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짧은 전주 기록
인디즈 X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 방문기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수미 님의 글입니다.
유독 짧게 느껴진 전주였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영화를 많이 보고 싶다는 욕심에 예매창을 새로고침하는 손가락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기차역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안톤 체호프의 『사랑에 대하여』를 꺼내 들었다. 밀린 숙제와도 같은 독서 시간이었다. 초기작은 생각보다 더 짧은 분량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어 기차에서 처음 독서를 시작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밥은 뭐 먹지. 전주는 어디를 들어가도 맛있다는 이야기가 자자하니 가서 생각해도 되겠지 싶었다. 결국 전주 가자마자 첫 점심은 시간에 쫓겨 영화관 근처 한식집에서 돼지불고기로 먹었다. 양은 조금 적었으나 그리 배가 고프지는 않았으니 불만족스럽지는 않았다.
2시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게스트센터에 들러 프레스 배지를 수령했다. 함께 받은 에코백에 들어있던 음료는 받자마자 마셨고, 라면은 저녁에 숙소에서 유용하게 먹었다. 돌이켜보면 빠듯한 일정에 꽤 알찬 키트였다. 배지를 목에 걸고, 게스트센터를 나오는데 상영회에서 뵈었던 한 단편 영화의 감독님을 발견했다. 목에 배지를 걸고, 한 손에 에코백을 든 채 핸드폰으로 무언가 찾아보는 모습이 나와 퍽 비슷하여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언제 도착하셨는지, 얼마나 전주에 계시는지, 어떤 영화를 보기로 했는지 짧은 몇 마디를 주고받았고, 나는 이제 〈음화〉를 보러 가야 한다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 영화 엄청 실험적으로 보이던데.... 그런가요? 멋쩍은 미소에 살짝 기대감을 품은 채로 전주국제영화제 첫 영화를 위해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오지현 감독의 〈음화〉는 모두의 기대 이상으로 실험적인 영화였다. 음화, 음란한 이미지, 네거티브 이미지, 은밀한 이야기. 스크린에 응축된 음란하고 네거티브한 에너지는 관객들이 받아들이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력했다. 후반부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영관을 나가는 관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줄줄이 나가는, 영화제에서만 가능한 경험이 처음이라 진귀하다고 느껴졌다. 79편의 실험영화를 소리 없이 이어 붙인 후반부는 나에게도 다소 힘들었으나, 영화를 보면 볼수록 GV 시간이 궁금해졌다. 뒤에 약속이 있었지만, GV가 너무 듣고 싶어 조금 고민이 되었다. 이번에는 짧게 다녀가는 만큼 영화보다는 사람에게 더 시간을 쏟아야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상영관을 나왔다.
근처 카페에서 서울에서 알게 된 지인 둘과 함께 짧은 대화를 나눴다. 언제 오셨어요? 언제 올라가세요? 어떤 영화 보셨어요? 저는 〈음화〉라는 영화를 봤는데....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진다면 두 문단 위로 올라가보시라. 영화제라는 행사의 특수성을 좋아한다. 4년 전부터 알게 된 사람과 작년에 알게 된 사람, 올해 초에 알게 된 사람을 한 번에 만나게 되기도 하고, 멀게만 느껴졌던 감독, 배우들이 아무렇지 않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곳. 뜻밖에 아주 반가운 얼굴을 보게 되거나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게 되기도 하는 곳. 그래서 영화제에 갈 때면 혹시나 아는 얼굴이 있나 싶어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여러 사람과 비슷한 질문을 주고받는 것도 나름 유쾌한 일이다. 형식적으로 묻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영화를 스쳐 지나갔고, 함께 봤거나, 또 함께 보게 될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니 말이다.
커피 반 잔, 치즈 케이크 몇 입을 먹고, 다음 영화를 보기 위해 다시금 극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음 영화는 차이밍량 감독의 〈밤의 여정〉과 〈집으로〉였다. 두 번째 영화도 쉽지는 않았다. 40분가량의 무성영화를 보다가 1분에 한 걸음씩 발을 내딛는 〈밤의 여정〉 행자의 수행을 보고 있자니 내가 지금 영화로 수행을 하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차들은 빠르게 지나가고, 사람들마저 순식간에 프레임을 넘나드는 영화 속에 행자는 아주 천천히 자신의 걸음을 내디뎠다. 이내 극장에서 나와 같은 영화를 보는 듯한 관객들의 표정이 스크린에 영사됐다. 그들은 전주에 있는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졸거나 혹은 애써 졸음을 참고 있었고, 그중 몇몇은 고양된 감정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얼굴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밤의 여정〉은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보는 경험의 의미를 되짚는 영화로 느껴졌다. 극장 밖의 시간은 언제나 정신없이 지나간다. 외부에서 각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컴컴한 곳에서 몇 시간 동안 하나의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영화 애호가들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잠이 드는 사람들의 꿈과 영화에 몰입한 사람들의 생경한 감각은 결국 극장 안에서 하나의 에너지로 뭉쳐진다. 〈밤의 여정〉을 보며 〈음화〉와는 또 다른 영화제에서만 가능한 경험을 했다고 느꼈고, 이 순간 역시 진귀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집으로〉를 보다 잠들었다. 전주에 와서 세 편의 영화 밖에 보지 못하는데 잠이 든 건 아쉬운 일이지만, 〈밤의 여정〉을 보고 난 직후라 그런지 관람 중 수면조차 영화적 경험으로 느껴졌다. 영화를 보다가 잘 수도 있지. 내가 꾼 꿈도 누군가의 감각 속에 흘러 들어가지 않았을까. 자고 일어나니 급격하게 허기가 져서 GV를 조금 듣다가 상영관 문을 나섰다. 영화를 함께 본 지인은 〈밤의 여정〉을 보다 잠들었고, 〈집으로〉가 무척 좋았다고 말해줬다.
저녁은 간단히 짜글이를 먹었다. 전주까지 왔으니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새벽까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낭만을 꿈꿨으나, 다들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영화를 보는 바람에 술은 마시지 못했다. 대신 불이 꺼진 전주의 거리를 하염없이 걸었고, 골목상영으로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를 보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괜히 아쉬운 마음에 가맥집을 기웃거렸으나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웨이팅은 길었다. 그래,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오늘은 숙소에 들어가 맥주나 한 캔 마시며 하루를 일찍 마무리해 봐야지. 〈밤의 여정〉의 행자처럼 아주 천천히 걸음을 내디디며 내년 전주에는 더 오래 머물러야겠다고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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