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즈 기획
가려졌던 그들과 눈을 맞추는 시간
〈벌새〉의 수희, 〈톰보이〉의 리사, 그리고 〈미나리〉의 앤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현지 님의 글입니다.
영화를 볼 때 유독 눈에 밟히는 인물이 있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 곁을 지키는 인물. 그러면서도 화면에 제법 자주 등장하는 인물. 그들의 얼굴은 어딘가 익숙하다. 스크린 너머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서다. 주인공을 바라보는 인물에게서 언뜻 관찰자의 시선이 읽힌다. 이런 묘한 기시감은 다음 문장에 의문을 들게 한다. 흔히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엔 인물들이 살아 움직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인물들은 주인공이 없는 시간 속에선 어떻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걸까. 같은 프레임에 등장하더라도 그들의 감정선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가 담은 2시간짜리 세계의 연장선이 문득 궁금해졌다. 가려진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싶은 바람이 생기던 순간이었다.
집 밖으로 나선 여자아이는 익숙한 길로 걸음을 옮긴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볕이 따뜻하다. 아이는 친구 혹은 부모님과의 약속 장소로 향한다. 은연중에 느끼던 주변 간의 단절감은 어느새 익숙하다. 누군가와 비교당하거나 차별된 대우를 받고 있음에도 흔들림이 없다. 언성을 높인 말다툼이 들려도,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이별에도 여자아이는 담담하다. 마치 그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한 눈빛으로 상대방을 응시한다.
위 내용은 어떤 영화의 인물을 소개하는 문단이다. 이를 보고 마음속으로 떠올린 영화가 모두 달랐을 거라 예상한다. 아마 정확하게 부합하는 인물을 떠올리기 막연했을 테다. 모호한 묘사에 어느 한 명을 특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여러 인물을 생각해냈을 수도 있다. 이상한 게 아니다. 오히려 당연하다. 한 편의 영화에만 해당하는 소개글은 아니기 때문이다. 짧은 문단 안에 녹아든 영화는 총 세 가지다.
김보라 감독의<벌새>, 셀린 시아마 감독의 <톰보이>, 그리고 세간의 화제작인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 세 영화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서로 닮은 인물을 제시하고 있다. 영화 제목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키워드도 모두 다를 것이다. 가령 <벌새>에선 영지 선생님과 은희의 연대를, <톰보이>에서는 로레의 또 다른 이름인 미카엘을, <미나리>에서는 할머니 순자와 손자 데이빗을 생각했을 수 있다. 이들은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방금 읽었던 소개글의 주인공은 아니다. 수희, 리사 그리고 앤. 위의 소개글은 어쩌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세 명의 인물을 아우른다. 여름 즈음을 살고 있는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체화하고 있다. 가부장제의 폭력성, 또래 집단의 원칙 혹은 의젓한 큰딸의 역할. 모두 비슷한 줄기로 얽힌 주제다. 공교롭게도 세 명 모두 여성이며 청소년이다. 그들은 여성 그리고 청소년임과 동시에 주인공이 아니라는 공통점 속에서 각기 다른 이야기를 가진다.
1994년, 보편적 이야기를 내밀하게 들려주는 영화 <벌새>의 주인공 ‘은희’(박지후)에겐 언니가 있다. 언니인 ‘수희’(박수연)는 리사와 앤 중에서 가장 성인에 가깝지만 비교적 과감한 일탈을 일삼는다. 학원을 가지 않고 옷장 안에 숨었다가 친구를 만나러 가거나 은희의 도움으로 남자친구를 몰래 집 안으로 데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장면들은 영화에 잔잔히 스며들어 있을 뿐이다.
수희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건 영화의 중반부에 가까워졌을 때다. 학원에 결석하고 놀러 다닌 수희를 혼내는 부모님의 격양된 모습을 은희가 목격하면서부터 수희의 존재는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다. 부부의 다툼 끝에 아버지의 팔에서 흐르는 피와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 조각들. 그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던 수희는 뭔가를 몸소 체감한 듯 이후 점차 표현을 덜어낸다. 성수대교의 붕괴로 목숨을 잃을 뻔했을 때도, 등교하여 친구들의 죽음을 마주해야 했던 날에도. 자신의 죽음과 친구의 죽음 앞에서 수희는 초연하다. 이제 어떠한 표정을 짓지도, 말을 남기지도 않는다. 수희의 인상 깊은 대사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 건 인물이 직접적으로 표현한 대사가 현저히 적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영화는 수희의 내면을 깊게 다루지 않는다. 화면 너머를 응시하는 눈빛은 상처받은 은희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수희를 보듬어주는 듬직한 어른은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 너를 때리면 맞서 싸우라고 조언해줄 영지 선생님도, 대학교에 가야만 무시를 안 받을 수 있다고 조언해줄 어머니의 관심도 수희에게는 미처 닿지 못한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던 다리가 무너진 다음 날, 등교 준비를 하다 거울을 보던 수희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담담한 표정에 가려진 말들이 듣고 싶었다.
