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즈 소소대담] 2024. 12 - 2024년의 끝자락
*소소대담: 인디스페이스 관객기자단 ‘인디즈’의 정기 모임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지원 님의 기록입니다.
참석자: 붕어빵, 군밤, 군고구마, 호떡, 어묵, 계란빵
올겨울은 여느 겨울보다 추운 것 같다. 겨울의 한가운데서 혹독한 추위를 뚫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상식이 무너지고 가치가 퇴색하고 소중한 것들이 자꾸만 사라지는 시대, 언제나 그랬듯 모여서 영화 이야기를 나누었다.
*2024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
〈봄밤〉(강미자 감독)
붕어빵: 서울독립영화제 홈페이지에 올라온 〈봄밤〉의 연출 의도에 ‘처참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순결하다, 고결하자 할 수 없는, 그냥 처참한 사랑이다’라는 문장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특히 ‘죽을 단도를 주머니에 숨겨두고 길을 걷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세월호의 사람들이며, 이태원의 사람들이다.’라는 구절이 아프게 다가왔다. 다사다난한 12월을 보내며 느꼈던 감정과 맞닿아 있는 글이었다.
호떡: 〈봄밤〉은 ‘날 것의 영화’다. GV에서 듣기로 참여한 스태프의 수도 적고 색보정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찌 보면 기술적 역량을 발휘하거나 기교를 사용하는 영화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영화인데, 심심하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영화의 톤과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잘 어우러진다고 생각했다. 배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봄밤〉에 ‘수환’ 역으로 출연한 김설진 님은 무용수로도 활동해선지 몸을 통해 연기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연기를 할 때의 움직임이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권여선 작가의 소설 「봄밤」을 원작으로 삼되 시로 완성되었다.’는 소개글을 읽었다. 영화에서 시가 자주 등장한다. 한예리 배우가 맡은 ‘영경’이 ‘수환’의 등에 업혀서도, 술을 마시면서도 시를 읊는다. 묘하게 반복되는 시는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힘을 얻는다. 영화와 시가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붕어빵: 처음에는 ‘영경’이 읊는 시가 술을 마시면서 하는 의미 없는 말인 줄 알았는데,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그 시가 〈봄밤〉이라는 영화 자체임을 느끼게 된다.
〈에스퍼의 빛〉(정재훈 감독)
호떡: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에스퍼의 빛〉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본 영화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았다. 다큐멘터리라는 형식 안에 ‘롤 플레잉’ 게임의 문법을 도입한 게 재밌었다. 어른들의 ‘검열’을 거치지 않은 ‘진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본 느낌이었다. 감정 과잉 상태에 빠진 등장인물들이나 ‘중2병스러운’ 대사마저도 ‘자연스러운’ 청소년의 모습으로 받아들였다.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한 문장씩 쓰는 ‘릴레이 소설’ 생각도 났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조희영 감독)
군고구마: 평소 조희영 감독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감독님의 전작인 〈이어지는 땅〉(2022)이 생각났다. 〈이어지는 땅〉의 등장인물들이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에도 나온다. 인물들의 관계와 내력을 아는 상태로 영화를 보니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서로 인연을 맺고 관계를 이어가는 인물들을 전지적인 시점에서 관망하는 느낌이었다.
붕어빵: ‘대화’와 ‘오해’에 관해 생각하게 됐다.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의 말을 오해하면서도 대화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서로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만나서 대화하고 사람을 사귀는 걸 멈추지 않는 모습이 계속해서 굴러가는 원 같기도, 재미있는 드라마 같기도 했다.
군고구마: 〈이어지는 땅〉과 비교했을 때, 이번 영화에서 홍상수 감독 영화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중간중간에 무턱대고 화내는 장면이나 갑자기 싸우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떠올랐다. 나중에 찾아보니 조희영 감독이 홍상수 감독 스태프로 활동한 이력이 있었다. 홍상수 감독의 느낌을 따라가면서도 자기만의 길을 꿋꿋이 밀고 나간 점이 인상적이었다.
