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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던 것은 있었던 것
〈되살아나는 목소리〉와 〈최악의 하루〉
*관객기자단 [인디즈] 문충원 님의 글입니다.
1935년 일본, 박수남은 그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시절 그의 부모님은 돈을 벌러 일본으로 넘어갔고, 사람들은 그를 ‘재일 조선인 2세’라 불렀다. 박수남은 자신을 황국 소녀이자 천황 폐하의 신민이라 여기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복 저고리를 차려입은 모친과 거리를 거닐던 중 돌팔매가 날아들었다. 그 기억을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 순간,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국적과 유전자를 동시에 쥐여 준 어머니. 하필 ‘재일 조선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나온 자신. 태어난 게 죄라는 눈동자들. 그래서 사는 일을 형벌로 만드는 세상. 그 사이를 거칠게 배회하며 박수남은 어렴풋이 자신의 소명을 감지했다. 기록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시작은 '고마쓰가와 사건'의 재일조선인 이진우와 주고받은 서신이었다. 일본인 여성 2명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그의 지난날은 차별과 억압의 연속이었다. 청각장애인 어머니를 돌보며 공장일과 학업을 병행하고, 우수한 성적이었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취업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고통에 공감한 박수남은 당시 직장에서 축출당하면서까지 일본의 지식인들과 구명운동을 펼쳤다. 사형이 집행된 1962년까지 오간 서신들은 한 권의 책으로 묶였고 역사는 영원히 기록되었다.
어느 날부터 그는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1986년 작 〈또 하나의 히로시마-아리랑의 노래〉부터 〈되살아나는 목소리〉가 개봉한 지금까지도. 글 쓰는 저널리스트 출신인 그가 어쩌다 카메라를 들게 된 걸까. 영화 초반, 박수남과 그의 딸 박마의는 격하게 논쟁을 벌인다.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알기 쉽게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 박수남은 그건 의미 없다고 버럭 화를 낸다. 그러고는 무엇을 위해 영화를 만드는지 되묻는다. 영화란 사실을 기록해 가는 일이고, 역사의 사실을 사실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체험을 기록하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라고.
박수남에게 영화는 진실을 담아내는 최선의 매개체이다. 영화야말로 엄숙한 침묵, 떨리는 몸짓까지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공백에서 때때로 말보다 중요한 정보가 나지막이 숨 쉬고 있다. 그 숨소리에 귀 기울이는 카메라의 끈기를 그는 믿는다. 원폭 피해를 입은 한국인 피해자가 제대로 답변도 못 한 채 그냥 울어버리는 순간. 그간의 고통이 여실히 전해지는 숨결의 떨림. 주저 없이 앵글 속으로 들어가 그를 꼭 끌어안으며 이게 영화를 찍는 이유라고, 말 없는 사람의 말을 영상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위로를 건네는 박수남.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들려온 굉음에 우리 모두가 해방이라고 환호할 때, 굉음의 한복판에 서 있던 누군가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은 그런 식으로 영영 기록되었다. 찰나의 장면이 백 마디 말보다 나을 수 있다는 영화적 소문을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생생히 증언한다. 이것 좀 보라고. 침묵이 보이지 않냐고. 아무리 부인하고 무시로 일관해도, 진실은 여기 버젓이 있다고.
이처럼 영화는 허구라는 인식을 넘어 진실로 진실을 논할 수 있을까. 그 시도로 〈되살아나는 목소리〉가 글이 아닌 영화를 ‘다른 매체’로서 선택했다면, 2016년 작 〈최악의 하루〉는 ‘다른 언어’를 경유하여 진실에 접근하려 한다. 영화에서는 세 개의 언어가 들려온다. 주인공 ‘은희’의 한국어,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의 일본어, 그리고 그 둘이 주고받는 영어가 그것이다. 그들은 서촌에서 우연히 만나 잠깐 대화를 나누다 헤어진다. 은희는 하루 동안 료헤이 외에 두 명의 남자를 더 만난다. 그의 애인 ‘현오’는 아침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라는 이유로 은희의 존재를 숨기기에 급급하다. 언제나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눈과 입을 가린 채 만남을 가지고, 무엇보다 각자 한 번씩은 한눈을 팔았던 과거사 때문에 서로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다. 심지어 현오는 은희를 다른 여자의 이름으로 부르기까지 하고, 화가 난 은희는 이별을 고하며 홀로 돌아선다.
얼마 후 은희는 한 달 전에 정리한 전 애인 ‘운철’과 마주치게 된다. 이혼의 경계에 서 있던 그는 전 배우자와 다시 만나기로 했다고 고백하면서도 은희를 향한 죄책감을 느낀다. 은희도 운철과 헤어진 뒤 다른 사람을 만난 적 없다며 거짓말을 한다. 현오 앞에서는 운철을 진작 잊었다고 말하면서도, 운철 앞에서는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연기를 한다. 수많은 대화가 유창하게 오가고 서로의 감정을 격하게 토로하지만, 진짜 진실은 어디 있는지 모호하기만 하다. 상대방이 누구인지에 따라 말투와 성격은 연극을 하듯 달라진다. 은희는 운철 앞에선 머리를 묶고 현오 앞에선 푸는 등 외양마저 바꾼다. 그러던 중 남산 산책로에서 어쩌다 삼자대면이 이루어지고, 이내 혼돈에 빠진 윤희는 혼자가 되길 택한다.
긴긴 하루의 막바지, 그의 곁에 다시 료헤이가 찾아온다. 밤의 남산에서 우연히 만난 그들은 영어로 대화를 시작한다. 서로 모국어가 아니라 틀리고 더듬거릴지라도, 영어는 그들에게 소통을 가능케 한다. 은희는 요즘 사는 게 연극 같다며, 오늘도 그런 하루였다고 털어놓는다. 료헤이는 지금도 자신과 연기하고 있냐고 묻고, 은희는 거짓말을 많이 하는 편이지만 영어로 하긴 어렵다고 답한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에 맞춰 무용을 선보이며 몸으로 말을 하는 거라고도 한다. 오래된 연인인 탓에 습관처럼 거짓말을 주고받은 현오와 스스로 감정까지 속이며 열연을 나눈 운철, 그들과 교차한 하루는 최악이라 평하기 충분했다. 그 끝에서 료헤이와 주고받은 ‘다른 언어’는 거짓을 말하기 어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장 진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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