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리뷰: 계절이 지나간 자리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윤정 님의 글입니다.
독백 연기가 진행 중인 교실,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을 향해 페인트 총을 겨냥하는 ‘수안(한해인 역)’의 시선이 날카롭다. 이내 망설임 없이 발사되는 총과 새빨갛게 뒤덮여 버린 거울을 뒤로 한 채 이어지는 독백에서 수안은 자신을 둘러싼 시선을 되갚아 주겠다는 듯 앞에 앉은 사람들을 응시한다. 분노와 앙심으로 가득한 눈동자가 이내 유일하게 잠깐 흔들린다. ‘윤설(한소희 역)’가 수안의 시야에 들어오는 첫 순간이다.
수업이 끝나고 페인트를 지우는 수안의 곁에 다가온 윤설은 이곳 사람들이 새로운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못하다는 말과 함께 다가온다. 학교 영화에도 출연해 본 적 없는 수안에게 아역 출신 배우로 이미 성공 반열에 오른 윤설은 그 자체로 꿈이자 선망이다. 두 사람은 반짝이는 첫 만남과 동시에 공간의 이방인으로서 서로를 알아본다.
두 사람의 만남은 시작처럼 항상 갑작스럽게 이어진다. 한낮의 눈부신 바다와 컴컴한 고속도로를 거쳐 서울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이 교차되는 모든 순간에 함께한 두 사람은 각자의 불안과 동경에 대해 이야기 하며 하나의 마음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해변에서 수안의 카메라에 등장하는 인물은 윤설 한 명뿐이고, 윤설의 즉흥연기의 유일한 관객은 수안이다. 두 사람은 카메라를 통해 서로를 바라보고 현재와 다른 꿈을 키워간다. 하지만 운명 같던 만남이 멀어지는 것은 첫 만남만큼이나 갑작스럽다. 첫 키스 후 관계에 대해 각자의 마음이 엇갈리자 윤설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시간이 흘러 수안은 인정받는 배우가 되지만 화면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달리 술과 약에 의존하며 자신의 공허를 채우기를 반복한다. 남들에게 보여지기 위한 연기를 하며 자신을 잃어버린 수안은 그리움으로 마음속에 묻어둔 윤설을 찾아간다. 마침내 윤설에게 도달했지만 그곳엔 과거의 설아가 되어버린 수안과 과거의 수안이 된 윤설이 있다. 스스로에게 없는 것을 찾으며 눈을 맞추고 이름을 부르던 두 사람은 이제 완전한 서로가 되어 과거의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끝없이 교차되는 운명을 그리는 〈폭설〉은 영원히 미결로 남은 두 사람의 연애담인 동시에 스스로가 되는 것에 실패한 한 사람의 성장담이다. 둘만의 세상에서 나를 초월해 너가 되는 과정을 통해 수안은 어렸던 과거를 거쳐 자신의 마음을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진눈깨비가 휘날릴 때, 함박눈이 쌓인 낯선 곳에 조난된 두 사람은 오랜 시간과 고난을 거쳐 마음을 확인한 후 다시 발붙일 수 있는 육지를 향하지만 무사히 도착한 그곳에도 윤설은 없다. 수안은 지난날의 사랑이 부정할 수 없이 떠나갔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엔 무엇이 남는가. 눈 내리는 날은 눈부시고 따듯하고 세상에 없는 고요를 불러온다. 하지만 잠시 눈 돌리면 온세상은 그새 하얗게 물들고 이내 소리 없이 가득 쌓인다. 계절은 흘러가는 동시에 다시 돌아오기에 누군가의 마음에 쌓인 눈은 소리 없이 영원히 녹지 않는 차디찬 겨울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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