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루프탑〉 리뷰: 청경채도 꽃이 필까?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현지 님의 글입니다.
헤어진 연인의 집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는 남자가 있다. 익숙한 듯 키패드 위로 손가락을 움직여도 문이 열리지 않자 건물 밖으로 나오며 불만을 토로한다. 문득 떠오른 건, 열리지 않는 문 너머의 주인이 빌려주기로 한 정장이다. 몇 시간 뒤 예정된 소중한 면접 기회를 날릴 수 없는 남자는 결국 문 앞에 다시 엉거주춤 선다. "정민이 형." 문을 두드리며 다급하게 집주인을 부르는 단어는 간결하고도 강렬하다.
〈메이드 인 루프탑〉은 앞서 소개한 남자, ‘하늘’(이홍내)의 3년간의 연애가 끝이 나며 시작된다. 하늘은 연인이었던 ‘정민’(강정우)이 같이 살았던 집에서 정리해준 짐을 가지고 친구의 자취방으로 향한다. ‘봉식’(정휘)의 집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가까스로 옥탑방에 도착한 하늘이 봉식과 이름에 관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눈다. 지하늘과 고봉식. 지하인지 하늘인지 이름에서부터 간극이 있으니 제 짝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는 주장과 인생은 예쁜 이름 따라간다고, 고봉식 말고 청경채로 개명하고 싶다는 주장은 웃음 속에서 씁쓸함을 발견하게 한다. 이어서 봉식은 옥탑방의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텃밭의 청경채를 꽃피울 때까지 놔둘 거라 선언한다.
인터넷 방송 남자 BJ로 활동하는 봉식은 가볍고 유쾌한 성격과는 달리 선뜻 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다. 어떠한 이유라도 있는지 다가오는 남자들 앞에 선을 긋는 봉식. 그런 봉식에게 새로운 만남이 찾아오며 또 한 번 남자와의 연애를 꿈꾸는 과정을 보여준다. 과연 청경채도 꽃이 필까. 영화는 봉식과 하늘의 두 퀴어 커플을 통해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꽃을 계속해서 그려 나간다. 옥탑방에서 다이소 흙을 덮고 미세먼지를 마시며 자란 꽃은 어떨지 궁금하다는 봉식에게 하늘이 건넨 엉뚱한 한 마디는 곧 해답이었다. “옥탑방이 아니라 루프탑이잖아.” 좁은 골목길과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야 도달할 수 있는 옥탑방. 작은 희망을 품은 곳은 가는 길이 험난한 옥탑방이 아닌, 푸르른 하늘과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는 루프탑이었다.
〈메이드 인 루프탑〉은 기존의 옥탑방과 같은 퀴어 영화의 모습보다 로맨틱 코미디의 통통 튀는 면모를 선보인다. 그들이 겪는 사랑 이야기를 너무 익살스럽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게 밝은 분위기 속에서 풀어 나간다. 하늘과 봉식은 각자의 연인을 가진 퀴어 커플이면서 동시에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이다. 취업 걱정을 하는 취준생 하늘과 연인과의 시간에 행복해하는 봉식의 얼굴은 여느 청년들의 것과 다르지 않다. 현실 속 사랑이 갖고 있는 밝음의 힘을 강조하며 90년대생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들려준다.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 속에서 가장 큰 특이점은 여성 인물이다. 그들의 연애 이야기가 유별나지 않게 느껴지는 건 여성 인물들의 반응이 색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중년 여성인 ‘순자’(이정은)는 옥탑방 이웃 주민으로, 오지랖을 너무 부린다는 봉식의 속삭임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순자가 부리는 오지랖은 그들의 사랑 이야기가 보통의 가치관 속에 귀결되도록 한다. 포기하고 청경채를 먹으려는 봉식에게 정신 차리라며 등을 내리치거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우울한 하늘에게 음식을 갖다 주는 행동은 유난스러워 보일 수 있는 특이함을 각자의 평범한 경험담으로 녹아들게 한다.
또 오빠가 만난다던 사람이 궁금했는데 이제야 얼굴을 마주 본다는 정민의 여동생 '정연'(염문경)이 내는 담담한 목소리는 예상했던 모습과 다를 수 있다. 이들은 사랑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판타지의 면모를 투영한 얼굴들 같기도 하다. 여성 캐릭터들이 하늘과 봉식 이야기의 큰 힘이 되어준다는 건 이 영화가 가지는 또 다른 매력이다. 사실 영화가 바라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어떤 사람이 하는 어느 연애든 모두 같다는 것. '메이드 인 루프탑'의 텃밭을 가꾸려면 우리 모두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 숨겨져 있을 모든 청경채들에도 꽃이 피길 기다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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