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의 흔적을 따라
〈해야 할 일〉 인디토크 기록
한국독립영화 '8주간의 약속' 상영 캠페인 "1%가 먼저 시작합니다!"
콜라보 인디토크 4탄
일시 2024년 10월 21일(월) 오후 7시 상영 후
참석 박홍준 감독, 이노아, 서석규 배우
진행 오정민 감독(〈장손〉연출)
* 관객기자단 [인디즈] 서민서 님의 기록입니다.
영화 속 인물을 향했던 질문의 방향이 우리를 향하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그저 한 발짝 물러선 채 영화를 바라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게 된다. 스크린을 넘어 고민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 순간, 영화는 세상을 서서히 바뀌게 하는 힘이 생긴다. 그 힘의 가능성을 믿고 더 좋은 작품, 더 나아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했을’ 고민의 흔적들을 따라가 본다.
오정민 감독(이하 오정민): 안녕하세요. 영화 잘 보셨나요? 오늘 〈해야 할 일〉 박홍준 감독님, 서석규 배우님 그리고 이노아 배우님 모시고 인디토크 진행해 보겠습니다. 저는 또 다른 개봉작인 〈장손〉 감독 오정민입니다. 지금 저희가 ‘8주간의 약속’ 상영 캠페인을 열고 있습니다. 캠페인의 일환으로 〈해야 할 일〉 박홍준 감독님과 배우분들 모시고 대화를 진행하게 됐는데요, 우선 인사 먼저 부탁드리겠습니다.
박홍준 감독(이하 박홍준): 안녕하세요. 〈해야 할 일〉 연출한 박홍준입니다.
이노아 배우(이하 이노아): 안녕하세요. 재이 역할을 맡은 이노아라고 합니다.
서석규 배우(이하 서석규): 안녕하세요. 이동우 역할을 맡은 배우 서석규입니다.
오정민: 저는 〈해야 할 일〉과 같이 상영을 굉장히 많이 했었죠. 부산 때부터 1년 동안 계속 상영을 같이하고 있는데요, 제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봤을 때 기획이 재밌다고 생각했었어요. 왜냐하면 독립 영화들은 강자와 약자를 나눴을 때 소수자의 편에 주로 서는데 이 영화는 갑과 을의 이야기가 아니라 병과 정의 이야기잖아요. 그 지점이 저에게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 같고 그들끼리 사투를 벌이지만, 결국엔 채권단의 판단 하나로 모든 노력이 물거품 된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도 했어요. 인터뷰를 읽어보니까 감독님께서도 인사팀에 근무했던 경험이 있으셔서 그만큼 디테일한 지점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됐는데요, 시나리오보다도 미술이 되게 힘드셨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홍준: 미술이 힘들었죠. 일단 저희 영화는 로케이션이랑 미술이 떼려야 뗄 수 없는데 장소 구하는 것 자체부터 되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조선소를 섭외했어야 했는데 조선소가 굉장히 큰돈이 왔다 갔다 하고 또 위험한 곳이어서 저희가 드릴 수 있는 적은 로케이션비를 받으면서까지 굳이 영화 촬영팀을 들이려고 하는 곳은 사실 없었죠. 그나마 호의적인 곳들이 수리조선소들이었어요. 제가 원래 배경으로 썼던 장소는 선박을 건조하는 조선소였는데 수리조선소는 공간이 좁아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처음에는 아예 사무실 창밖 배경을 전부 합성할까 이런 고민도 했었는데요, 리얼리티가 떨어질 것 같아서 다른 장소도 조금씩 더 찾아보다가 대표님 찬스로 부산에 있는 수리조선소를 찾았어요. 그래서 저희가 그곳을 운 좋게 섭외했고 비어 있는 공간을 다 사무실로 세팅했죠. 미술 감독님이 이전에 오피스물을 하신 적이 있어서 오피스 세팅에 대한 이해가 있으셨어요. 그래서 같이 상의하면서 사무실 분위기를 채워 나갔고 모니터 화면이나 유인물 자료 만드는 건 저랑 연출팀이 같이 고생했던 것 같습니다. 연출팀이 코딩 배워가면서 웹 페이지 만들고 엑셀 자료 같은 건 다 제가 만들고. (웃음)
오정민: 사실 관객분들은 전혀 모르실 수 있겠지만,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소품이 한두 개가 필요한 게 아니다 보니 그 부분에서 노고가 돋보였던 것 같아요.
