥 해보는 편이시라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 사실 주영 배우님은 최근에 신작 촬영이 끝났잖아요. 촬영을 마친 지 일주일도 안 됐다고 들었는데, 배우들은 영화 촬영이 끝나고 다 같이 인사하고 단체 사진도 찍고 모든 게 끝나면 되게 허탈한 감정이 든다고 들었어요. 다음 작품 고민도 되고. 복합적인 감정이 든다고 알고 있는데, 요즘 어떠신지 궁금해요.
이주영: 우선, 오랜만에 이렇게 나온 거고요.(웃음) 제가 원래 작품 하나 끝나면 여행을 가는 편인데 이번 영화는 촬영하면서 여행을 했어요.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촬영이 끝나니까 집에만 있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진짜 집에만 있었어요. 기자님 질문에 답을 드리자면, 2개월 반 정도 되는 기간 동안 매일 출근해서 무언가를 같이 공유하고, 같이 느끼고, 같이 만들다가, 갑자기 어느 날 그 모든 게 다 사라지는 거잖아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허탈감이 있긴 해요. 이번 촬영 역시 그랬고요. 그래서 지난 기억들을 곱씹으며 집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티그(반려견)랑 같이.
김현민: 관객분들께서 주영 배우님 요즘 집에서 뭐 하시는지 궁금해하시는 것 같네요.
이주영: 저는 요즘 완벽한 ‘집순이’가 되어가고 있어요. 최근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서 카페도 안 가고 있습니다. 맨날 커피 내려 마셔요. 그리고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매 끼니 이것저것 만들어 먹고 있어요.
김현민: 최윤태 감독님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의 연출 스타일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하시는 분이 계시네요. 이 자리에 안 계신 분들을 비교하는 게 조금 그렇지만...(웃음) 그래도 질문이 나왔으니 두 분 연출 스타일의 좋은 점을 각각 들어보고 싶어요. 특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분이기 때문에 함께한 작업이 어떤 경험이었는지 궁금하네요.
이주영: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의 신작 〈브로커〉를 촬영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언어와 관련된 부분인데요. 어쨌든 한국 배우들은 감독님께서 일어로 쓰신 대본을 번역된 형태로 받기 때문에, 감독님께서 일어로 표현하신 디테일한 지점들을 캐치하지 못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어요. 다행히 현장에 통번역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번역가분들과 감독님과 배우들이 소통하며 장면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어요. 저는 일어를 못하지만 일본어 대본도 읽어 봤어요. 도움을 받아서 일어 대본으로 공부를 했을 때 와닿는 뉘앙스가 있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다층적인 레이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사실 처음에는, 감독님은 한국어를 모르시는데 내 연기의 어떤 부분을 보고 오케이컷과 엔지컷을 가르는지 궁금했어요. 그런데 같이 작업을 해 나가다 보니까 그런 순간들이 생기더라고요. 연기를 한 뒤 제 스스로 ‘아, 이건 오케이다.’ 싶으면 감독님도 오케이를 주시고. ‘다시 가야 할 것 같은데?’하면 감독님도 이런 식으로 한 번 해 보자고 말씀해 주시고. 그렇게 합이 점점 맞아 갔어요. 처음에 우려했던 언어의 장벽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았죠. 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은 디렉팅이 굉장히 정확하세요. 배우에게 감정을 요구할 때 단순히 “더 슬프게 연기해 주세요”라고 디렉팅을 주시면 사실 배우 입장에서는 잘 와닿지가 않거든요. 그런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은 “이번에는 창 밖을 보고 연기해 볼까요?”라고 구체적인 디렉팅을 주세요. 그럼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전해질 때가 있어요. 그런 식으로 같이 만들어나가는 방식의 디렉팅을 해 주셔서 연기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재밌더라고요. 다른 배우분들과의 합도 좋았던 것 같고, 현장도 너무 즐거웠죠.
