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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단평] 〈3670〉: 시간의 지리학

by indiespace_가람 2025. 9. 16.

*'인디즈 단평'은 개봉작을 다른 영화와 함께 엮어 생각하는 코너로, 

독립영화 큐레이션 레터 '인디즈 큐'에서 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시간의 지리학

〈3670〉 그리고 〈딸에 대하여〉 

 

*관객기자단 [인디즈] 문충원 님의 글입니다.

 

 

우리가 어떤 영화를 100% 이해할 수 있을까? 인물은 영화 이전부터 있어왔다. 영화가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라 할지라도 첫 시퀀스가 시작됨과 동시에 태어나진 않으니. 우리는 그를 알지 못한다. 영화를 보는 일이란 길거리에서 마주친 누군가에게 불현듯 시선을 고정하고 2시간 내내 미행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장면에 동선이 생기는 순간, 모든 영화는 성장 영화일 수 있다. 일련의 사건이 수직적이든 수평적이든 거꾸로 돌아가든 세차게 파고들든 시간은 흐르고 감정은 마음 깊이 남는다. 공간의 이동이 이 땅의 지도가 된다면, 시간의 흐름은 인물 내면의 지도를 새긴다. 그 지도를 타임라인 삼아 한 생애의 어느 시점부터 어느 시점까지, 내면의 GPS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2시간을 함께 뛰어다닌 듯이 마음의 체력이 자라난 기분이 든다. 그 순간부터 이해는 관객의 필요조건이 아니게 된다. 여기, 시작과 끝의 풍경은 그대로지만 마음만큼은 까마득할 정도로 멀리서 손 흔들며 끝나는 두 영화가 있다. 아기 오리가 날아보자고 마음먹듯이, 누군가에게 방 한 칸 내어주자고 결심하듯이.

 

영화 〈3670〉 스틸컷

 

너 지금 아기 오리 같아

 

영화 〈3670〉은 탈북민이자 성소수자인 철준의 묵묵한 서사를 통해 관계가 한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뒤바꾸는지를 탐구한다. 뿌리 뽑힌 채 부유하던 철준에게 영준은 단순한 로맨스 상대를 넘어, 그가 낯선 세상에 첫발을 굳건히 내딛게 만든 나침반에 가깝다. 영화는 둘의 관계를 통해 철준의 내면적 지형도가 변화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관계야말로 한 인간의 정체성을 근원적으로 움직이는 맨틀임을 보여준다.

 

영화는 철준이 대학 입시 자기소개서 앞에서 느끼는 막막함으로 그의 현재 상태를 은유한다. 탈북이라는 거대한 배경과 성적 지향성 외에 스스로를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하는 그의 삶은 단절된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 사이에서 위태롭게 표류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영준을 만나면서 그의 삶은 비로소 구체적인 이야기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함께하는 일상의 시간은 철준의 삶을 비로소 살아볼 만한 공간으로 만든다.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카페에 앉아 미래를 준비하는 평범한 20대 청년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은 곧 철준이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터전을 일구어가는 정신의 재개발에 가깝다.

 

그러면서 영준은 철준이 새로운 사회에 주도적으로 정착할 용기를 내도록 등을 떠민다. 철준에게 어미만 졸졸 따라다니는 아기 오리 같다며, 자신만 계속 따라다니면 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그의 조언대로 철준이 다른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문득 돌아본 그는 어디론가 멀리 도착해 있다. 한국 사회를 겉도는 이방인에서, 새로 알게 된 탈북자를 종로 3가에 데려가 커뮤니티에 초대하는 위치가 된다. 이어폰을 꽂고 다니는 남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던 그는 어느새 자신도 자연스럽게 이어폰을 끼고 거닌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모른다며 한사코 거절하던 그는 이제 나도 예약했다고 말하며 마이크를 쥐어 든다. 그렇게 관계는 또 새로운 사람으로, 더 큰 원으로 빙빙 돌아가며 이어진다.

 

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너는 내 딸이니까

 

3670〉이 성소수자의 내적 성장을 직접적으로 다룬 반면, 영화 〈딸에 대하여〉는 성소수자 딸에게 굳게 닫혔던 엄마의 내면이 조용히 성장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딸 그린의 동성애 정체성을 외면하던 엄마 정은은 딸과 그의 연인을 한 집에서 직접 겪어내며 딸의 세계를 두 눈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엄마'의 마음이라는 좁고도 깊은 지도를 통해 관객들이 세상의 다름을 이해하는 방식을 함께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영화 초반 정은은 동성 연인과 함께 집에 얹혀살겠다는 딸 그린이 못마땅할뿐더러, 기간제 강사 동료의 부당해고에 분노하며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정은은 딸이 평범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그녀의 딸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가족이란 이름은 너무 가까워 각자만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만다. 함께 사는 일과 이해하는 일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치부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는 딸이 커서 자신을 인정하는 순간 엄마는 다시 한 뼘 자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딸에 대하여〉는 함께 살면서 이해하는 일, 이해하기 위해 함께 사는 일을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의지의 성장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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