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세계의 주인〉: 사랑의 세계

by indiespace_가람 2025. 11. 3.

〈세계의 주인〉리뷰: 사랑의 세계

* 관객기자단 [인디즈] 서민서 님의 글입니다.

 

 

* 영화에 대한 강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계의 주인〉 관람 후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우리가 영화를 찾는 이유 중 하나는 눈앞의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계로 빠져들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현실과 너무 닮아 있거나 인물에게서 나의 어떤 부분들을 마주하게 되는 영화를 피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세계의 주인〉을 보고 이런 영화가 나의 삶에 너무나 필요하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세계의 주인〉은 나의 마음 한구석을 세게 꼬집었다. 아프기보다는 그 감정이 멍처럼 오래 남아있다.

주인(서수빈)은 하루를 꽉 채워 살아가는 여고생이다. 동생 해인(이재희)의 말을 빌리자면, 목소리가 크고 박수를 잘 치는 누나이자 친구들과 성에 관한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하는, 연애에도 관심이 많은 사춘기 소녀다. 하교 후에는 도장에 들르고 봉사활동 모임에도 빠지지 않으며 유치원 원장인 엄마 대신 집을 청소하고 밀린 빨래를 해치운다. 쉴 새 없이 흘러가는 평범하고도 익숙한 하루들이 주인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어느 날, 출소하는 아동 성범죄자가 동네로 돌아오는 것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에 홀로 거부하게 되면서 주인이 구축해 온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문제는 서명문의 내용에 있다. 성폭행 범죄는 피해자의 영혼을 완전히 파괴하고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것. 주인은 이 문장에 동의할 수 없다. 격하게 반발하는 주인의 모습이 의아스럽게 느껴질 때쯤, 영화는 주인과 가족이 지닌 오랜 상처의 안쪽을 꺼내 보인다.

주인이 과거 성폭행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고백한 뒤, 우리는 주인을 향하는 주변의 시선과 미묘하게 달라진 친구들의 태도를 느낄 수 있다.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사회의 고정관념은 아무렇지 않게 고통을 재단하며 피해자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제멋대로 단정 짓는다. 피해자가 피해자다울 때 그들의 아픔이 실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은 이 모든 편견을 거부하는 존재다. 우리 또한 은연중에 지니고 있던 우리 안의 편견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다.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그렇다고 주인에게 상처의 흔적조차 없다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타인이 남긴 상처는 주인과 가족에게 짙은 그을림처럼 남아있다. 죄책감에 딸의 연락을 받을 수 없는 아빠와 매일을 술로 버티는 엄마가 있다. 가해자에게서 온 편지들을 침대 밑에 몰래 숨겨온 동생이 있다. 그리고 남자친구의 애정행각에 잠시 주춤거리게 되고 주기적으로 마음속 응어리를 뱉어내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주인이 있다. 시간이 흘러 단단한 딱지가 지더라도 상처의 쓰라림은 삶의 어느 순간 불쑥 찾아오기 마련이다.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도장 한구석의 그을린 자국을 페인트칠해 덮어버리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존재하도록 두는 것처럼, 해인이 근심과 걱정을 없애는 마술에 실패해 버린 것처럼 영화는 인물들의 상처를 완전히 떨쳐 버리거나 삶의 한 부분에서 감쪽같이 지워내려 하지 않는다. 동시에 정형화된 피해자의 이미지를 벗어난 주인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하려 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주인의 세계 그 자체를 바라보고 상처도 삶의 일부분으로 함께 끌어안음으로써 주인을 응원한다.

그런 주인의 세계는 이미 커다란 사랑으로 채워져 있는 듯하다. 그 안에는 자식의 울부짖음을 담담히 받아내는 엄마와 조용히 누나를 위로하는 동생, 든든한 봉사활동 멤버들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바라 봐주는 친구가 있고 주인을 따라 끝내 용기를 내어 보는 익명의 누군가가 있다. 주인이 그동안 빈칸으로 남겨두던 장래 희망에 당당히 ‘사랑’을 적어 낸 이유다.

주인은 사랑으로 자신의 세계를 가꾸어 가는 사람이다. 분명 언젠가 과거의 상흔이 또다시 주인을 콕 찌르는 순간이 오겠지만, 그럼에도 주인은 지금처럼 사랑을 하고, 뛰어 놀고, 장난도 치고, 울고 웃으면서 세상을 향해 씩씩히 걸어 나갈 것이다. 그런 주인을 오래도록 꼭 안아주고 싶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