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인연
〈고백하지마〉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5년 12월 24일(수) 오후 7시 30분 상영 후
참석 류현경 감독, 윤가은 감독, 고아성 배우
진행 문성경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 관객기자단 [인디즈] 서민서 님의 기록입니다.
“놀이처럼 만들어진 영화”라는 윤가은 감독의 말처럼, 〈고백하지마〉는 현장 곳곳에서 발견된 우연들을 퍼즐 조각처럼 하나둘 수집해 엮어 놓은 영화다. 이렇듯 영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지금, 〈고백하지마〉는 영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해 주는 듯하다. 북적이는 크리스마스 이브, 즐거운 우연들과 서로의 인연이 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고백하지마〉의 인디토크 현장을 소개한다.

문성경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이하 문성경):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오늘 진행을 맡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문성경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소중한 시간을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너무 감사드리고요. 오늘의 게스트분들을 큰 박수로 맞이해 보겠습니다. 먼저 각자 소개 부탁드리고 오늘 함께하는 소감부터 이야기하면서 시작하겠습니다.
류현경 감독(이하 류현경): 안녕하세요. 〈고백하지마〉의 연출과 연기 맡은 류현경입니다. 재밌게 보셨어요? 즐겁게 같이 이야기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아성 배우(이하 고아성): 안녕하세요. 류현경 감독님의 10년 지기 친구 고아성입니다.
윤가은 감독(이하 윤가은): 안녕하세요. 저는 류현경 배우님, 감독님의 오랜 팬 윤가은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문성경: 이 영화가 인연에 관한 이야기잖아요.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들 일정이 있고 친구들도 있으실텐데 ‘류현경’이라는 사람만 믿고 달려온 애정과 마음을 생각하면서 첫 질문으로 어떻게 서로의 인연이 되셨는지 가볍게 이야기 들어볼게요.
고아성: 먼저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나 뵐 수 있어서 너무 좋네요. 사실 오늘 GV가 아니더라도 현경 언니와는 크리스마스 때도 만났을 것 같을 정도로 정말 가장 절친한 배우 친구고요. 저희는 2015년 영화 〈오피스〉를 통해서 만나서 그때부터 쭉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문성경: 사실 영화나 드라마를 같이 찍어도 친해지는 건 쉽지 않잖아요. 류현경 배우님이 고아성 배우님의 마음에 들어온 계기가 있었나요?
고아성: 최근에 느낀 게 현경 언니는 ‘인간 시네마’예요. 일상생활에서도 시네마의 향기가 폴폴 나서 이분을 보고만 있어도 그냥 마음이 가득 차는 것 같아요.
류현경: 저랑 고아성 배우님은 부산에서 같이 〈오피스〉를 찍으면서 같은 숙소에 묵기도 하고 매일 같이 있어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친해졌나보다 생각했는데, 이외에도 서로에게 강한 끌림이 있었던 것 같아요. 또 저희 둘 다 아역 배우 출신이잖아요. 아역 배우 출신으로서 아성 배우님께 존경스러운 부분도 있고요. 그래서 여전히 좋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것 같아요.
윤가은 감독님도 제가 많이 존경하는데요. 예전에 대단한단편영화제에서 제가 심사를 했었는데 그때 윤가은 감독님의 〈손님〉을 상영했거든요. 지금 감독님은 기억이 안 나시는 것 같지만, 저는 그때부터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웃음) 그때 본 〈손님〉이 너무 좋았어서 나중에 〈우리들〉도 봤는데 더 놀라운 작품인 거예요. 그래서 감독님께 나중에 꼭 한번 만나달라는 사랑 고백이 담긴 영상 편지를 남겼던 기억이 있어요.