김현민: 최윤태 감독님 이야기는요?(웃음)
이주영: 지금 최윤태 감독님 얘기도 하려고 했어요! 〈브로커〉가 너무 최근의 기억이라 먼저 이야기해보았어요. 윤태 감독님과는 꽤 오래전에 작업해서. 감독님 역시 굉장히 디테일하세요. 시나리오 자체가 엄청 디테일했어요. 그래서 시나리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고, 배우와 같이 대본을 발전시키는 걸 좋아하세요. 오히려 촬영할 때는 배우에게 맡겨 주시는 타입이고요.
김현민: 저는 현장에 없었지만 제가 느낀 바도 같아요. 숏, 편집, 인물 구성도 그렇고, 개봉 후 행사에서 몇 번 마주칠 때도 느꼈는데 최윤태 감독님의 성정 자체가 굉장히 섬세하세요. 그래서 이런 결의 영화가 나올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주영 배우님은 참 좋은 감독님들을 많이 만나셨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모르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가 진행하는 ‘목요일 어떻습니까’라는 에세이 메일링 구독 서비스에 주영 배우님이 글을 한 편 쓰셨죠. 그런데 계속 쓸 것처럼 하다가, 안 쓸 것처럼 하다가 하셨어요. 편집자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의 작가님이신데요.(웃음) 관련된 질문이 들어와 소개해 드리자면, 배우님이 쓰신 글이 수인이와도 닮은 것 같다고 느껴지셨다고 해요. 예민함에 대해 쓰셨고, 제목은 「예민함의 덕목」인데요. 예민한 사람들을 사랑하겠다는 내용이에요. 저는 사실 처음 글을 읽으면서 조금 웃었어요. 평소에 저한테 예민하다고 되게 화를 내시거든요.(웃음)
이주영: 제가 또 언제 되게 화를 냈어요!(웃음) 마지막 회만 남지 않았나요? 다음 시즌도 계획 중이신지 궁금하네요.
김현민: 잘 모르겠어요. 주영 배우님도 글 써주신 뒤에 글 쓰는 사람의 고충을 알겠다고 해주셔서 조금 고맙더라고요.
이주영: 그걸 또 “조금” 고맙다고. 굳이.(웃음)
김현민: 이건 제가 궁금했던 부분인데요. 주영 배우님은 소위 말하는 ‘영화 덕후’, 시네필이시죠. 평소에도 영화를 많이 보러 다니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데 코로나 시대를 맞아서 우리 모두 극장에 잘 못 가고 있잖아요. 요즘은 어떤 식으로 영화를 보고 계신지 궁금해요.
이주영: 극장 가는 빈도수가 저도 확실히 줄었어요. 코로나 이전에는 못해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갔던 것 같은데. 최근에는 〈크루엘라〉라는 영화를 극장 가서 혼자 봤어요. 제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이유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다 같이 한 영화에 몰입하는 기분이 좋아서인데, 요즘은 극장에 가도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까 별로 재미있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집에서 OTT 서비스로 보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영화보다는 넷플릭스 시리즈 같은 걸 많이 보게 되는데,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만 저는 두 시간짜리 영화가 주는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죠.
김현민: 공감이 되는 게, 극장은 나 혼자 보는 게 아니라 다 같이 본다는 느낌을 주는 공간이잖아요. 이제 대부분 집에서 영화를 보니 점점 소중한 영화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이주영: 맞아요. 집에서는 뭘 먹으면서 보고, 무슨 일이 있으면 잠시 멈추고 그러잖아요. 그게 사소한 것 같아도 몰입을 크게 방해하더라고요. 사운드도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김현민: 그래서 좀 영화한테 미안하기도 해요. 아쉽죠. 관객분께서 영화제 크기가 점점 축소되는 것도 너무 아쉽다고 말씀하셨어요.
이주영: 맞아요. 배우 입장에서는 관객분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드니 그 부분도 많이 아쉬워요.
