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규환〉 리뷰: 실패해도 괜찮은, 유쾌한 소동극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유진 님의 글입니다.
영화 〈애비규환〉은 대학생 토일(정수정)과 과외 제자이자 연하 남친인 고등학생 호훈(신재휘)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해 5달 뒤 혼전 임신을 부모에게 고백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동안 혼전 임신을 소재로 다룬 영화를 꽤 많이 보아왔다. 당장은 〈제니, 주노〉라는 한국 영화가 먼저 떠오른다. 그렇다면 영화 〈애비규환〉을 다른 혼전임신 소재의 영화들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도 있을까. 〈애비규환〉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임신 5개월 이후로 곧바로 시점 전환을 한다는 점이다. 아이를 낳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미래 계획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처럼 기존에 이미 다뤄진 ‘임산부의 갈등’ 이후 상황이다. 토일은 출산 후 5개년 계획을 철저히 준비한다. 그리고 당당히 결혼을 선언한다. 돌아오는 부모의 반응은 “넌 대체 누굴 닮았냐”는 호통이다. 토일은 굴하지 않고, 자신이 누굴 닮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대구로 떠난다. 영화는 이렇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의 연속이다. 친아버지를 찾고 난 후 실망스런 마음으로 토일은 서울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번엔 예비 남편이자 예비 아빠인 호훈이 연락두절 된다. 이때부터 또 다른 ‘아빠 찾기’가 시작된다. 키워준 아빠 태효(최덕문), 낳아준 아빠 환규(이해영)와 함께 토일의 남자친구 호훈 찾기 프로젝트라니. 사자성어 ‘아비규환’을 패러디해 ‘아빠들로 인해 벌어지는 소동극’이라는 뜻을 담은 제목이 찰떡처럼 어울린다.
돌고 돌아, 엄마와 딸 이야기
제목과 줄거리만 보면 자칫 세 명의 아빠들 이야기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영화 〈애비규환〉은 딸 토일과 토일의 엄마 선명(장혜진)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영화 진행 중 토일의 어린 시절 장면이 중간 중간 삽입된다. 이 장면들에서 카메라는 선명의 표정에 집중한다. 관객이 선명의 삶을 함부로 부정하지도, 연민하지도 않게 한다. 토일과 선명의 과거 서사를 관객에게 주입하지도 않기에 정보가 넘친다는 느낌을 받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깔끔한 방식으로 토일의 어린 시절 장면이 영화에 담긴다.
토일과 선명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렇다 해도 크게 어긋나지도 않는다. 투닥거리다가 금세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게 되는 마음,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같은 편이라는 믿음, 그런 마음에 설득 당했다. 토일의 어린 시절 장면들 덕분에도 그렇지만 나와 엄마의 관계를 떠올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 토일은 선명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한다. 토일은 친아빠의 성을 따라 쓰다가 엄마가 새아빠와 재혼하자 새아빠의 성을 따라 쓴다. 가부장제 내에서 살아왔고 결국 결혼이라는 결말로 정상가족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적어도 엄마 손을 잡고 식장에 입장할 수는 있다. 이혼하면 뭐 어때,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적어도’가 쌓이고 쌓여 영화를 봉합한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디테일
“누나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할 것 같아요.”
호훈은 토일을 존중하는 걸 넘어서 존경하고 우러러보기까지 한다. 토일은 그 사실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임신한 뒤 절망의 늪에 빠져들거나 사랑받지 못할까 염려하는 여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자기 잘난 걸 알고 뽐낼 줄 아는 토일의 모습은 영화 곳곳에서 유독 빛난다.
토일이 낳아준 아빠 환규에게 “나머진 안 닮을래”라고 외치는 장면도 좋다. 환규가 떠나는 장면에서 환규의 뒷모습을 흐릿하게 처리한다. 친아빠에게 변명의 자리를 내주지 않고 영화에서 그를 향한 관심과 시선은 멀어진다. 대신 새아빠의 자리를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부장제를 단순히 비난하지도 않는다. 토일을 키워준 아빠 태효가 화면에 등장할 때도 늘 마음이 편하다. 태효는 고무장갑을 끼고 집으로 들어오는 토일을 맞는다. 선명을 대신해 장바구니를 들고 나란히 걷는다. 이런 사소한 장면들이 아무렇지 않게 던져진다. 미디어에 비치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여성, 남성의 역할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 디테일이 좋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이런 장면들이 모여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배드민턴 네트를 사이에 두고 홀로 서 있는 토일의 모습이 오래 뇌리에 남았다. 가족들과 마주본 채 결국 홀로 서야 한다는 사실을 직면한 것처럼 보였다. 영화는 유쾌한 분위기로 진행되지만 토일의 눈빛이 눈에 밟힐 때가 있다. 토일이 당장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는 대신 현실에 맞서고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면서도 불안을 혼자만 감춰두고 있을 것 같아서다. 어쨌든 토일은 씩씩하게 잘 살아가겠지만. 토일이 건강하게 아이를 출산하고 호훈과 행복한 미래를 그려가길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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