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가리〉리뷰: 영화로 그리워하기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지윤 님의 글입니다.
나무를 깎아 화살 만드는 법을 배우며 자연 속에서의 생존에 대해 고민하는 아들 홍민(문용일)과 그런 아들이 못 미더운 제일슈퍼의 사장, 아버지 대복(고성완). 이 부자의 갈등만큼 영화 〈빚가리〉는 격하게 싸우며 또, 격하게 화해하는 이야기이다. 그 화해의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영화가 꾀하는 갈등의 순간들은 때로는 수다스럽고 때로는 욕이 난무하고, 때로는 인물을 대신해 답답하다. 그럼에도 그 화해의 순간을 만나고 나면 〈빚가리〉가 달려온 갈등의 재현이 언제였나 싶게 영화가 건네는 따스한 눈빛까지 전해 받는다.
‘빚가리’, 빚을 갚는 일을 뜻하는 충청도 방언이라는 이 영화의 제목은 충실하게 빚을 갚는 일들을 보여준다. 그 빚의 중심에는 아버지, 대복이 있다. 대복은 이혼한 전 아내와의 사이에서 위자료를 내지 않아 갚아야 할 돈이 아직 남은 사람이다. 동시에, 늘 외상으로 담배를 사가는 원창(승형배)의 외상값이 300만 원에 달할 때까지 아직도 받지 못한 돈이 있는 사람이다. 돈을 갚아야 하는 사람이자 받아내야 하는 사람 사이에서 원창은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큰소리를 치기도 하며 반복되는 모순을 낳는다. 그 모순 사이에서 영화는 대복의 캐릭터를 통해 코미디 속에 선과 악이 불분명한 상태를 지속한다.
그 속에서 홀로 악의 얼굴을 열연하는 원창에게만 주어지는 흑백의 상상도 흥미롭다. 작은 컨테이너에서 무역업을 하는 원창은 거래처 스미스와의 통화에서 욕과 화를 쏟아붓고는 이내 짧은 상상에 들어간다. 그 상상 속 원창은 친절한 미소와 말투로 전화 통화를 하는 모습이다. 이후 원창의 상상은 두 번 다 제일슈퍼의 사장, 대복과 관련된 일이다. 외상에서 시작해 갈등이 심화된 원창과 대복이 슈퍼 앞에서 다투다, 원창은 벽돌을 들고 등을 돌린 대복에게 다가간다. 이 또한 원창의 상상으로 앞선 상상처럼 역시 흑백으로 이루어진다. 반복되는 흑백 시퀀스에 앞으로의 상상 또한 예측 가능해질 때쯤, 영화 속 원창과 대복은 슈퍼 앞에서 술을 나눠마시며,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부터 〈빚가리〉는 거센 분노와 거친 욕을 통해 갈등을 내세우던 것에서 전혀 다른 눈빛을 건네기 시작한다.
다시 한번 시작된 흑백의 상상에서 원창은 지하실 같은, 밖이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대복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본다. 영화의 마지막 상상은 홍민에게서 일어난다. 아버지를 이어 제일슈퍼를 운영하고 있는 홍민 또한, 원창이 보았던 것처럼 대복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한참 지켜본다. 밖이 보이지 않음과 동시에 흑백 넘어 빛이 가득할 것만 같은 공간에서 사다리를 오르는 것은 어쩌면 직관적인 묘사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갈등이 가득하던 영화가 그려내는 묵묵한 어떤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는 고요하고도 더 깊은 적막을 가져온다.
〈빚가리〉는 꿈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돈에 대한 이야기였다가 결국, 그리움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한다. 그 속에는 얽히고설킨 불편한 관계들이 있다. 고봉수 감독의 전작 〈습도 다소 높음〉에서 더위에 지친 여러 세계가 극장이라는 공간에 모인 것처럼, 〈빚가리〉에도 불편한 관계 속에서 인물들은 서로의 일상에 모여든다. 헤어진 부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부자, 외상을 갚지 않는 손님. 그렇게 서로의 갈등 속에서 흘러가던 영화가 결국 따스한 눈빛과 함께 놓아둔 감정으로 영화는 우리 앞에 크게 한 걸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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