윤가은: 오히려 저는 2012년쯤에 영화학교를 다닐 때, 동기가 찍는 단편을 연출부로 도와주러 갔었는데 류현경 배우님이 와 계신 거예요. 그때 되게 놀랐거든요. 그냥 영화학교 작품인데 배우님이 오셔서 저희끼리 아수라장이 되었어요. (웃음) 저희가 정신이 없어서 배우님을 챙기지 못했었는데 꿋꿋하게 구석에서 대사를 연습하고 카메라가 돌아가자마자 바로 몰입하시는 모습을 보고 정말 충격 받았어요. 그 모습이 아직까지 저에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어요.
문성경: 두 분 기억 못 하시겠지만, 2021년에 전주국제영화제에 여성 영화인을 조명하는 ‘인디펜던트 우먼’이라는 특별 섹션이 있었는데, 류현경 배우님이 그 해의 프로그래머로 초청되셔서 윤가은 감독님의 〈우리들〉을 선정하셨어요. 그때 진행이 저였다는 거 기억하시나요?
류현경: 정말요? 오늘 끝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요. (웃음)
고아성: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자는 영화를 만드셨는데 기억력이 잘 안 따라주네요. (웃음)
문성경: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다 영화와 연결이 되어 있네요. 제가 이번에 감독님이 영화를 준비하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성 배우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류현경 감독님은 정말 영화를 너무 사랑하신다는 걸 느꼈어요. 스스로 글도 쓰고 연출도 하고 DCP 만들어서 배급까지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류현경: 옆에서 도와준 동료분들이 없었다면 이렇게 저 혼자 개봉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
문성경: 개봉 준비 하시는 SNS를 찾아보다가 고아성 배우님이 영화 한 줄 평을 적으신 걸 봤어요. “생생하고 나지막한 고백을 듣다.” 이런 표현을 쓰셨는데요. 그런데 “누구의 고백을 들었을까?”, “어떤 고백일까?”의 목적어가 너무 궁금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고 싶어요.
고아성: 저도 류현경 배우이자 감독님이 1인 배급사까지 차려서 영화를 만드신 걸 보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한 줄 평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네다섯 개를 써서 보냈는데 그중에서 하나를 고르신 거예요. 저는 이 영화에서 마지막 낭만이 느껴지는데 조금은 궁상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 고백을 자기 자신에게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윤가은: 저는 한 줄 평을 쓰지는 못했는데요. (웃음) 처음 영화를 보고 너무 좋아서 류현경 감독님께 새벽까지 문자 폭탄을 보냈어요. 이 영화가 정확히 반으로 접히는 영화인데요. 깔깔 웃으면서 시작했다가 마지막에 눈물이 흐르는데, 너무 오랜만에 흘리는 종류의 눈물인 거예요. 완전 새롭다기 보다는 내가 이미 알고 있고 좋아하는 종류의 눈물인데, 너무 오랜만에 이런 감정을 느껴서 “이게 뭐지?”하고 놀랐어요. 어떻게 보면 되게 개인적인 감정인데, 동시에 피하고 싶고 숨기고 싶었던 나의 어떤 모습을 마주하는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 있어서도 저는 너무 놀라웠는데요. “이런 용감한 선택들을 어떻게 해나갔을까?”,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영화를 완성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 안에 깃든 용감함과 담대함이 연출로서 잘 느껴졌던 것 같아요. 요새는 도대체 새로운 영화란 무엇인지에 관한 고민을 계속 하게 되잖아요. 이 영화가 그 고민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은 것 같아서 동료들끼리 “조금 긴장해야겠다”는 이야기를 요새 많이 해요.
류현경: 배우님, 감독님께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너무 감격스럽네요. 오늘 끝나고 맛있는 식사 사드려야겠어요. (웃음)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고백하지마〉가 〈하나, 둘, 셋 러브〉라는 영화에서 기생한 영화인데요. 영화 촬영 마지막 날에 빌린 촬영 장비를 바로 반납하기 아까워서 ‘우리 뭐라도 하나 찍어보자’ 하고 찍은 결과물이예요. 그런데 음향 기사님이 퇴근을 하셔서 아이폰으로 녹음을 했어요. 그래서 영화를 다시 보시면 누군가가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를 계속 들고 있어요. 와이어리스 마이크 대신 그걸로 다 녹음을 한 거예요. 그 상태로 충길 배우와 아무거나 재밌는 거 해보자는 식으로 시나리오도 없이 카메라를 켰는데 충길 배우가 갑자기 고백을 할 줄은 몰랐어요. (웃음) 처음에는 지금 나온 분량보다 훨씬 더 길게 찍었는데 편집을 하다보니까 너무 재미있는 거죠. 그래서 제가 둘의 이야기를 더 찍어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렇게 시작된 영화예요.

