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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기획] 이어폰을 빼고 보낸 시간

by indiespace_가람 2026. 5. 14.

 이어폰을 빼고 보낸 시간 

 인디즈 X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 방문기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주연 님의 글입니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전주역에 도착합니다. 안내 방송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전주에 도착했다. 캐리어를 끌고 올라탄 버스에는 ‘전주를 다시 전라도의 수도로!’라고 적힌 문구가 반복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낯선 지역에 도착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은 익숙한 듯 달랐다. 전주국제영화제에 처음 방문하는 설렘 때문인지, 매일 보던 나무도 더 푸르러 보였다. 어디를 가든 지도 어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스마트폰 화면과 눈앞에 놓인 건물들을 번갈아 확인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새로운 곳을 방문했기에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귀찮은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들도 영화제를 위해 왔을까?

 


거리에서는 노래자랑의 흥겨운 소개말과 노랫소리가 들려왔고, 〈슈퍼마리오 갤럭시〉의 야외 상영을 보기 위해 모인 어린이들이 가득했다. 따사로운 햇살과 산뜻한 바람, 붐비는 인파 속에서 펼쳐지는 판타지 세계. 아이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어린이날 선물은 없을 것이다. 스크린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순수한 기쁨이 담겨 있었다. 돌이켜보면 영화제에서 아이들이 가득한 풍경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내게 영화제는 영화를 사랑하는 어른들의 축제에 가까웠다. 하지만 메가박스 앞 광장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보며, 영화제가 조금 더 넓은 세계로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마리오에게서 행복을 찾듯, 어른이 된 나 역시 새로운 세상을 찾아 이곳에 왔다.


그렇게 처음 만난 영화는 〈네 멋대로 해라 : 영웅 계획〉이었다. 상영 후 이어진 ‘영특한 대화’에서는 이런 질문이 나왔다. 불확실성이 강해지고 있는 현시점에서, 요즈음의 젊은 관객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나는 영화가 무척 천연덕스럽다고 느꼈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바꿀 만큼 큰 일을 해놓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선다. 무엇이든 쉽게 무거워지는 시대에, 그 가벼운 태도가 오히려 용기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주저하는 이들 앞에서 먼저 걸어가는 사람들이 아닐까.


쉽게 사라지지 않는 영화의 여운 속에서 방문한 ‘비디오 라이브러리’는 극장에 들어설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대신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발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좌석 번호표와 배지를 맞바꾸고 들어간 곳에는 영화에 집중한 숨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열 맞추어 놓인 모니터들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여기도 극장이라는 것을 잊지 마.”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영화를 보고 있었고, 저마다의 시간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다.

 


한편 문화공판장 작당에서는 ‘100 Films 100 Posters’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영화의 거리에 걸려 있던 포스터들을 가까이에서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미 본 영화의 포스터는 반갑게 다가왔고, 아직 보지 못한 영화들은 제목과 이미지 속 의미를 짐작해 보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나무가 기운 쪽으로〉의 포스터가 계속 눈에 밟혔다. 불꽃이 터지는 순간의 찬란함과 번져가는 빛의 색채, 그리고 제목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부녀의 뒷모습이 묘한 아련함을 남겼다. 결국 나는 그 포스터를 구매했고, 실제 영화 관람으로까지 이어졌다. 영화 속에서 희진의 기타 연주와 아버지의 엉성한 노래가 겹쳐진다. 완벽하지 않은 호흡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장면은 하나의 완전한 곡처럼 느껴진다. 어머니가 떠난 뒤에도 이들의 삶이 그렇게 이어질 것임을 조용히 전해주는 듯했다. 영화제에서 만나는 작품들은 정보가 거의 없다. 감독의 이름도, 영화에 대한 설명도 낯설다. 그래서 포스터 전시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디자이너가 먼저 해석해 낸 이미지를 따라가며 아직 만나지 못한 영화의 세계를 상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포스터 앞에 멈춰 선 순간부터 이미 영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영화제를 채우는 것은 영화만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풍경들이 있었다. 극장 화장실에서는 뒷사람들이 방금 끝난 GV 이야기를 나누었고, 거리에서는 인상 깊었던 장면이나 감독과 배우의 말을 곱씹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정이 담긴 말소리가 반가워 전주에 머무는 동안에는 이어폰을 최대한 빼고 다녔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영화를 보는 시간은 더욱 소중해졌다. 어떤 날에는 관람 매너가 좋지 않은 사람들의 바로 옆에 앉게 됐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쪽으로 시선이 향했고, 끝내 불편함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순간, 나는 영화를 보는 이 시간을 무척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둠 속에서 같은 장면을 바라보고, 함께 숨을 죽이며 시간을 보내는 일. 영화제는 그런 감각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아마 그 순간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속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영화는 〈6주 후〉였다.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은 영화였는데, 화면 속 인물들의 시간이 이상하리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나 역시 비슷한 이별을 지나온 뒤였기에, 영화 속 장면들은 단순한 이야기를 넘어서 아직 다 묻지 못한 감정들을 꺼내보게 했다. 모두가 아니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엄마를 보내주고자 하는 로레의 모습은, 외롭고도 단단했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마음을 붙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자꾸만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위로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화면 안의 시간을 함께 지나며 눈물을 흘렸다.


영화를 보는 시간은 잠시 다른 세계를 살아보는 일에 가깝다. 그리고 영화제가 열리는 동안, 전주는 그 세계를 모두의 것으로 넓혀가고 있었다. 올봄의 전주는 여러 편의 영화를 본 기억이라기보다, 영화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던 계절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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