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시간〉리뷰: 반복과 중첩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윤정 님의 글입니다.
고가 위를 가로지르는 기차가 그러하듯 시간 역시 수평선을 따라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어디로 나아가는지 알 수 없는 날들의 고민 중에서도 그 끝에 이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예상하지도 못한 채 불안했던 날들 역시 있다. 그럴 때면 환기를 하듯 의식의 방향을 일부러 멀리멀리 퍼트린다. 그 어디라도 좋으니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곳에 가 닿기를 바라면서. 〈씨앗의 시간〉은 시간과 공간을 기꺼이 내어주며 문득 찾아온 낯선 이를 천천히 자신만의 공간으로 이끈다. 자연의 세계와 그 안에 살아 존재하는 인간이 어떻게 느슨하게 연결되고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생산성 증대를 위해 품질이 개량된 종자들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 되어버린 현대 농업 시스템 속에서 매년 토종 씨앗을 받아 느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있다. 흙이 풀리면 고르고, 씨앗을 심는 과정을 절기에 맞춰 수십 년간 반복해온 윤규상, 장귀덕 두 농부의 작업은 고집스럽게 성실하고 수고스럽다. 그럼에도 그들의 노동은 토종 씨앗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이나 특별한 목적성에 기인하지 않는다. 그저 그곳에 땅이 있고 내게 주어진 것은 씨앗이니 그것을 심고 자라나게 하는 것은 응당 당연한 일인 것처럼 여길 뿐이다. 무목적성에서 새롭게 피어난 가치는 개인적인 삶과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들을 연결하며 고유의 리듬으로 재탄생한다.
두 농부가 평생을 일구어 낸 밭과 씨앗을 영화의 시선을 따라 느리게 관찰하면 땅에 닿을 듯 굽은 등과 갈라진 피부의 주름들이 어쩐지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점점 닮아가다 결국엔 하나가 되어 겹쳐 보이기 시작한다. 중첩되는 이미지는 이내 행위로 확장되어 그들이 지켜온 씨앗들을 다시 순환시키고자 하는 현대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씨앗이 뿌리 내리고 땅 위로 자라나는 수직적인 과정과 크게는 절기, 작게는 하루 단위로 반복되는 원형적 노동의 과정을 통해 수확을 이뤄내는 일은 장소는 다르지만 이어져 있는 땅의 어딘가에서 반복되고 있다.
성취하고 결과물을 더 많이 축적하는 것이 기쁨이라고 여겨지는 지금, 하나의 목적에 매몰되어 있다고 느낄 때, 하루 동안 발생하는 노동의 온전한 완수와 일년의 주기를 따라 원형으로 이어지는 날들은 그 자체로 목적이자 완성이다. 형태가 어떠하든 끝없이 이어진다는 생산과 재생산의 반복되는 명목 아래에서 우리는 닿지 않아도 영원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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