문성경: 아까 윤가은 감독님이 영화가 정확히 반으로 접힌다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앞부분은 배우 워크숍 같은 해프닝처럼 찍혔는데, 장소가 부산으로 바뀐 이후부터는 영화적 구성이 잘 갖춰져 있거든요. 부산 이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 가셨나요?
류현경: 앞부분을 다 찍고 편집을 하는데 촬영된 소스들이 너무 괜찮은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충길이랑 잘 되는 것도 찍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김오키 감독님, 충길 배우에게 한번 이야기를 해봤더니 어떤 장면을 찍고 싶냐고 물어보셨어요. “마지막에 둘이 해변 같은 곳에서 같이 걸어오는 장면을 찍고 싶다”라고 하니까 김오키 감독님이 부산 공연을 잡겠다고 하셨어요. 부산에서 공연을 하고 부산 뮤지션들도 다 섭외 하겠다고 프로듀서처럼 다 도와주셨던 기억이 나요.
문성경: 감독으로서 윤가은 감독님이 보시기에 후반부에 인상적인 장면이 있으셨나요?
윤가은: 기승전결을 해체하는 종류의 구성이라고 해야 할까요. 일단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정말 끝까지 몰랐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 게 아니라 가야 할 곳에 가서 너무 놀랐거든요. 부산 가서 돌아다니는 장소들이 우연히 교차하는 구성은 미리 생각해 놓고 오셨을까, 아니면 현장에서 영감이 떠오른 거였을까 이런 것도 너무 궁금했고 타로 보는 장면이랑 옷가게 장면도 너무 좋았어요. 타로 볼 때 현경이 질문을 쏟아내다가 자기 감정이 올라오는 거잖아요. 그때 느껴지는 현경의 외로움이라든가, 충길도 옷가게에서 너무 열심히 하다가 결국 사장님한테 혼이 나고요. 그런 순간들을 어떻게 포착하셨는지 너무 궁금했어요.
류현경: 처음에는 어디서 어디로 걸어가고 어디서 택시를 타고 가고 어디서는 뭘 하는 그런 동선으로 구성했어요. 그랬더니 김오키 감독님이 “아니, 왜 택시 타고 가지? 걸어가지”라고 하시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혹시라도 둘이 마주치지 않을까, 이런 장면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냥 걸어가자고 한 거였어요. 그래서 원래는 〈접속〉에서 봤던 느낌처럼 그런 장면들을 더 많이 넣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되니까 “그러면 걸어가다가 그냥 모른척하고 지나가” 이런 식으로 찍었어요.
그리고 옷가게 사장님은 정말 기적이에요. 김오키 감독님이 아시는 빈티지 옷가게였는데, 원래는 사장님이 출연하시기로 했어요. 그런데 대사를 드렸더니 못 하겠다고 하셔서 직원분이 대신해 주신 거거든요. 그래서 “면접 볼 때 뭐 물어보세요?”라고 여쭤봤더니 보통 본인이 입고 있는 옷을 설명해 보라고 하신대요. 그래서 원래는 짧게만 찍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충길 배우가 계속 설명을 한 거죠.
그런 우연들이 있었고 타로 장면 같은 경우는 조금 아쉬운데요. 충길 배우도 그렇고 김오키 감독님도 그렇고 제가 정신과 상담 받듯이 하소연을 계속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제가 제 이야기를 하면서 연기를 못 하겠는 거예요. 그래서 보시면 계속 점프 컷이거든요. 아직 저는 류현경으로서 카메라 앞에서 솔직하지 못 하다는 걸 느껴서 스스로 너무 놀랐어요.
