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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단평] 〈3학년 2학기〉: 지워진 이름들의 세계

by indiespace_가람 2025. 9. 16.

 

*'인디즈 단평'은 개봉작을 다른 영화와 함께 엮어 생각하는 코너로, 

독립영화 큐레이션 레터 '인디즈 큐'에서 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지워진 이름들의 세계

〈3학년 2학기〉 그리고 〈천막〉 

 

*관객기자단 [인디즈] 강신정 님의 글입니다.

 

 

저마다의 능력을 발휘해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노동은 어느 정도 예술 같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본 아래서 일하기에 예술이라기엔 자유롭지 못하다. 자본가의 이익이 궁극적 목표인 노동시장에서 노동자는 부품이 되고 노동자가 만들어 낸 결과는 상품이 된다. 그렇다면 노동자 개인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사라진다 해도 또 다른 누군가가 같은 과정을 거쳐 같은 상품을 만들 수 있다면 기업에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노동자의 이름은 지워진다.

 

그것이 안타까워 이란희 감독은 노동자의 얼굴을 자꾸만 스크린 위로 불러낸다. 그의 카메라는 특히 육체노동자를 비춘다. 올해 개봉한 〈3학년 2학기〉 역시 기계공장 현장 실습생이 된 특성화고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육체노동자는 작업장이 곧 위험 요소인 데다가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고 비정규직 비율이 높다. 한마디로 죽기 쉽다. 이름뿐만 아니라 존재가 사라지기 일쑤다. 그래서일까. ‘창우는 사인(sign)할 일이 생길 때마다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오래도 공들여 쓴다. ‘우재는 회사의 실수로 김오재로 인쇄된 캐비닛 이름표를 그냥 두지 않고 우재라고 다시 고쳐 쓴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듯이.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문제는 거대한 구조 밑에서는 이름을 눌러쓰는 일 따위로 존재를 지킬 수 없다는 데 있다. 창우가 일하는 공장엔 추락에 대비한 난간도, 절단 사고를 막아줄 가죽 앞치마와 팔토시도 없다. 언제 화염 속으로 사그라질지 모를 연약한 아이들과, 위험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친 어른들만이 있다. 공장 밖은 또 다르다. 당신의 미래가 우리의 희망이라며 수능 응시생을 응원하는 현수막이 붙어있다. 19, 남들 대학교에 가듯 공장에 갔을 뿐인데 이렇게 다르다. 수능 날 비행기를 띄우지 않는 건 아이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져 꽤 감동스럽기도 하지만 그 아이들에 빠져있는 또 다른 아이들을 생각하면 어딘가 찝찝하기도 하다. 학교에도 집에도 잘 보이지 않는 그 아이들은 분명 어딘가에 있는데. 현수막의 응원 없이 땀내 나는 공장에서 창우는 자란다. 조금씩 적응하고 끈질기게 버틴다. 그 누구도 소리 내 응원해 주지 않던 육체노동자의 탄생은 그렇게 영화에서 축복받는다.

 

영화 〈천막〉 스틸컷

 

시간이 흘러 창우가 더 자라면 조금이나마 스스로 지켜낼 수 있게 될까? 이란희의 전작 〈천막〉(2016)엔 어쩌면 창우의 미래일지 모를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영화는 2007년 기타 제조기업 콜텍이 콜트기타 제조 노동자들을 일방적으로 해고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13년 동안 계속되었던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지난한 투쟁, 그 한복판이 〈천막〉 속에 살아있다. 투쟁 3,169일 차, 9년 차의 시점에 실제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 임재춘, 이인근, 김경봉 세 명이 천막농성의 주인공 재춘’, ‘인근’, ‘경봉으로 등장한다. 그들에게 어떤 대사를 요구할 수 있을까. 영화는 과장도 연민도 없이 담담한 시선으로 그저 그들을 비춘다. 반찬을 나눠 먹고 말다툼을 하고 가족과 전화하는 모습을 찍어둔다. 그들에게 새로운 배역을 입히는 대신 그들의 원래 이름을 크레딧까지 끌고 가길 선택한다. 천막엔 영웅 같은 얼굴 대신 기나긴 투쟁에 지쳐버린 얼굴이 있고, 서로를 북돋는 따뜻한 응원 대신 언제까지 이럴 거냐는 원망이 있다. 그리고 그럼에도 천막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도 응답해 주지 않는 싸움을 계속하는 마음이 있다. 어른이 되어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창우들을 홀로 두지 않겠다는 선언이 있다.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2016년의 재춘-인근-경봉과 2025년의 창우. 10여 년이 흘렀어도 그들의 세상은 너무나 닮았다. 여전히 극악의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해고가 쉽고 임금은 낮으며 사람이 죽는다. 다만 영화만큼은 비관보다 멋진 걸 꿈꿀 수 있기에 이란희는 그들의 손에 기타를 쥐여주고 그들 곁에 서로를 붙여둔다. 재춘은 답답한 마음에 천막을 떠나지만 다음날 아무 일 없던 듯이 돌아와 인근과 경봉 옆에 선다. 창우의 공장엔 지친 와중에도 서로의 안전을 그 무엇보다 무겁게 받아들이는 동료들과 사수들이 있다. 10여 년이 흘렀어도 변치 않은 건 절망뿐이 아님을 두 영화는 증명한다. 재춘-인근-경봉 밴드가 공연하는 민중가요와 창우가 연주하는 울게 하소서는 그 사이 10년을 빼곡히 채운 노동자의 피땀에 대한 애도이자 지워진 이름들에 바치는 헌사이며, 힘 없는 이들의 자그마한 희망일 테다.

 

살아가기보다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 속에서, 채우기보다 싸우기 바쁜 시간 속에서 오늘도 노동자들은 사라져만 간다.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작게나마 소리 내는 것. 카메라를 들고 지워진 이름들을 찾아다니는 이란희 영화처럼, 그 이름들을 끝내 잊지 말라고 속삭이는 것. 그렇게 영영 사라지지 않을 이름들의 세계를 지어두는 것.

 

*영화 〈천막〉(이란희 감독) 보러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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