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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한란〉: 과거로의 전진

by indiespace_가람 2025. 12. 15.

〈한란〉리뷰: 과거로의 전진

* 관객기자단 [인디즈] 강신정 님의 글입니다.

 

 

가끔은 세상이 너무 빠르다. 미래라 생각했던 것들이 눈 깜짝할 새 현실이 되어 있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 체 시간만이 흐른다. 그런 우리를 위해 잠시 뒤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가 있다. 잃어버렸는지도 몰랐던 분실물을 손에 쥐여주는 영화가 있다.

 

영화 〈한란〉 스틸컷

 

영화 〈한란〉은 1948년 제주 4·3 사건의 기록을 2025년의 우리에게 내민다. 제주 해녀 ‘아진’과 어린 딸 ‘해생’의 여정을 중심으로 재구성된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우리를 붙든다.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다른 영화들을 생각했을 때, 〈한란〉은 유독 설명적 요소를 덜고 희생자 개개인을 진득이 비춘다. 역사책보다는 누군가의 일기를 그려낸 것 같다. 이 지점에서 작품의 평가가 갈릴 수는 있겠지만 나는 감독의 선택을 이해한다.

 

그때 그곳의 고통을 지금 여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큰 사건보다 작은 개인에 집중하는 방법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영화가 아진-해생 모녀와 주변인들을 지겨울 만큼 따라다닌 건, 영화를 거대한 서사가 아닌 우리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가 아닐까. 특히나 바삐 흐르는 시간을 잠시 멈추고 객석에 앉기로 한 관객을 빠르게 공감시키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영화 〈한란〉 스틸컷

 

그 선택 덕에 우리는 아진-해생의 이야기가 1948년의 제주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비극임을 쉽게 느끼게 된다. 아진-해생의 공포와 무력감은 작년 12월의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느껴본 종류의 고통이지 않은가. 이런 영화가 여전히 필요한 건 그래서다. 과거의 비극은 늘 다른 얼굴로 우리를 찾아온다. 앞만 보는 자에겐 그 얼굴을 알아보는 능력이 없다.

 

국가 차원의 폭력을 멈춰 세운 건 언제나 과거의 흉터를 기억해 오늘의 상처를 재빠르게 봉합해 낸 이들이었다. 때로 트라우마는 좋은 위험 감지 센서가 되기도 하니까. 어둠을 기억하는 자는 또다른 어둠이 와도 출구를 찾을 수 있다. 어둠을 지나온 우리는 그 전과는 다르다. 동굴에 숨어 있기보다 터널을 통과한 덕에 아진-해생은 바다를 만난다. 비록 그들의 여정은 총성에 가로막혔지만 그 기억을 이어받은 영화가 있다. 2시간 동안만이라도 그때를 다시 되새기기로 마음먹은 관객이 있다.

 

영화 〈한란〉 스틸컷

 

“말은 흩어져도 글은 오래오래 남는다”는 아진 대사를 완성하는 건 남겨진 우리의 몫이다. 그때의 사람들과 오늘의 영화는 기록을 남겼다. 그 어둠의 흔적을 매 순간 기억하고 살 순 없어도, 과거에 두고 오지만 말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모두가 함께 뒤를 돌아보면 그것은 전진이 된다. 영화를 보고 난 우리의 고개는 앞만 바라보던 이전과는 분명 다른 곳을 향해 있을 것이다. 좋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또 한 번 뒤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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