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0〉리뷰: 우리의 모든 처음
* 관객기자단 [인디즈] 서민서 님의 글입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그 처음은 늘 서툴다. 처음 사귄 친구, 처음 나가본 모임, 처음 경험해 보는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미묘한 설렘을 느끼기도, 잘 보이려 나름의 애를 쓰기도, 관계의 엇갈림 사이에서 작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처음을 어떻게든 겪어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3670〉을 보고 나의 처음을 이루었던 감정들을 떠올려 보았다.
철준(조유현)은 탈북자이자 성소수자다. 든든한 탈북자 친구들이 있지만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기는 어려워 늘 공허한 마음이다. 그렇기에 철준은 나와 닮은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함께 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다. 용기 내 처음 나가 본 술 번개 모임에서 영준(김현목)을 만난 철준은 처음으로 게이 커뮤니티에 발을 들이게 된다. 처음 만나는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 처음 느껴본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감각 속에서 철준은 지금껏 채워지지 않았던 욕망을 처음으로 채워 나간다. 영화의 제목이자 이들만의 은어로 사용되던 ‘3670’의 의미를 모르던 철준이 어느덧 자연스레 뒤에 숫자를 더해가는 것처럼 조금은 겉도는 듯해 보여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하지만 언제나 감정은 엇갈리기 마련이고 크고 작은 관계의 균열 속에서 철준은 다시 혼자가 된다.
〈3670〉은 탈북민 커뮤니티와 게이 커뮤니티의 경계를 오가는 인물인 철준을 통해 철준의 경험이 곧 우리의 경험이 되는 감각을 만들어 낸다. 탈북자이자 성소수자인, 중첩된 소수자성을 지닌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지만, 인물이 가진 고민의 결이 우리의 고민과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철준의 특수한 소수자성만 부각하며 한국 사회의 편견 섞인 시선에 둘러싸인 소수자의 이야기를 자극적으로 풀어내기보다는 게이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철준의 모습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자기소개서를 고쳐 쓰며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철준의 모습을 교차해 보여줌으로써 철준 또한 그저 새롭게 발 디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한 명의 청년이라는 점을 일러준다. 고군분투하는 철준의 몸부림을 지켜보는 우리는 자연스레 철준의 ‘처음’을 우리의 ‘처음’과 겹쳐 보게 된다.
처음이라 삐걱댔던 관계, 서툴렀던 마음, 전하지 못한 진심까지. 이 모든 처음을 겪어낸 철준은 어느덧 불쑥 성장해 있다. 대학에 입학하고 탈북자 친구들에게도 그동안 숨겨왔던 정체성을 고백한다. 작은 오해로 잠시 멀어진 영준과도 화해한다. 혼자 모임에 나가는 것도 주저하지 않고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 먼저 손도 내밀 수 있게 되었다. 외롭고 스스로 싸우던 처음의 순간들이 다 끝난 것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즐거운 시간도 다 가고 죽을 만큼 힘겨운 시간도 다 가기 마련이다. 아마 철준도 이제는 알게 되지 않았을까.
서툰 실력이지만 처음 마이크를 쥐고 노래를 부르던 철준의 모습이 영화가 끝나고도 마음에 오래 남아 있다. 진심 어린 목소리로 내뱉는 가사를 곱씹으며 약간의 눈물이 맺힌 듯한 철준의 눈을 계속 응시한다. 언젠가 이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된다면 철준의 안부가 궁금해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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