문성경: 저는 타로 장면에서 되게 놀랐던 게, “타로 볼까요?” 말하기 전에 순간 아무 말도 안 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 순간이 너무 값진 거예요. 이런 판단은 감독이면서 배우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류현경: 맞아요. 즉흥적인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고아성 배우님은 이렇게 즉흥적으로 연기시키는 감독 괜찮으세요?
고아성: 아직 공개는 안 됐는데, 올해 윤가은 감독님과 〈자연스럽게〉라는 단편을 촬영했어요. 진짜 자연스럽게 찍으시더라고요. 그냥 자연 그 자체였어요. (웃음)
윤가은: 한 신마다 대사가 한두 줄 정도 있어요. 배우님께 대사 한두 줄을 드리고 “5분을 채워주세요” 하는 거죠. (웃음) 어린 친구들도 같이 나오는데 그 친구들도 모두 배우님께 맡겼어요.
고아성: 저도 사실 이런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어요. 준비를 해 가야 카메라 앞에 섰을 때 자신 있어지거든요. 그런데 감독님과 작업 해보니까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라고 느껴서 〈고백하지마〉를 보면서 어떻게 보면 내가 겪은 경험과 비슷한 현장으로 흘러갔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성경: 저는 연기를 해본 적이 없어서 배우이신 두 분께 궁금한 게 있어요. 가상의 캐릭터가 실제 나와 너무 다를 때 느끼는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혹은 이런 캐릭터를 연기할 때 자연스럽게 나의 모습과 어떻게 잘 버무리시는지 궁금해요.
고아성: 이 질문에서 현경 언니와 저의 의견이 완전히 갈려요. 현경 언니는 “연기는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주의고 저는 완전한 ‘나’는 아니더라도 그런 모습도 연기로 해 나갈 수 있다는 주의예요. 이 차이가 재미있었어요. 저는 결국 사람이라는 게 이런 모습도 있고 저런 모습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단면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람을 하나로 정의할 수 없잖아요. 어떤 역할을 맡든 나에게 이런 면모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모습을 조금씩 끌어내려고 하는 편인 것 같아요.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자아가 되게 좁은데요. 잘 바뀌지 않고 늘 이 상태로 조용히 움직이는데, 현경 언니는 정말 열려있는 사람이고 실제로도 다채로운 면이 많다보니까 그런 연기도 가능한 것 같아요.
문성경: 영화의 두 번째 부산 장면이 시작될 때 연기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사도 나오잖아요. 항상 선택을 받아야 하는 직업인데 들어오는 일은 없고 오디션을 봐도 계속 떨어지고 7년을 넘게 연기를 했는데도 지금 뭘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대사가 있어서 〈여배우는 오늘도〉의 장면들이 떠올랐어요. 배우로서 느끼는 힘듦이 있는데, 이걸 감독의 입장에서 찍으셨잖아요. 현장에서 연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스스로 감독으로서 컷 사인도 해야 되고 또 완벽하게 짜여진 대본을 따르는 영화가 아니다 보니 계속 설정을 추가하거나 바꿔야 하는데, 그 역할들을 계속해 나가기가 조금은 혼란스러울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이럴 때 최대의 힘을 발휘하는 자아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졌어요.
