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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고통을 빌려오는 일
〈세계의 주인〉 그리고 〈우리집〉
*관객기자단 [인디즈] 강신정 님의 글입니다.
* 〈세계의 주인〉 관람 후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영화를 나쁘게 말해 보자면, 인물을 카메라로 잡아 스크린에 가두는 일이 아닐까. 스크린 속에서 배우는 감독이 원하는 대로 말하고 느끼고 움직인다. 그리고 그 목적엔 늘 관객이 연루된다. 관객을 웃기고 싶어서, 울리고 싶어서, 충격받게 하고 싶어서, 아무튼 무언가 느끼게 하고 싶어서. 다양한 이유로 만들어지는 영화 앞에서 관객은 방관자가 된다. 그러므로 고통을 다룰 땐, 감독은 더욱 큰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무신경한 연출은, 고통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에게도 그걸 지켜봐야 하는 관객에게도 폭력적인 일이니 말이다.
윤가은 감독은 그 책임의 무게를 잘 아는 사람 같다. 최근 개봉한 〈세계의 주인〉(2025)과 전작 〈우리집〉(2019)에서 그는 고통을 정확하게 다루는 데 성공한다.

〈세계의 주인〉은 18살 고등학생 ‘주인’의 일상을 통해 폭력 이후에 이어지는 삶을 그린다. 주인은 쾌활하고 장난스럽고 목소리가 크고 사랑에 잘 빠진다. 친구들과 시끌벅적하게 뛰어놀고, 공부도 연애도 열심히 한다. 같은 고통을 겪은 이들과 주기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태권도장에 다니고, 남동생 ‘해인’과 아웅다웅하고, 엄마와 잔소리를 주고받는다. 피해자라면 응당 지난 상처에 깊게 빠져 매 순간 허우적대야 한다는 편견은 주인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에게 흉터조차 없다는 것은 아니다. 세차장의 소음 정도는 돼야 묻힐 만큼 크게 악을 써야만 진정되는 순간이 있고, 엉겨 붙는 남자친구가 버겁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고, 어느 새벽 죄책감에 시달렸을 엄마의 토사물이 있다.
폭력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태권도장 벽지의 그을린 자국만큼만, 딱 그만큼 어둡다. 윤가은은 그 흉터를 과장해 새빨갛게 불태우지도, 새로 도배해 하얗게 뒤덮어 버리지도 않는다. 대신 삶의 한쪽에 가만히 놓아둔다. 그 곁에서 웃고 화내고 실수하고 용서받고 사랑하며 주인의 시간은 계속 흐른다.
주인에겐 커다란 고통보다 더 커다란 삶이 있다. 덕분에 주인은 자신의 삶이 “망가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이 꼬집은 만큼만 정확하게 아파할 수 있다. 스크린 안에 갇혀 피해자를 연기하는 배우가 아닌, 상처 입은 채 살아가는 모든 목소리가 될 수 있다.

〈세계의 주인〉이 흉 진 이후의 삶에 집중한다면, 〈우리집〉은 상처 입는 과정의 한복판을 함께한다. 초등학생 ‘하나’는 매일 싸우는 부모님이 이혼할까 불안해한다. ‘유미’와 ‘유진’ 자매는 부모님의 일 때문에 자주 이사를 하는 게 싫다. 각자의 집안 사정에서 비롯된 각자의 고통을 터놓으며 셋은 가까워진다.
아이들에게 가정은 삶의 전부와도 같아서, 집안의 작은 변화에도 세계가 뒤틀린다. 그 고통에 대처하는 방식은 서투르지만 진심이다. 하나는 다 같이 여행에 가면 부모님이 화해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가족여행을 가자고 조른다. 이런저런 재료를 섞어 밥을 차리고, 그 요리를 함께 먹으며 식구들도 다정하게 뒤섞이길 바라본다. 이사 가기 싫어하는 유미 유진 자매를 도와 자매의 집이 팔리지 않도록 같이 방해 공작을 벌이기도 한다.
그런 몸부림을 윤가은은 진지하게 대할 줄 안다. 영화 대부분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촬영되고 아이들의 목소리로 이야기된다. 아이들은 귀여움의 대상이 아닌 고통에 대항하는 주체로서 당당하다. 하나는 부모님이 왜 싸우는지 전부 알 수는 없지만 방문 너머 들려오는 진실을 들을 순 있다. 유미 유진 자매는 부모님이 집을 내놓았음을 너무 갑작스레 전달받지만 자신이 그 집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다. 모든 걸 알지는 못해도, 자신의 고통만큼은 정확히 알고 있는 아이들의 상처는 어른의 것과 다를 바 없이 고되다.

두 영화엔 영화 같은 기적이 없다. 누나를 괴롭힌 사람도 사람들의 걱정거리도 감쪽같이 없애버리고 싶지만, 사라지게 하는 데엔 번번이 실패하는 해인의 마술처럼. 그러나 억지로 무너지는 사람도 없다. 부모님이 이혼을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또 한 번 네 식구를 불러 모으는 하나의 달걀후라이처럼. 윤가은의 인물들에게 고통이라는 소재는, 극적으로 이기거나 져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이고 지고 살아가는 삶의 일부인 듯하다.
그래서 윤가은은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내기보다 누군가의 아픔을 잘 빌려오는 사람 같다. 살아있는 고통을 대여하는 동안 그것이 흠집 나지 않도록 조심스러우면서도, 하고자 하는 말을 덧붙여 반납할 만큼 용기 있다. 그 덕에 관객은 그가 빌려온 만큼 정확하게 고통을 읽을 수 있고, 그렇게 읽은 고통은 러닝타임이라는 대여 기간이 끝나 도로 돌려주고 나서도 내 것으로 남는다. 인물들은 허구의 주인공이 아닌 각 세계의 주인이 되고, 그들이 살아가는 곳은 너희 집이 아닌 우리집이 되며, 관객은 스크린 앞에 앉아 있기보다 그들 옆에 서게 된다.
윤가은의 영화에는 딱 이 세상의 심장박동만큼만 울려 퍼지는 고통이 있다. 그 고통은 슬프기보다 아프고 아름답기보다 자기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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