어묵: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에 욕설이나 폭력이 난무하는 청소년들의 세계가 많이 나왔다. 그때와 비교해 현실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암울했고 여전히 스크린에서 폭력적인 세계가 재현된다는 게 속상했다. 감독이 무엇을 의도했고 표현하려 했는지는 충분히 알겠으나 시청각적으로 폭력적인 장면이 반복되다 보니 고통스러웠다.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자행되는 폭력들이 스크린에서 다시 반복되어야 한다면 표현 방식이 좀 더 달라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다댄스〉(이소현 감독)
호떡: 굉장히 중독적인 뮤지컬 영화였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극적인 순간에 분위기가 잡히고 주인공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컬이 시작된다.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는 느낌을 받았고 재미있었다. 연애지상주의 시대에 ‘도태된’ 여성의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풀어낸 영화라는 점에서 새롭다고 느꼈지만, 감독님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성취’하려 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았다.
어묵: 유쾌와 민망 사이에 놓인 영화였다. 이 영화가 주는 희극적인 요소에 빠져든다면 이 영화에 매력을 느끼겠지만 이 영화가 가진 날 것의 솔직함에 거부감이 든다면 영화를 보는 일이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2024 겨울에 극장에서 만난 영화들
〈언니 유정〉
[리뷰]: 우리가 비워둔 공간(김지윤)
[단평]: 나의 흠, 나의 힘, 나의 형제(김한들)
[인디토크]: 말하지 않아도(김윤정)
[뉴스레터]: Q. 🎁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될 때? (2024.12.15)
군고구마: 〈언니 유정〉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보고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한 번 더 관람했다. 처음에 볼 때는 유정과 기정의 관계보다는 누가 ‘영아 유기’ 사건의 범인인가에 집중하게 됐다. 이번에 다시 보면서, ‘누가 했는가?’는 중요한 질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정말 중요한 건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겪는 유정과 기정 자매였다. 멀어져 있던 두 자매가 사건을 겪으며 관계를 회복하고 서로의 진심을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한 것 같다.
어묵: 〈언니 유정〉을 보며 ‘아빠 없는 사람들의 영화’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어느 누구도 아빠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아빠의 존재나 전사에 관심조차 없다. 심지어 태아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신경 쓰지 않는다. 감독의 말을 들을 기회가 있다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물어보고 싶다.
붕어빵: ‘언니 유정’이라는 제목만 보면 언니와 동생의 관계에만 주목할 것 같지만 영화에서는 언니 유정과 동생 기정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관계 역시 중요하게 다뤄진다. 서사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좋았고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통해, 유정과 기정의 관계 회복을 그려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언니 유정〉을 연출한 정해일 감독의 작품 세계가 점점 넓어지는 것 같다. 감독님의 단편 〈더더더〉(2022)와 〈인사3팀의 캡슐커피〉(2018)를 다른 영화제에서 봤다. 〈인사3팀의 캡슐커피〉에서 진지한 톤으로 비정규직의 인사 문제를 다뤘고 〈더더더〉에선 퇴근길의 헤프닝을 유쾌하게 다뤘다. 이번에 〈언니 유정〉을 쓰고 연출하면서 감독님의 스펙트럼이 한층 더 다채로워진 것 같다.
