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천〉리뷰: 극의 시작은 당신으로부터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예송 님의 글입니다.
가을 어느 지점에 있는 한 여대의 풍경. 함께 촌극을 올리기로 한 7명의 여대생 중 3명은 연출과 스캔들에 휘말리고 남은 이들은 무대를 올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지도하던 강사 전임(김민희)는 10여 년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연을 끊었던 과거 유명했던 연출가 겸 배우였던 외삼촌(권해효)에게 촌극의 연출을 부탁한다. 강릉에서 책방을 운영하던 남자는 오랜만에 조카를 마주하며,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며 세월의 무색함을 논한다. 돌아온 시언의 소식에 전임의 친한 교수 은열(조윤희)은 그와 만남을 요구하고, 자신의 재력을 애교 있게 뽐내며 점차 가까워진다. 무대를 올리기까지 10일, 시언은 준비한 시나리오를 여대생들에게 나눠주고 그들을 독려한다.
그간의 홍상수의 영화 속에서 밝혀졌듯이 그의 영화 속 의미를 좇거나, 발생한 대상을 깊이 파고드는 건, 되려 혼란스러움을 가중하는, 길 헤매는 것을 자처하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오브제는 공허한 지표 마냥 수면 위를 부유한다. 영화를 먼저 발생시킨 ‘촌극’은 외삼촌이 작성했으며 강의실에 앉은 여대생들에게 두꺼운 무게로 쥐어졌을 뿐,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그들이 올릴 촌극은 스쳐 가듯 그들의 가정사에 대한 짧은 단서를 내던진 ‘빨갱이’라는 단어와 무대 위에 남겨진 몇 개의 소품과 컵라면에서 느껴지게 하지만, 끝내 극에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학생들에게 시나리오를 나눠준 뒤, 그 내러티브를 함께 읽어보기도 전 전임은 잠시 나가야 한다고 고하고, 프레임은 강의실에 남겨진 이들 대신 시언과 전임이 함께 있는 모습을 비춘다. 영화는 마치 그들의 관계성과 프레임 속에 남겨진 그들의 이야기가 촌극이라는 듯, 전임을 주축으로 한 무대를 구축하고, 무대 위에서 밝혀질 그들의 극을 영화 속 인물들에게서 탐색하라는 태도를 일관한다.
여대를 배경으로 삼은 영화는 시작부터 전임의 입으로 경계를 구분 짓는다. 분위기가 삼엄해져, 남성의 출입이 어려워졌다는 사정은 결국 경계 내에서 허락받을 수 있는 영혼은 여성이 된다는 규정이 된다. 동시에 시언의 출입을 허가해 줄 수 있는 파수꾼은 전임의 권한이다. 시언이 오기 전 연출(하성국)은 다시 한번 그들의 권역에 침범하려고 하지만 전임의 화력과 갈등한다. 그녀의 힘은 이후 불륜을 저지를 것만 같이 보이는 교수와 외삼촌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는 것으로 이어지다 외삼촌의 1년 전 이혼 소식을 듣자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전임이 수용하는 곳, 혹은 그녀가 하나의 동력으로 등장해 무대는 기운을 얻고, 인물들이 서 있는 자리는 아주 짧은 단편적인 연극 ‘촌극’으로 완성된다.
전임은 베로 작품을 만드는 작가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10일간의 일정 중 그녀는 한데로 모이는 세 개의 물줄기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드는 데, 수유천-중랑천-한강으로 이어지는 그림의 수원을 찾으려는 듯 영화의 마지막 전임은 직접 걸어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흐르는 물줄기의 역동성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그 시점, 마치 멈춘 프레임 속에서 함께 식사하던 외삼촌과 교수의 그녀를 찾는 호명만이 울려 퍼진다. 이내 내려온 그녀는 미소를 띄운 채, 아무것도 없다며 히죽인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미소 짓는 여자, 혹은 아무것도 없을 거라 예상했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태도. 만족스러운 그 웃음이, 어쩌면 홍상수의 영화가 또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속삭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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