류현경: 막상 촬영할 때는 그렇게까지 혼란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닥치는 대로 신나게 찍기도 했고 사실 영화로 완성될 거라고 상상을 못 했어서 그런지 모두가 부담 없이 편한 마음이었어요. 같이 촬영한 배우들도 편하고 재미있게 연기했던 것 같아요. 재미있어해 주셔서 오히려 저는 너무 감사했어요. 그래서 그런 식의 고민이나 걱정은 없었고 후반 작업을 할 때가 되어서야 “이게 진짜 영화로 만들어지는 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하면서 정신이 번뜩 들었어요. 그런데 서울독립영화제에 초청되면서 정말 영화가 되는 구나, 극장에서 틀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성경: 확실히 후반에 가서는 감독 자아가 강해졌던 거군요. 류현경 감독님, 윤가은 감독님께 약간 조심스러운 질문일 수도 있는데요. 영화를 소개할 때 감독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오듯이, 감독이 영화와 관련된 최종 결정을 다 하는 사람이잖아요.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 준비를 다 하고 ‘내 영화를, 내가 그리는 세계를 잘 만들어야겠다’는 각오로 현장에 들어가시죠. 그때까지는 감독의 힘이 세요. 그런데 막상 촬영이 시작되면 배우가 그 세계를 만들어줘야 하잖아요. 시나리오 속 대사와 감정들을 배우가 표현해줘야 하니까요. 그렇게 되면 배우의 힘이 커지는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배우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영화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편이기 때문에, 현장에서 탁구 게임처럼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에너지를 주고받는 순간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으세요?
고아성: 네, 저는 경험했어요. 윤가은 감독님과 단편을 찍었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연극은 연습을 연출자와 배우들이 같이 하다가, 무대에 서고 나면 연출자가 공연을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무대에 올라간 순간부터는 공연을 온전히 배우의 손에 맡긴대요. 그래서 즉흥적으로 자연스럽게 영화를 찍는 방식도 연극의 그런 단면과 닮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저도 “그러면 한번 내 마음대로 해봐야지, 꿈을 펼쳐봐야지”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지만, 막상 감독님이 컷을 외치는 순간에는 눈치를 보게 되더라고요. 역시 영화는 감독님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웃음)

문성경: 윤가은 감독님, 이번에 〈세계의 주인〉을 찍을 때 정해진 대사를 현장에서 배우가 고친 사례가 있었나요?
윤가은: 저는 사실 시나리오를 쓰고 캐스팅까지가 감독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을 늘 해요. 예전에 어떤 훌륭한 감독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감독이 시나리오를 잘 쓰고 배우가 그 시나리오를 잘 알아봐줘서 훌륭한 배우가 오면 감독은 현장에서 자더라도 좋은 영화가 나온다고 하셨어요. 저는 그 말을 정말 믿거든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따로 없다고 생각하면서 역할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님을 열심히 찾는 거죠. (웃음) 훌륭한 배우가 캐스팅되어야 하니까 그만큼 시나리오에 더 공을 들이게 되는 거고요. 특히 이번에 아성 배우님과 작업할 때 많이 느꼈는데요. 시나리오에 대사 두 줄 써 있는 장면을 정말 많이 준비 해 오시는 걸 보고 놀랐어요.
이번에 류현경 감독님은 감독이면서 동시에 배우로 연기도 하셨잖아요. 저는 감독으로서 현장 밖에 있으면 비교적 안전하다고 느끼는데, 반대로 배우는 현장 안에 있으니까 더 위험하고 힘들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감독은 카메라 뒤에서 배우를 링 위에 올려 보내는 사람이잖아요. 배우는 링 안에서 링 밖에 있는 나 대신 싸워주는 사람인거죠. 그래서 배우가 감독에게 기대고 싶을 때 감독은 “배우님 괜찮아요”, “이렇게 연기해 주세요”라고 의지할 곳을 내줄 수 있는 위치인데, 혼자 감독과 배우를 동시에 하면서 그 기준을 어떻게 정하셨는지가 정말 신기했어요.
