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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기획] 〈3학년 2학기〉: 소외된 이름의 복원

by indiespace_가람 2025. 11. 6.

 〈3학년 2학기〉  비평 | 소외된 이름의 복원

* 관객기자단 [인디즈] 정다원 님의 글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바야흐로 경계의 시기다. 혹여 키가 더 클까 부러 크게 맞춘 교복을 덜그럭대는 아이들을 보며 몸에 꼭 맞는 자신의 교복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길거리를 능숙히 누비는 다양한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제 미래를 점치다 불안에 휩싸이기도 하는, 그런 시기. 영화 〈3학년 2학기〉는 이런 불안의 시기를 내걸고 시작한다. 영화는 시작부터 창우의 노동하는 손을 클로즈업하며 배경을 교란한다. 관객들이 기계를 다루는 쉴 틈 없는 손을 보며 노동 현장과 학교 사이에서 길을 잃은 사이, 그곳이 교내의 실습실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드러내며 창우의 세계를 비춘다.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영화에서 창우는 늘 결정을 타인에게 미룬다. '내신도 낮고, 자격증도 없는' 이란 수식어를 자신에게 붙여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 좋게 봐줄까요?"라고 묻는다. 그는 친구와 선생님, 엄마에게 선택을 떠넘기며 실습을 나가게 된다. 스스로의 삶을 이끌 선택에서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창우 개인의 성격에서 비롯된 문제만은 아니다. 영화는 그가 선택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인 이유를 하나씩 드러낸다. 실습 없이 졸업한다면 취업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압박, 동생의 한 짝뿐인 무선 이어폰, 생활비를 보태야 하는 가족. 이러한 창우를 둘러싼 상황들은 선택을 가능성의 문제가 아닌, 조건 내에서 허락된 제한적 행위로 만든다. 창우가 스스로를 '내신도 낮고 자격증도 없는' 존재로 규정하는 순간, 그는 이미 자신을 노동력으로만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속에 위치시킨다. 그는 이러한 소외의 현장에서 누군가의 요구에 따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학교의 컴퓨터실에서 자기소개서를, 공장에서의 일과를 작업일지에 쓴다. 정작 자신은 소외된, 자신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본인이 부재한 일기에는 자연스레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 줄 이상은 꼭 써야 한다는 담임선생님의 당부에 맞추어 창우는 꼭 세 줄씩만 쓴다. 한 줄을 쓴 우재에게 세 줄을 쓴 창우가 타박을 놓으며 어린 미소로 웃는 장면은 그들의 나이를 다시금 상기시키며 이러한 '소외'의 기록에 대한 슬픔을 자아낸다.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영화는 이렇게 잃어버린 창우의 이름을 되찾아주려는 듯하다. 영화는 노동자의 삶, 특성화고 학생의 삶, 현장 실습생의 삶이 아닌 '창우'라는 고유한 존재로 그를 호명한다. 그의 이름을 또박또박 써 내려가며 통계나 기사 속으로 사라진 이름들을 떠올리게 한다. 직업계 고교(특성화고) 현장실습생을 산업재해 사고로만 기억하는 사회에, 그들을 '살고 있는 존재'로서 이야기하고자 했다는 감독의 의도는 여기서 선명히 드러난다. 영화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그들의 삶을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창우의 흘러가는 삶을 응시하며 이름이 지워진 이들의 세계를 조용히 복원한다. 그리고 소외된 '창우'를 건져 올린다. 창우는 영화 전반에 걸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용접 앞에서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무언가를 말할 때 자신의 언어가 아닌 늘 선생님과 엄마, 선임들의 언어를 빌려 말하던 창우는 처음으로 "용접 재밌어요"라는 자신만의 언어를 내뱉는다. 다른 이들의 대사를 반복하는 듯한 창우의 화법은 그 순간 자신만의 대사를 찾게 된다. 창우는 이후 처음으로 자신이 소외되지 않은 기록을 길게 써 내려간다. 그리고 영화에서 처음으로 책상에 앉는다. 용접기를 든 그의 뒷모습은 마치 연필을 들고 책상에 앉은 학생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열중하는 창우의 얼굴과 책상에 놓인 연습 종이, 둥글리는 용접기를 비춘다. 이후 이어지는 창우의 용접 장면은 창우의 경계를 확장시킨다. 그런 그를 응시하는 카메라는 어리바리한 실습생에서 작업자로, 작업자에서 노동의 즐거움을 아는 한 인간으로 그를 다시 호명한다. 용접은 단순한 노동이 아닌, 창우와 사회라는 새로운 세계를 잇는 행위가 된다.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이렇게 창우의 삶은 계속된다. 영화는 뚜렷한 극적 사건 없이 창우의 시간을 체험하게 한다. 친구 우재가 공장을 박차고 나가는 것을 보고, 별로 친하진 않았지만 나와 같은 길을 걷던 '선배'의 죽음을 목격한다. 영화는 창우를 바꾸는 서사적 사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그를 둘러싼 거대한 세상이라는 사건을 목격하게 만든다. 창우는 이 순간 당사자와 목격자의 경계에 놓인다. 이는 경계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창우는 학생과 사회인, 목격자와 당사자, 아이와 어른, 보호자와 피보호자 사이에서 조금 느리더라도 묵묵히 삶을 전개한다. 이런 삶을 지나며 창우는 성장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 〈3학년 2학기〉는 노동 영화를 넘어 한 인간을 둘러싼 거대한 성장담이다. 노동을 하며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초상이자, 경계에 선 모든 이들을 위로하는 기록이다. 

