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2학기〉리뷰: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 관객기자단 [인디즈] 남홍석 님의 글입니다.
위험의 이미지
일하다 사람이 죽을 수 있는가?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모 건설사의 현장에서는 올해에만 4명의 노동자가 유명을 달리했다. 소비자들은 빈번한 산업재해에도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 기업을 불매하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뉴스 아나운서의 차분한 목소리로 전달되는 사고들은 조금 더 ‘특별한’ 다른 소식들―이를테면 유명 연예인의 결혼 소식이나 곧 개봉할 영화 같은―의 파도에 밀려 금세 기억의 저편으로 향한다. 역설적으로, 2025년 한국에서 ‘일하다 죽은 사람’의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오히려 생경하게 느껴진다. 이제 막 사회에 첫 발걸음을 내딛는 19살 청춘에게는 더욱더 그렇다.
〈3학년 2학기〉를 보고 있으면 끔찍한 상상을 계속하게 된다. 저 그라인더 날에 주인공이 베이진 않을까. 용접 과정을 지켜보다 눈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는 게 아닐까. 기계에 손발이 끼이는 사고가 나면 어쩌지. 조금은 느리고 서툰 창우가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은 혹시 사고가 일어나진 않을까 하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카메라는 노동의 순간을 줄곧 롱테이크로 담아 그러한 불안을 강화하려 든다. 이때 반복되는 창우의 손목 통증은 곧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고를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노동의 현장에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영화는 그동안 텍스트로 전달되었던 위험을 이미지로 관객들에게 상기시킨다.
하인리히의 법칙
노동 현장을 극영화로 옮기는 행위는 자칫하면 사고와 죽음을 스펙터클화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지닌다. 〈3학년 2학기〉는 죽음의 인과를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이를 타개한다. 수호의 죽음을 전하는 성민의 문자는 화면에 보이지 않고, 그가 ‘일하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만이 제시된다. 여기서 영화는 사고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거나,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이는 윤리적 선택일뿐더러, 산재해 있는 위협 중 그 어떤 것도 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이전에는 반드시 유사한 원인의 작은 사고와 징후들이 반복된다는 통계가 있다. 영화 역시 이 법칙을 따른다. 우재가 그라인더 작업을 할 때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실수를 반복하자, 몸을 보호해 줄 가죽 앞치마와 팔 토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실습 관리를 담당하는 대리는 상사에게 보고할 때 “저번에도 말씀드렸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미 언급했지만 개선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결국 보호장구는 사고 이후, 아니 성민이 용기를 내어 노무사에게 이를 전달하고 회사를 그만둔 후에야 지급된다. 사고 이후에도 행동하는 사람이 없다면 바뀌지 않는 세상. 어제도 죽을 뻔했다는 수호의 대사는 사고 이전에 발생했을 수많은 징조를 암시한다. 올바른 대처나 개선이 이루어졌다면 사고를 예방할 수 있었을까?
극장 안팎을 연결하기
불안과 상실의 아픔을 다루고 있음에도, 영화는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각자 다른 마음으로 창우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엄마와 동생, 장례식장 앞에서 말없이 다혜를 안아주는 알리, 차근차근 창우에게 용접을 가르쳐 주는 회사 선임까지. 연대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있는 한편, 이런 배경의 영화에서 익히 떠올릴 법한 전형적인 악역은 등장하지 않는다. 실습생과 갈등을 빚는 직원들이 존재하지만, 이들 역시 마냥 악역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결국 그들도 월급 지급 알림을 보고 미소를 짓고, 토요일에도 쉬지 못하고 일하는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놓치지 않는 것은 따뜻한 시선뿐만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가한 미묘한 폭력의 순간들 역시 카메라에 포착되어 있다. 이렇게 영화는 현실과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
회사에 남기를 택한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3학년 2학기〉는 바뀐 작업장의 모습을 희망차게 담는가 싶다가도, 무표정으로 일을 하고 있는 창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끝난다. 우리는 정식 직원이 된 창우가 앞으로 행복할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진 않을지 알 수 없다. 현실 노동자의 모습과 가까운 무표정은 잠시 후 관객들이 만나게 될 극장 밖의 세상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영화는 여기서 멈추고, 나머지는 스크린 밖 여러분의 몫이라는 것. 극장을 나와 마주친 영화 포스터 안에서 아이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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