<톰보이>는 자신을 남자아이 ‘미카엘’이라고 소개한 ‘로레’(조 허란)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리사’(진 디슨)는 다른 두 인물에 비해 주인공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로레와 애정을 나누기도 하고 로레를 온전하게 받아들이며 먼저 손을 내밀기도 하는 주요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해야 할 점은, 리사는 기존의 또래 집단에 홀로 여자아이로 존재했다는 점이다.
리사가 미카엘로서의 로레를 아이들에게 처음 소개했을 때 한 게임이 있다. 바닥에 놓인 수건을 빨리 가져오는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이었다. 로레의 상대였던 리사는 자신을 이기면 아이들이 좋아할 거라며 속삭인다. 로레는 게임에서 승리하고 환호를 얻는다. 미련없이 돌아서는 리사의 표정에서는 아쉬움조차 찾아볼 수 없다. 리사의 양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로레에 대한 묵시적 호감일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또래 남자아이들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다. 리사는 그들의 원칙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 선을 넘어서지 않는다. 여자라고 축구에 끼워주지 않아도 경기장 밖에서 물병을 든 채 남자아이들과 축구를 하는 로레를 응원한다. 그 모습이 매우 자연스럽다. 영화엔 공동체 간의 단절감을 은연중에 느껴왔을 리사의 내적 갈등이 드러나지 않는다. 로레가 등장하기 전까지 묘한 배척감을 꾸준히 익혔을 리사가 지난날 혼자가 아니었길 바랄 뿐이다.
영화 <미나리>의 첫째로 등장하는 ‘앤’(노엘 조)은 앞의 두 인물들보다 영화에서 크게 부각되는 부분이 없다. 미국 아칸소로 이사를 오며 시작하는 영화의 오프닝에서조차 앤은 책을 읽는 뒷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뒷좌석에서 그런 누나를 바라보고 있는 동생 ‘데이빗’(앨런 김)의 시야였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데이빗의 시선을 반영한다. 어린 나이인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의젓한 큰딸은 심장 질환을 앓고 있는 동생을 착실히 챙긴다. 앤은 데이빗과 잘 놀다가도 뛰지 말라는 엄마 ‘모니카’(한예리)의 부름이 들리면 바로 뒤를 돌아본다. 데이빗을 살피는 모습이 제법 보호자 같기도 하다. 갑작스레 함께 살게 된 외할머니 ‘순자’(윤여정)가 달갑진 않지만 예의를 차려 인사를 하는 모습은 당연하다는 듯 그려진다. 그에 반해 할머니가 오는 게 싫다며 데이빗은 엄마 뒤로 숨는다. 앤은 부모님을 잘 따르는 착한 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딘가 이상했다. 앤은 성숙하며 듬직하다. 그것도 너무나 당연하게. 이 당위성에 물음이 생겼다.
앤의 하루는 대부분 데이빗의 곁을 지키며 그를 돌보는 것으로 묘사된다. 앤은 공장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는 부모님의 빈자리를 자연스레 채운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남매에게 선생님은 앤이었다. 영화는 데이빗에게 책을 읽게 하는 앤의 모습을 이어서 비춘다. 위독한 순자를 병원으로 데려간 모니카와 농장일에 전념한 아버지인 ‘제이콥’(스티븐 연)을 대신하여 데이빗을 챙기는 것도 앤의 몫이었다. 어른이 부재한 집에서도 앤은 침착했고 데이빗은 그런 누나를 익숙한 듯 바라본다. 이것은 아칸소의 바퀴 달린 집으로 이사 오기 전부터 스스로 학습했기에 가능했다. 분명 가족의 일원인데도 한 발 멀리서 관전하는 듯이 보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앤에게 영화 속 일련의 사건들이란, 화재나 토네이도처럼 불가피한 자연재해를 제외하고는 이미 학습으로 노련하게 맞이하는 일과였다. 앤은 날이 바뀌어도 동생을 돌보는 딸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한다. 그 때문에 매뉴얼대로 행동하는 앤이 어쩌면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앤에게 동질감을 느낀 관객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앤으로 인하여 미국이라는 낯선 배경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누군가에게 귀결되는 보편적인 일화로 탈바꿈한다. 이는 비단 앤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장녀로서 일찍이 어른이 되어버린 어떤 아이를 연상시키는 <미나리>의 앤. 위에 오빠를 둔 둘째 딸로서 살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벌새>의 수희. 여자아이로서 무리와 어우러질 때 겪었던 이질감을 되새기게 하는 <톰보이>의 리사. 모두 저마다의 삶으로 관객이 영화에 동화되도록 한다. 비록 카메라가 비추지 않더라도 묵묵히 삶을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우리의 삶이 겹쳐 보인다. 담담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는 그들의 눈빛은 우리의 것과 닮았다. “영화에는 인물들이 살아 숨 쉬고 있어.” 이 문장이 성립할 수 있는 건 오래전부터 영화 속 세계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인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주인공이 아닌 이들의 시점으로 영화를 관람하면 그들의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가끔 이렇게 가려진 목소리가 생각난다. 영화가 재생되고 멈추는 찰나에도 그들은 살아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처 비춰지지 않은 세상 속에서 굳건히 살아가고 있을 수많은 얼굴들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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