김현민: 배우한테 필요한 덕목을 오각형으로 나타내 본다고 하면, 주영 배우님이 생각하시기에 오각형의 꼭짓점들에는 어떤 덕목들이 있어야 하는 것 같나요? 이건 제가 예전에 한 번 물어본 적 있는 질문인데, 혹시 이 자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이주영: 지금 생각나는 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연기한다는 게 어렵잖아요. 하지만 경험이 없어도 스크린을 압도하는 배우들이 있거든요. 얼굴이 가진 특유의 힘으로. 저는 그런 배우들이 좋은 배우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연기는 경험할 기회가 많이 주어지고, 배우다 보면 점점 늘 수도 있는 영역인 것 같거든요. 그런데 얼굴의 느낌은 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독보적인 아우라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네요.
김현민: 그리고 체력도 중요하죠.
이주영: 체력 중요합니다. 체력은 특히 잠을 많이 자야 하는데, 전 올빼미형, 야행성 인간이라 그게 어렵더라고요. 새벽 촬영이 있는 날에는 항상 골골대요. 오전에 나가야 하는데 잠 못 자고, 간신히 한 20분 자고 나가면 기분이 너무 안 좋아요.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후회가 되고.
김현민: 촬영 전날 잠 잘 자는 감독들도 본 적이 없어요. 압박이 심하기 때문에.
이주영: 그래서 저는 밤 촬영을 좋아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날이 밤 촬영만 있는 날. 그럴 때는 아주 날아다니죠.(웃음)
김현민: 한 관객분이 ‘스크린을 압도하는 힘이 있는 배우님이 이주영 배우님이라는 걸 아시나요? 자기소개하시는 줄 알았어요.’라고 말씀해 주시네요. 혹시 그런 건가요?
이주영: 제 입으로 말하긴 조금 민망하지만... 저도 그런 편이지 않나.(웃음)
김현민: 저는 그런 것도 좀 궁금해요. 공부도 연기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이주영: 네. 무언가를 공부했을 때 나오는 연기는 다른 것 같거든요. 예를 들어 왕 역할을 하게 됐을 때 그 왕의 업적이나 일대기, 이런 정보들이 쌓였을 때의 연기는 당연히 다르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공부한 시간이 있으면 자신감이 생겨요.
김현민: 내가 이 캐릭터에 대해 이만큼 알고 있다, 하는?
이주영: 네. 그게 없으면 뭔가 공허한 분석을 한 느낌이거든요. 근데 그런 자신감이 있으면 카메라 앞에 섰을 때 좀 더 유연해져요.
김현민: 혹시 연출 생각이 있으신지 여쭤보시는 분도 계시네요. 저도 주영 배우님이 최근에 한가하다고 하시길래 그럼 이 시기에 시나리오를 써 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드렸잖아요. 어떤 마음이신지 궁금하네요.
이주영: 항상 연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본업에 치여 전혀 생각하지 못하다가 이번에 〈브로커〉 촬영이 끝나고 본의 아니게 시간이 주어졌어요. 시간이 없다는 건 차기작이 없다는 뜻인데.(웃음) 시간이 갑자기 많이 생긴 거예요. 빈둥거리는 것도 한계가 있고.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 이야기라도 생각을 해 보자, 하는 단계입니다.
김현민: 좋아요. 기대해 보겠습니다. 최근 '타임즈'라는 드라마에서 첫 주인공을 하셨어요. 저는 그 경험에 대해서도 궁금해요. 주인공이 되어 극을 이끌어가는 것에 대한 기분과 본인이 생각하는 연기나 위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주영: 오히려 '타임즈'를 찍을 때보다 요즘 많이 하는 생각인데요. 제가 몸담고 있는 업계는 보여지는 것과 성과가 중요한 곳이잖아요. 그래서인지 그런 말들을 자주 해요. “이제 주연 맡았으니까 잘 풀리겠네?”, “너 정도면 자리 잘 잡았으니까 이제 걱정 없겠네?” 그런데 그런 건 없어요. 오히려 그런 게 없기 때문에 불안하고 또 한편으로는 재밌기도 해요. 어느 정도의 위치까지 갔으면 계속 그 자리를 유지해야 하는, 그런 강박들이 쉬이 만들어질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에 마음을 다치기 쉬운 것 같다고 느껴요. 그래서 저는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요.