이러한 착취 없는 노동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영화는 끊임없이 거리를 둔다. 감독은 창우를 향한 연민을 과시하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시네마스코프로 그와 그를 둘러싼 세계를 오래 보여준다. 창우의 뒤편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기계, 작업장의 소음과 같은 그가 살아가는 환경의 일부를 제시한다. 영화는 특정 인물의 감정에 함몰되지 않고, 그가 놓인 세계 전체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제시하며, 그가 살아 있는 세계 자체를 증언한다. 이 거리감은 관객의 위치를 묘하게 흔든다. 관객은 창우를 연민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점차 벗어나,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조를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창우를 응시하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현실의 관찰자이자 방관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이 불편한 자리를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선의 윤리'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카메라는 결코 개입하지 않고, 관객에게 스스로의 시선을 반성하도록 요구한다. 영화의 그저 '바라보는' 행위는 증언이 된다. 이러한 삶의 증언은 '살아 있음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현장에 간 학생이라고 해서 사고를 떠올리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인식하게 만든다. 이는 영화가 선택한 윤리적 태도이다. 영화는 감정적 호소나 사회적 비판이 아닌, 세계를 살아내고 생각하게 만든다. 존재를 증명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도리어 존재의 강력한 증언이 된다. 이로써 영화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 아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을 기억하게 만든다.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기사 속의 건조한 텍스트와 통계의 숫자에 들어간 삶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괴롭다. 그렇기에 영화 〈3학년 2학기〉의 첫 시퀀스를 보는 순간, 많은 이들이 이미 결말을 예감하며 두려움을 품었을 것이다. 영화 속 위험 요소들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비극의 기억들이 교차하며, 작업장의 기계 소음이 어느 배경음악보다도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소음을 가르고 흘러나오는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대화 소리는, 그 두려움을 부끄럽게 만든다. 영화는 피해자의 자리를 보여주는 대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조용하지만 가장 투쟁적인 작품이다. 큰소리를 내지 않고도 연민 어린 시선을 찌르고,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만든다.

이 조용한 투쟁은 관객의 시선을 확장시킨다. '수능을 치는 학생들'이라는 익숙한 풍경을 넘어,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버티는 모든 청소년을 바라보게 만든다. 나는 영화를 보며 아주 단순한 바람을 품었다. 땀 흘리며 삶을 지탱하는 모두가 조금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것, 서로의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면 좋겠다는 것. 이런 당연한 것들에 간절히 손을 모아 기도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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