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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침몰가족〉: 항해하는 배

by indiespace_가람 2025. 5. 26.

〈침몰가족〉리뷰: 항해하는 배

* 관객기자단 [인디즈] 강신정 님의 글입니다.



때로는 흐르듯 살고 싶다. 잠시 훑고 지나갈 인연에 마음을 활짝 열어두고 싶다. 엄마에게 차마 못 할 속얘기를 버스 옆자리의 낯선 이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겠지? 걱정을 내뱉기도 전에, 멀지 않은 섬나라에서 과감히 위험해지기를 시도한 이들이 있다. 만나자마자 한 배를 타기로 선택한 이들이 있다.

 

영화 〈침몰가족〉 스틸컷


어쩌다 우리

시작은 전단이었다. 감독 ‘가노 쓰치’를 낳은 어머니 ‘가노 호코’는 아이의 생부와 가정을 꾸리지 않았다. 대신 아들을 함께 길러낼 사람을 모집하는 전단을 붙였다. 전단은 여기서 저기로 옮겨 다니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종이 한 장을 구심점으로 어쩌다 모인 우리는 누구일까. “정상적인 형태가 아닌 가족이 늘어나면 일본 사회는 침몰할 것”이라는 정치가의 말에 “그럼 침몰하면 되지”라고 맞받아치며 ‘침몰가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족일까?
시간이 될 때 들러 쓰치를 돌본다는 규칙으로 우연히 얽힌 우리는 ‘침몰하우스’에서 만난다. 식탁에는 엄마 아빠 아들 대신 수십 명의 아저씨 아줌마 누나 형이 있다. 서로 이름을 모르는 사이도 있다. 친구의 친구도 드나든다. 사정이 어려워지면 떠나기도 한다. 견고한 성보다 흔들리는 배에 가까운 관계다. 누구나 탈 수 있고 언제든 내릴 수 있는 배 위에서도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영화 〈침몰가족〉 스틸컷


그래도 우리

침몰가족은 모든 의문에 개의치 않는다. 함께할 수 있기에 함께할 뿐이다. 카세트테이프를 다 풀어버리는 쓰치를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 호코에게 물으면 그는 되묻는다. “그러게요. 어떻게 할까요?” 침몰가족은 문제를 같이 고민하고 보육 노트를 돌려쓰고 침몰하우스를 가꾼다.
닻도 없이 느슨한 연대 위를 항해한다고 해서 같은 배를 탔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쉽게 헤어질 수 있다는 유연함에서 오는 위안이 있다. 쓰치와 침몰하우스에서 자란 ‘메구’가 “부모 외에 도망칠 곳이 있었다”고 말한 건 그 증거다. 배 위의 우리는 언제든 새로운 관계를 낚아 올릴 수 있다. 관계가 버거워지면 다시 놓아줄 수도 있다. 뿌리 박힌 성에서는 누릴 수 없는 자유로움이다.
침몰가족에게 돌보아진 건 비단 쓰치나 메구만이 아니다. 그 속의 어른들 역시 돌봄을 나누어 먹었다. 애인이 없어서, 직장이 없어서, 양육은 좋지만 출산은 싫어서, 혹은 그냥. 각자의 이유로 정상 궤도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이 침몰 예정의 배를 흔쾌히 나눠 탔다. 배 위에서 자라난 건 어쩌면 쓰치가 아니라 서로의 세계일지 모른다.
비좁은 배의 움직임은 침몰보다 항해였다. 삐걱거리면서도 나아갔다.

 

영화 〈침몰가족〉 스틸컷


앞으로 앞으로

항해는 쓰치가 8살이 되면서 정지된다. 15여 년이 지나 대학 졸업을 앞둔 쓰치는 카메라를 들고 흩어진 선원들을 찾아다닌다. 가족으로도 친구로도 남으로도 “분류가 안돼”는 이들이 영화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레 묶어진다. 과거의 침몰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지금의 선원들이 다시 모인다.
선원이었던 ‘이노우에’ 씨가 “역사 속의 쓰치”라고 부르며 다시 만난 지금의 쓰치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미래를 본다. 침몰가족은 과거에 박제된 추억이 아니다. 아기 쓰치가 꽂혀 있는 사진첩이 아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는 그 순간, 멈춰 있던 쓰치와의 관계는 쓰치의 나이를 재빨리 따라잡아 현재와의 시차에 적응한다. 배가 출렁인다.

배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침몰가족을 떠나 하치조지마에 정박한 쓰치는 그곳에서 또 어쩌다 두 명의 선배를 만난다. 그 선배들은 커서 ‘MONO NO AWARE’라는 밴드의 일부가 되고 〈침몰가족〉의 주제가를 만들게 된다. 우리의 인연은 늘 그런 식이다. 예측할 수 없는 관계들 속에서 주제가 ‘A/I/A/O/U’의 가사는 〈침몰가족〉이 쥐여주는 나침반이다. 나침반을 따라가 어쩌다 도착한 세계에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다.

 


気づいた時には繋いでた手も
정신을 차려보니 맞잡고 있던 손도


繋ぐことはもうなくなったね
이제는 더 이상 잡지 않게 되었네


でも生き様は見てた
그래도 삶의 방식은 지켜봤어


今それを追ってるんだ
지금은 그걸 따라가고 있어


ありがとう
고마워


- MONO NO AWARE, ‘A/I/A/O/U’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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