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녹색섬〉리뷰: 나무가 사라지는 동안
*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주연 님의 글입니다.
어릴 적에 살았던 동네를 찾아가 본 적이 있다. 대단히 오래 살았던 것도, 절대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추억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 딱 4년. 처음으로 자아가 형성되어가던 시기에 머물렀던 동네였다. 동네는 그대로인데, 나는 변했다. 더 이상 그곳엔 웃으며 떠들 친구들이 없고, 흐릿해진 추억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그로부터 시간이 더 지난 지금, 그 동네는 마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것처럼 낯설게 다가온다. 그런데 만약 그곳이 사라졌다면? 외부의 요인에 의해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들이 몽땅 사라지게 된다면? 동네를 다녀온 뒤의 감상은 아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콘크리트 녹색섬〉에서는 크고 울창한 나무들로 가득했던 개포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며 자라온 사람들이, 과거의 추억을 꺼내놓는다. 어린 시절의 기억도, 그때를 생각하며 뭉클해지는 마음도 변함없이 존재하지만, 그곳을 둘러싼 풍경은 모두 바뀌어갈 준비를 한다. 지금의 개포동을 떠올리면 ‘강남’이라는 이름과 함께 높디높은 집값이 먼저 떠오른다. ‘개도 포르쉐 타는 동네’라는 유머 아닌 유머가 통하는 곳, 하지만 과거의 개포동은 지금과 달랐다. 서울 한복판에 울창한 숲처럼 세월이 담긴 나무들이 우거진 동네였다. 갯벌을 메워 만든 땅 위에 사람들이 살아갈 터전을 만들고, 그곳에 다시 나무가 뿌리 내리며 오랜 시간이 쌓여 왔다.
재개발이 결정된 이후, 감독은 바쁘게 움직인다. 수많은 마음을 꺼내어 보이는 대신,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움직인다. ‘나무가 훼손되지 않게 해주세요.’ 매일같이 작업 현장을 찾아 나무들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지켜보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나무에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남긴다. 구청을 비롯한 기관에 전화를 걸고 또 걸어 나무를 지켜달라 부탁한다. 하지만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려면 나무가 베어져야 하는 것이 이곳의 당연한 논리였다. 누군가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리고 관객인 나조차 한순간, 정말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 부끄러운 질문은 한 장면을 목도하고, 완전히 사라진다.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의 삶이 편안해질수록, 풍요로워질수록 나무가 희생된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무가 실제로 쓰러지거나 베어지는 장면을 본 경험은 없다. 영화는 개포동의 재개발을 위해 나무가 쓰러지는 순간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준다. 그리고 그 순간의 충격은 아주 크게 다가온다. 나무가 땅에 떨어지면서 거대한 소음을 만들어냈고, 스크린 너머로 땅이 울리는 게 느껴질 만큼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나무는 그냥 그렇게 쓰러졌다. 소리치거나 울지도 않고,
뚝.
쓰러졌다.
나무가 죽는다. 그렇게 죽임을 당한다. 이 세상의 크나큰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를 베어내는 일이 충격적으로 다가온 건 단순히 한 생명을 해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개발을 위해 치워야 할 대상인 나무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찬란한 추억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스크린을 통해 ‘개포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나무들이 한 사람의 기억을 넘어 오랜 시간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면서도 나무 대신 들어선 건물이 누군가의 삶을 더 편리하고 윤택하게 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를 남긴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하늘이 무섭게 비를 쏟아냈다. 유독 삭막하게 느껴지는 콘크리트 위로 멈출 줄 모르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직 이 도시에 남아 있는 녹색섬만큼은, 저 비를 양분 삼아 조금 더 울창해졌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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