김현민: 주영 배우님은 그런 감정들을 어떻게 털어버리시는 것 같나요?
이주영: 저는 집안일이요. 단순노동이 감정을 정리하기에 좋은 것 같아요.
김현민: 청소할 때 오는,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그 감정이 내면의 평화에 정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이주영: 오늘 여기 오기 전에도 청소 3시간 했어요.(웃음)
김현민: 관객분께서 캐릭터를 고르는 기준은 무엇이냐고 질문해 주셨어요.
이주영: 시나리오를 읽고 해 볼 만한 인물이다 싶으면 도전하는 것 같아요.
김현민: 배우님은 시나리오 보실 때 전체적인 이야기와 캐릭터 중 어떤 것에 더 마음이 끌리시는 것 같아요?
이주영: 저는 전체적인 이야기요. 근데 거기에 캐릭터도 좋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김현민: 관객분께서 해볼 만한 캐릭터의 기준은 무엇이냐고 질문해 주셨어요.
이주영: 직관이 큰 것 같아요. 저는 감독님만큼이나 배우가 스스로 이 인물을 연기할 수 있을지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요즘은.
김현민: 그럼 하고 싶지 않은 캐릭터도 있는지 궁금하네요.
이주영: 하고 싶지 않은 캐릭터는, 자기 서사가 불충분한 캐릭터. 그리고 굳이 궁금하지 않은 캐릭터도요. 캐릭터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 뜬금없게 느껴지는 캐릭터는 별로 맡고 싶지 않죠.
김현민: 연극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지금도 이 생각이 있으세요?
이주영: 네. 연극은 항상 하고 싶어요. 연극 어떻게 하죠? 오디션을 봐야 하나. 몇 년째 제가 매체 연기만 하다 보니 무대 연기로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선배님들께 물어봐야겠어요. 저 좀 캐스팅해주세요.(웃음)
김현민: 이번 여름에 꼭 하고 싶으신 일 있으세요? 시나리오 탈고하기?
이주영: 그 정도로 의욕이 있지는 않아요.(웃음) 음… 별로 없는데요? 기자님은 있으세요?
김현민: 저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잘 해내고 싶죠. 영화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영화제를 잘 마무리하고 싶어요.
이주영: 틈새 홍보 한 번 하세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김현민: 해도 되나요?(웃음)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8월 26일부터 9월 1일까지 열립니다, 여러분. 제가 신중을 기하며 프로그램 기획한 작품들도 많으니 오셔서 꼭 봐주시면 좋겠어요.
이주영: 저도 가서 영화 볼게요. 티켓 주시나요?
김현민: 아, 티켓은 직접.(관객 웃음) 이제 슬슬 마무리를 해 볼까요? 오랜만에 이렇게 관객 분들을 만났는데,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눈으로 표정이 다 보이잖아요. 주영 배우님 오늘 어떠셨어요?
이주영: 너무 재밌었어요. 사실 오늘 오기 전에 걱정을 좀 했거든요. 어색할까봐.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정말 좋아해 주시는 기운을 받을 수 있었어요. 재밌게 수다 떨다 가는 기분이에요.
김현민: 오늘 오랜만에 관객분들과 이주영 배우님 만나는 자리여서, 비단 상영작 이야기만이 아닌 근황 이야기도 나눴는데 모두 좋은 시간 보내셨길 바라요. 밤이 늦었으니 여러분 모두 안전하게 귀가하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김현민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6월 29일. 수인이의 생일과 같은 날짜에 진행된 〈야구소녀〉 인디돌잔치는 시작부터 끝까지 즐겁고 유쾌했다. 본문에는 담지 못했지만, 행사가 저녁 늦게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오픈채팅방을 통해 오늘 여기서 자고 가겠다며 열렬한 애정을 전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영화 〈야구소녀〉가 앞으로도 많은 관객들의 애정과 응원과 함께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주수인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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