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연의 선율〉리뷰: 보호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관객기자단 [인디즈] 문충원 님의 글입니다.
밴드 혁오의 노래 ‘TOMBOY’는 다음과 같은 가사로 시작한다. 난 엄마가 늘 베푼 사랑이 어색해. 이 문장은 모성애가 낯설게 느껴진다는, 자식의 관점에서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부모의 무한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늘 같은 마음으로 공감해 왔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모든 사람이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다고. 영화 〈수연의 선율〉은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세계를 서늘하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의 죽음으로 홀로 남겨진 열세 살 소녀 수연이 보육 시설에 가지 않기 위해 스스로 보호자를 찾아 나서는 여정을 따라간다.
할머니를 떠나보낸 열세 살 소녀는 슬픔에 떠밀려 울지도, 매달리지도 않는다. 대신 자신을 지켜줄 보호자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조용히 계산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떠올린 건 과거 정을 나눴던 이웃과 친구의 집이지만, 그들이 건네는 도움은 하루치 잠자리와 형식적 위로에 머물 뿐이다. 교회 공동체의 손길도 돌봄보다는 관리에 가깝다. 선택지들을 하나씩 지워가는 과정에서 수연은 어느 입양가족의 브이로그를 접한다. 그러고는 그 ‘둘째’가 자신이 되리라 꿈꾸고, 입양아 ‘선율’과 그 가족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집안일을 돕고 입맛에 맞는 반찬을 만드는 등 자신을 ‘착한 아이’로서 보기 좋게 가다듬는 식으로 행동한다.
그와 반대로 선율은 침묵하는 방식으로 ‘돌보기 좋은 존재’임을 적극적으로 피력한다. 영화 초반 그에게 ‘언어장애’라는 표식이 따라오지만 그의 침묵은 결함이 아니라 전략으로 읽힌다.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 아이가 착하다고 여겨지는 세상에서, 침묵은 가장 안전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수연이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보호자를 얻어내려 한다면, 선율은 침묵으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견고히 한다. 어느 쪽이든 획득하고 지켜내는 소유의 방식은 두 인물이 가족이라는 제도를 무의식적으로 배우고 이해하는 것처럼 만든다. 사랑의 모양이 아닌, 하나의 생존 전략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영화 〈수연의 선율〉은 '보호'의 개념을 뒤집어 생각해 보게 한다. 미디어에서 흔히 수동적이고 연약하게 묘사되던 피해자로서의 아동이 아닌, 지극히 주체적인 생존자로서의 아이들을 조명한다. 어른이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통념에서 빗겨나, 영화 속 아이들은 보호를 ‘받아야 할 권리’가 아닌 스스로 쟁취해야 할 ‘노력의 결실’로 인식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단순히 떠나간 부모의 무책임함을 비판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폭력과 무관심이 어떻게 아이들의 삶을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며, 우리 사회의 보호 시스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대신 제도라는 틀 안에 밀어 넣고, 개인적인 호의는 쉽게 등한시하는 사회의 냉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다만 영화는 단순한 감상주의나 공론화에만 기대며 끝나지 않는다. 수연과 선율은 혈연이나 제도로 맺어지지 않았음에도 서로의 결핍을 깊이 이해하고 시간이 흘러 다시 마주한다. 그 작지만 단단한 연결이,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돌봄의 윤리로 되돌아오는 씨앗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진정한 의미의 보호는 제도나 법의 영역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마주하고 책임지는 개인의 윤리적 행위에서 시작할지도 모른다고. 서로를 가만히 응시하는 둘의 눈망울이 우리에게 말없이 일러주는 듯하다.
'Community > 관객기자단 [인디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디즈 단평] 〈수연의 선율〉: 이해할 수 없음의 감각 (3) | 2025.08.18 |
---|---|
[인디즈 단평] 〈우리 둘 사이에〉: 허락받는 몸 (1) | 2025.08.18 |
[인디즈 Review] 〈우리 둘 사이에〉: 한숨과 새숨 사이 (6) | 2025.08.12 |
[인디즈 소소대담] 2025. 7 영화로 여름나기 (7) | 2025.08.04 |
[인디즈 Review] 〈일과 날〉: 꿈 꿔볼 일들이 아직 남았다면 (5) | 2025.07.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