류현경: 저는 아역 출신이지만, 중학교 때 단편을 한 번 찍은 적이 있어요. 학교에 비디오반이 있었는데, 그때 당시에 ‘YMCA 영화제에 중·고등학생 단편을 내야 된다’는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학교에서 홈 비디오로 영화를 찍었는데, 그때 제가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도 하고 연출도 했어요. 그때도 친구들이랑 같이 놀면서 찍었는데, 그게 또 EBS에 방송이 되었어요. 평론가님이 평론도 써 주시고요. 〈불협화음〉이라는 영화였는데, 왕따 이야기였어요. ‘화음이 맞지 않는다’는 의미로 어린 시절의 분노 같은 걸 담았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러다 배우 활동을 하면서 그런 현장을 많이 만나게 되었던 것 같아요. “내가 이 영화의 주인이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좋은 감독님들을 많이 만나서 그런지, 그런 경험들이 자연스럽게 쌓여 온 것 같아요. 그래서 학교 졸업 작품도 제가 출연하고 연출하고 시나리오를 썼는데 그때는 약간 불안하더라고요. 3일 촬영 일정이었는데 한 달 반 정도의 준비 기간동안 촬영 감독이었던 언니랑 한 달 반을 합숙했는데요. 제가 거의 매일 언니 집에 가서 “나는 이런 걸 하고 싶다”, “이런 장면이 있으면 좋겠다”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정말 일사천리로 진행이 잘 되더라고요. 아무튼 그때는 너무 불안해서 “나랑 같이 아무도 안 해 줄까 봐” 무서웠던 기억이 나요.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작업했던 것 같아요.
윤가은: 그 말씀을 계속 들으면서 느낀 건, 우리가 영화를 꿈꾸고 좋아할 때는 영화가 놀이처럼 느껴지는데, 이게 일이 되고 직업이 되면서부터는 계획을 세우고 돈이 들어가고 한 번 세운 계획은 약속이니까 쉽게 바꾸기 어렵잖아요. 그런데 이 영화는 진짜 놀이처럼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들어요. 영화라는 형태로 완성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유연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다시 볼 때마다 처음 봤을 때랑 또 다른 감상을 하게 되고 “이게 이런 구조였나?” 했다가 “아니었네, 이렇게였네” 하고 계속 새롭게 발견하게 되거든요. n차 관람하시는 분들은 분명히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게 놀이로서 접근했기 때문에 가능한 건가 싶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놀이처럼 계속 작업하실 생각이신가요?
류현경: 구성이 너무 새로워서 시리즈처럼 〈고백하지마 2〉를 찍고 싶다고 충길 배우에게 말한 적이 있어요. 이번에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둘이 같이 사는 얘기를 해보자. (웃음) 그런데 거절하더라고요. 내일 충길 배우와 함께 하는 GV가 있는데, 그때 다시 말을 꺼내봐야 할 것 같아요. 아니면, 〈결혼하지마〉, 〈이혼하지마〉 이런 시리즈로 연결해 보려고도 했는데 안 될 것 같고요. (웃음) 아니면 아예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시나리오를 써놓은 게 있기는 해요.
문성경: 류현경 감독님이 단편도 만드신 거 알고 계시나요? 〈날강도〉라는 영화인데요. 이외에도 가수 정인님의 뮤직비디오도 연출하셨어요. 물론 최종본은 아니겠지만, 다음 시나리오도 제가 읽어봤는데 이 모든 작품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항상 ‘사랑’이라는 주제에 천착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날강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느꼈던 공통적인 감정이 있어요. 처음에는 〈고백하지마〉처럼 되게 가볍고, 웃기는 감정인데, 점점 갈수록 관계의 진중한 상황들이 나오거든요. 그럴 때마다 ‘류현경’이라는 인물이 배우나 일반인으로 살아오면서 연인 관계든, 사랑이 미묘하게 어긋나는 관계든 이런 관계들을 지켜보는 힘이 되게 크다는 걸 느꼈어요. 그리고 관계에서 나오는 날것의 감정들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밖으로 꺼내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관객: 작품을 연출하실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충길 배우님과의 호흡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류현경: 너무 즐거운 우연들이 자주 일어나서 재미있게 찍었어요. 얼마 전에 김의성 선배님과 GV를 같이 한 적이 있어요. 선배님이 “충길 배우는 왜 이렇게 말이 많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웃음) 촬영할 때도 말을 조금 줄여달라고 했는데도 계속 말을 이어가서 제가 영화에서 “너 왜 이렇게 말이 많니?”라고 말한 것도 괜히 나온 대사가 아니었던 거였어요. 충길 배우의 말을 조금 자제하고 그런 장면들을 편집하는 게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웃음)
관객: 나중에 또 연출을 하시게 된다면 도전해 보고 싶은 이야기나 장르가 있으신가요?