〈되살아나는 목소리〉
[리뷰]: 되살아나는 당신의 목소리, 움직이는 나의 눈(김한들)
[단평]: 있었던 것은 있었던 것(문충원)
[인디토크]: 어둠 속에서 건져 올린 목소리(이지원)
[뉴스레터]: Q. ⛄ 다큐 보기 좋은 겨울? (2024.12.4)
어묵: 박수남 감독님의 집념과 정신력이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느낌이었다. 영화 초반에 박마의 감독과 박수남 감독이 언쟁하는 장면이 기억난다. 박마의 감독이 ‘영화는 대중들이 알기 쉽게 찍어야 한다’고 말하자 박수남 감독이 ‘내가 경험하고 내가 바라보는 게 영화’라고 말한다. 그 시절을 직접 목격하고 견디어 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다층의 레이어가 있다는 걸 기억하고 조심스럽게 판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계란빵: 인디토크 기록을 담당했는데, 박수남 감독님의 이야기를 그분의 입으로 들으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마주하고 있는,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군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자 했던’ 박수남 감독의 의지가 느껴졌다. ‘고마츠가와 사건’이나 ‘군함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는데 영화를 통해 구체적인 내막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영화에 피해자분들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대답을 못 하고 우시는 분이 있었다. 울음으로 대신한 답변이 시대와 국가가 자생한 폭력을 전하는 ‘가장 정확한 언어’라고 느꼈다.
〈힘을 낼 시간〉
[리뷰]: 지워지지 않을 힘(김민지)
[단평]: 괜찮다는 말 한마디(서민서)
[뉴스레터]: Q. ✨ 나의 새해 소원은? (2025.1.1)
어묵: 처음에는 ‘유명한 아이돌이 되는 데 실패한 세 사람이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재충전하는 여정’ 정도의 얕은 이야기라고 받아들였다. GV에서 남궁선 감독이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아이돌 산업의 사상자나 다름없다’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노동 착취와 정신적, 신체적 학대가 가져오는 악순환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힘을 낼 시간〉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피해를 그린 다큐멘터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군고구마: 영화에 내레이션이 많이 나오는데, 배우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이 말하는 것 같았다. 아이돌로 활동했던 인물들이 자기의 트라우마를 고백하는 듯한 말투였다. 내레이션 덕분에 각각의 인물들이 겪는 상황에 공감하기 쉬웠다.
붕어빵: 아이돌 생활을 했던 세 명의 주인공이 제주도에서 팬을 만난다는 설정이 좋았다. 의외의 인물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세 사람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너무 유쾌하게 구원해 준다. 세 주인공이 노동을 그만둔 이유가 된 노래를 자꾸만 입 밖으로 끄집어냄으로써 이들의 ‘진짜 탈출’을 도왔다고 생각한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리뷰]: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서민서)
[단평]: 그럼에도 존속하는 것들(김민지)
[뉴스레터]: Q. 🌊 기분이 파도치는 요즘? (2024.12.11)
호떡: 영화가 결혼이주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아쉬웠다. ‘영국’이 ‘순희’에게 소리를 지르며 ‘네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해줄 거’라고 하는데 그 방식이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군고구마: 영화를 보며, ‘용수’와 ‘영국’의 계획이 너무 허술하다고 느꼈다. 영화의 진행을 위해 적당히 용인하고 넘어가는 게 필요했다고는 생각하지만, 잘 납득이 가지는 않았다.
어묵: ‘용수’와 ‘영국’이 남은 사람들을 사랑해서 저지른 일이지만, 그들의 무책임함을 용인하기는 어려웠다.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생각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다는 게 납득되지 않았다. 그들의 ‘대책 없음’이 불러오는 파장과 그로 인해 슬픔을 겪는 인물들을 지켜보는 게 고통스러웠다.
붕어빵: 영화의 속도감이 좋았다. 작은 어촌 마을의 사정과 그들의 보수적인 결속력을 다루면서 생존의 문제, 돈의 문제로 서사를 밀어붙이며 달려 나가는 힘이 좋았다. 다만, 한 사람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이 너무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모래바람〉
[리뷰]: 용포를 두른 여자들(안소정)
호떡: 영화에 나오는 씨름 선수들의 캐릭터라 매력적이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재밌었다. 계속 승승장구하는 인물들만 나오는 게 아니라 굴곡을 겪는 인물들이라 더 마음이 갔다. 힘이 빠질 때 새롭게 시작할 기운을 얻어갈 수 있는, 연초에 보기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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