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나날〉리뷰: 오래된 방식으로 현재를 위로하는 방법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보민 님의 글입니다.
타지에 오래 살다 보면 감각이 둔해지는 걸 느낀다. 과거 몸담았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실존적 위기가 한데 뒤섞이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지루해진다.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일상적 풍경에서 벗어나 낯선 곳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행과 나날〉은 스크린을 가로질러 관객에게까지 그 체험을 생경하게 전한다.

미야케 쇼의 최근 작품들은 주로 특수한 어려움에 처한 개인이 스스로 묵묵히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과정을 그려냄으로써 위로의 메시지를 던져 왔다. 여기에서 주인공들은 공통적으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경험을 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는 청각장애를 지닌 주인공이, 〈새벽의 모든〉에는 PMS 증후군과 공황장애가 있는 각각의 인물이 등장한다. 자신의 삶과도 같은 복싱장이 문을 닫고, 걷잡을 수 없는 자신의 행동이 주변 사람들을 상처 주는 상황들. 그리고 〈여행과 나날〉의 '이'에겐 자신의 업(業)인 글쓰기에 슬럼프가 찾아온 것이 그녀의 삶이 무너질 수도 있었던 순간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이'는 도시에 오래 거주한 사람답지 않게 옛 방식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노트북으로 글을 타이핑하는 대신 흰 종이 위에 연필로 꾹꾹 글씨를 새겨넣고, 숙소를 미리 예약하는 대신 현지에 직접 도착해서야 방이 있는지 묻는다.
주인공이 택하는 모든 방식은 사실 꽤나 번거롭다. 종이에 쓴 글자는 문서로 한 번 더 옮겨져야 하고, 방이 없다는 무안한 안내에 여러 번 헛걸음해야 한다. 하지만 그 끝에 도착한 낡고 오래된 '벤조'의 여관은 창작의 공간이 되어 새로운 감각을 깨워준다.

그녀의 슬럼프는 자신의 각본이 스크린으로 옮겨졌을 때 찾아온다. 영화의 도입부, 손글씨로 또박또박 작성된 묘사가 영상으로 변환되었을 때, 예상과 달리 영화가 불안의 정서를 가득 안으면서 괴리가 시작된다. 관객이 그녀의 슬럼프를 알아채리는 결정적 장면은 GV 장면이다. 자신감 없는 모습으로 감독과 나란히 앉은 이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으로 관객의 질문에 답한다. 한 관객이 각본을 썼을 때와 영화로 옮겨졌을 때 어떤 점이 달랐는지 묻자 그녀는 입을 열어 슬럼프를 고백한다. 자신은 각본을 쓰는 데 재능이 없다고.
하지만 영화가 아닌 그녀의 진짜 여행이 시작되자, 극 중 극에 도사리고 있던 죽음의 기운은 이내 생명의 활기로 요동친다. 얼어 죽어 있던 물고기는 헤엄치는 비단잉어로 나타나고, 가만히 앉아 글만 쓰던 그녀는 벤조와 함께 강가의 눈을 밟고 잉어를 잡기 위해 움직인다. 그녀가 각본에 담고 싶었던 것은 스산한 불안감이 아니라 이런 생동감이었을 지도 모른다.
영화는 순백의 눈밭을 가로지르는 이의 발걸음으로 끝을 맺는다. 관객의 기억에도 티 없이 흰 것이 자리 잡는다. 깨끗한 눈의 감촉이 내 손에도 남겨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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