류현경: 〈고백하지마〉를 찍으면서 느낀 건, 저는 여정을 그리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이 영화도 고백 이후의 여정 같기도 하고요. 이런 여정을 그려 나가는 걸 좋아해서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이야기를 만들지 않을까 생각해요.
관객: 영화 제목이 〈고백하지마〉인 이유가 있나요?
류현경: 김충길 배우님이 몇 년 전에 ‘고백하지마’라는 음원을 냈어요. 그 노래를 다 같이 들으면서 이 영화의 제목은 ‘고백하지마’가 될 거라고 계속 이야기했어요. ‘고백하지마’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이기는 하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는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지 말자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 지금 현재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제 나름대로의 해석을 더해서 제목을 지었습니다.
문성경: 영문 제목이 ‘Don't go back’ 인데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기도 하고 연말인 만큼, 세 분께 연말연시에 관객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영화를 한 편씩 추천 받으면서 오늘 자리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윤가은: 극장에 다시 오셔서 〈고백하지마〉를 한 번 더 보시면 저처럼 새로운 감상을 느낄 수 있으실 것 같아요. 저는 이 영화가 영화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선언처럼 느껴지는데요. 그래서 영화를 볼 때마다 너무 새로워요. 저에게 계속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건 영화라는 예술이 장난감처럼 바꿔 놀 수 있는 말랑말랑한 것일 수도 있는데, 그동안 왜 이렇게 각을 잡고 했는지 계속 고민하면서 보게 되
더라고요. 조금은 편안하게 앉아서 “이 영화랑 놀아야지”라는 마음으로 보시면 영화를 완전히 다른 매체처럼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번 더, 두 번 더, 세 번 더 보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고아성: 저는 마지막 인사로 영화 추천보다는 올해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아까 류현경 감독님을 보고 ‘인간 시네마’라고 했잖아요. 몇 달 전에 제 집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 있었는데, 언니가 용산 아이맥스에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보고 저희 집으로 오는 길이었어요. 제가 주차장까지 마중을 나갔는데, 그러다가 제가 보이니까 창문을 내리면서 “진짜 아이맥스로 봐야겠더라” 하면서 주차를 하는데 그때 언니에게서 진정한 시네마적인 모먼트를 느꼈어요. 이 사람의 영화적 열정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에피소드를 공유해 드리고 싶었어요. 오늘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류현경: 뒤에 있는 GV 백월도 다 제가 만들었어요. (웃음)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는 1인 배급으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고백하지마〉 많은 응원과 관심 부탁드리고 SNS에도 많이 공유해주시면 저도 열심히 또 여러분들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성경: 윤가은 감독님이 하신 말씀이 너무 이해가 돼요. 저도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1년에 몇 백 편씩 영화를 보는데, 첫 번째 장면 뒤에 뭐가 나올지 바로 예상이 되는 영화들이 최근 들어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데 〈고백하지마〉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되게 독특했고 영화를 다시 보면서 저는 찰리 채플린이 떠올랐어요. 배우의 존재감이 뚜렷하고 결국 자신이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도 머릿속에 전부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영화로 완성하고 직접 제작에도 참여해 가는 모습을 보고 초기 영화에 있던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형태가 ‘류현경’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다시 가능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를 보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참여해주신 윤가은 감독님의 〈세계의 주인〉도 20만 관객을 달성할 수 있게 한 번씩 더 봐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고 〈고백하지마〉도 색다른 비하인드를 들을 수 있는 다른 GV가 많이 예정되어 있으니까 한 번 더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류현경: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었습니다. (웃음) 함께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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