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X-월드〉 리뷰: 미경 씨의 새로운 싸움을 응원해
*관객기자단 [인디즈] 은다강 님의 글입니다.
‘희생하는 엄마를 보고 자란 나는 결혼이 싫다.’
영화 소개 마지막 줄을 보고 영화관을 찾기가 무서워졌다. 울지 않을 자신이 없었고 예상은 반만 적중했다. 눈물이 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웃길 줄은 또 몰랐다.
딸과 엄마, 그리고 아빠의 아빠가 한 집에 살고 있다. 20년 간 이사 한 번 없었던 집은 구석구석 온갖 물건으로 가득 차있다. 낡은 서랍에는 결혼 전 다른 사람과 만나던 아빠의 연애편지도 들어있다. 엄마는 아빠의 과거사에 “이런 쓰레기 같은 것들!”이라고 장난스럽게 화를 내지만 정말 과거를 떠나지 못하는 건 본인이다. 아빠가 돌아가신지 12년이나 되었는데 엄마는 여전히 할아버지를 ‘모시고’ 산다.
엄마는 왜 그럴까. 최미경의 딸이자 한흥만의 손녀인 한태의 감독은 ‘K-장녀(한국에서 장녀로 살아가는 20~30대 여성이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일컫는 신조어)’라면 한번쯤 했을 법한 고민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할아버지 한흥만은 족보를 꺼내 보이며 손녀 태의에게 청주 한 씨 양절공파 가문의 역사를 자랑한다. 허나 모든 집안의 진정 유구한 역사는 딸과 엄마의 싸움일지 모른다. 양반은 족보 없이 계보를 증명할 수 없지만, 모녀 싸움의 역사엔 족보 같은 건 필요치 않으니까. 두 사람은 시장에서 순두부를 사는 와중에도 실랑이를 벌인다. 딸에게 천 원을 빌리려는 엄마 최미경은 학생 때부터 돈을 착실히 모아 효도하는 일명 ‘엄친딸’들의 이야기를 꺼내고, 빌려준 천 원을 꼭 갚으라고 말하는 딸 태의는 '취준생'이 되어서도 용돈을 받아 생활하는 청년들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한다. 둘 중 한 사람이 로또 1등에 당첨 되어도 끝나지 않을 성 싶은 싸움이다.
딸과 엄마의 대화를 중심으로 미경의 일상을 담던 카메라는 흥만의 독립 선언으로 변곡점을 맞이한다. 잘 맞지 않는 것 같으니 따로 살자는 흥만의 말은 새삼스럽다. 십 수 년을 함께 살았는데 이제와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그는 집이 답답해 보인다며 태의의 방문을 뜯어낸 전적이 있다. 전등 스위치에 빨간색 매직을 칠하고 사계절 내내 벽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달아 놓는다. 태의는 종잡을 수 없는 흥만의 미적 감각, 아니 마음을 짐작하기보다는 미경이 드디어 ‘시월드’에서 탈출하게 될 것을 기뻐한다. 정작 미경은 서운한 기색을 비친다. 그는 자신의 ‘성격’과 ‘성향’을 탓하며 변화를 반기지 않는다. 태의는 여태껏 미경이 경제적 문제로 독립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집을 마련할 돈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태의의 두 번째 질문이 생긴다. 미경은 왜 집을 나가기 싫어할까.
마지못해 집을 알아보면서도 미경은 흥만의 집과 5분 거리의 매물만 둘러본다. 그러다 자금 융통에 문제가 생기자 자신의 인생이 결혼부터 잘못되었다며 울기도 한다. 결혼을 탓하면서도 시월드에서 멀어지지 못하는 복잡한 속내를 다 헤아릴 순 없지만, 부동산을 나오며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한마디만큼은 쉽게 수긍이 간다. “아파트는 맨날 지어대는데, 왜 우리가 살 아파트는 없는 거야.”
태의는 미경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싸움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그를 진실의 방, 코인 노래방에도 데려가고 일터에도 찾아간다. 별 소득은 없다. 미경은 바쁜 와중에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하는 한 씨 집안 먼 친척의 경조사까지 챙긴다. 미경은 정말 청주 한 씨 양절공파를... 아니, 그만 알아보자.
우여곡절 끝에 전세가 아닌 매매로 집을 구하게 되고, 두 사람의 독립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살면서 자기 명의의 집을 갖게 될 줄 몰랐다며 활짝 웃던 미경은 다시 찾은 진실의 방에서 혼자 남을 흥만의 걱정으로 눈물을 보인다. 분가 얘기를 먼저 꺼낸 흥만도 마냥 홀가분해 보이지는 않는다. 미경과 태의가 떠나기 전, 하나라도 더 챙겨 주고픈 마음에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흥만이 마지막으로 모녀에게 건넨 것은 방 냉장고에 따로 보관해 둘 정도로 즐겨먹는 봉지 라면이었다.
이사 갈 집에 직접 페인트를 칠하고, 가구를 고르는 동안 미경 혼자만의 싸움도 끝이 난 듯하다. 그리고 누군가를 돌보지 않아도 되는 미경의 삶은 더욱 바빠졌다. 자전거 타는 법도 배우고 싶고, 카페를 차릴 수 있게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고 싶다. 당장 주말에 있을 소개팅도 걱정이다. 미경은 언제부턴가 과거형보다 미래형을 말하기 시작한다. 태의는 이해 못 할 미경을 말로 다그치기보다 그의 변화를 기다릴 줄 알게 됐다. 독립을 준비하며 태의와 미경은 상대방을, 그리고 자신을 조금 더 들여다보게 된 것 같다.
어떤 싸움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치열하게 싸우면서 알게 된 자신의 가치관이나 약점, 그리고 강점은 다음 싸움을 반드시 승리로 이끌진 못하더라도 숨 돌릴 여유를 만들어낸다. 미경의 시월드는 막을 내렸지만, 이제 어디서 누가 어떤 싸움을 걸어올지 모르는 미지수의 세계로 발을 내딛었다. 그 걸음에는 반려견 ‘호주’도 함께한다. 엄마로, 며느리로, 누구의 각시로 살아온 미경이 되찾은 이름과 새로 만날 세계에서 벌어질 싸움을 응원한다.
태의처럼 나 역시 엄마의 투정에 쉽게 답을 내려왔다. ‘힘들면 하지 마, 보기 싫으면 보지 마.’ 심지어 한탄 세례를 피하려고 엄마 번호를 차단했던 적도 있다. 독립한 뒤에 한번 씩 집에 다녀올 때마다 ‘당분간 이 사람들 보지 말아야지’ 다짐해놓고 달이 밝으면 나도 모르게 전화를 건다. 사랑하는 웬수들, 양반 가문의 엄마와 엄마 가문 선산의 소작농 출신의 아빠를 데리고 이 영화를 보고 싶다.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둘에게 문자가 왔다. [야, 너 내 샴푸 언제 주문해 줄 거야. 고양이 모래도 빨랑 주문해ㅋ], [딸, 집엔 언제 올 거냐. 고양이 목욕 좀 시켜야겄다] 아, 영화관까지 가는 길이 벌써 고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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