박홍준: 사실 이런 것들을 제일 잘하는 사람이 저였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웃음) 회사 일을 해본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스텝 배포용으로 시나리오를 이해하기 위한 가이드도 만들었던 기억이 나요.
오정민: 많은 인물이 나오고 많은 자료가 필요한데도 이렇게 영화가 한 번에 이해가 간다는 건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감독님이 고민이 많으셨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적은 예산에도 미술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감독님 말로는 조금 빈틈이 보인다고는 하지만, 사실 배우들의 열연 덕분인지 저는 그런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예산이 더 큰 영화라고 생각했어도 그렇게 납득했을 것 같습니다.
부산에서 영화를 보고 이 영화의 어떤 게 좋았냐고 저에게 물으셨을 때, 공간과 배우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 서석규 배우님 보고 정말 매력적인 배우다, 나중에라도 한번 같이 작업해 보고 싶다고 할 만큼 팬이라고 길게 말씀드렸는데 저는 배우의 첫 등장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서석규 배우님의 첫 등장이 뭐랄까요, 직장인의 피로감이 너무 잘 담겨 있었어요. 그런 세팅 값들이 이 공간, 이 팀의 분위기를 한 번에 딱 보여줬던 것 같거든요. 그래서 처음 캐릭터에 어떻게 접근하셨는지, 첫 등장에 대한 고민이 어떤 게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서석규: 일단 〈해야 할 일〉 속 모습 중, 반은 제 실제 피로도고요. (웃음) 다음은 이동우 차장을 만들어주신 메이크업 선생님의 노력이었어요. 저도 처음 시사회에서 제 모습을 봤을 때, 거의 사람 죽어갈 정도였구나 하면서 되게 놀랐어요. 이동우라는 캐릭터는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매 순간 열심히 하자’ 이렇게 이마에 붙이고 연기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엑셀이 너무 어려워서 감독님께 배우기도 했거든요. (웃음) 식당도 처음에는 그냥 밥 먹으러 가는 곳이었는데 촬영 의상을 입고 실제 일하시는 분들이랑 같이 밥을 먹으니까 연기하러 가는 게 아니라 출근하러 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배우로서는 연기하기 좋았어요.
오정민: 제가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인데, 동우가 참다 참다 부장한테 일 좀 하라고 화를 내고 2~3분도 채 되지 않아서 아까는 죄송했다고 사과한 뒤에 쿨하게 다음 할 일을 찾아서 해요. 이 장면이 이 사람들의 역사를 한 번에 보여주는 느낌이었어요. ‘아까 화내서 죄송합니다’ 이 대사가 대본이 있었던 건가요, 아니면 애드리브였나요?
서석규: 애드리브였어요. 동우가 화를 내고 감정이 솔직하게 나오더라도 팀을 위해서 죄송한 마음을 표현해야 이 사람들이 계속 같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탄생한 애드리브입니다.
오정민: 사실 저는 대본에 적혀 있지 않은 애드리브에 대해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입장인데 감독님께서는 좋게 생각하고 이 장면을 쓰신 게 진실성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혹시 그 장면에 관해서 얘기해 주실 게 또 있을까요?
박홍준: 사람마다 연기를 하면서 몰입하다 보면 인물에 동화돼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는 현장에서 머리를 굉장히 쥐어뜯기는 합니다만, 그런 순간이 나왔을 때나 배우들이 먼저 제안했을 때 괜찮을 것 같으면 일단 하자고 하는 편입니다. 아닌 것 같으면 편집하면 되니까요. (웃음)
서석규: 이동우가 저라는 사람이 많이 녹아 있는 인물이어서 어떤 부분들은 서석규가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접근해서 그런지, 저라면 이 상황에서 솔직한 감정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이다음에 이동우는, 서석규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다시 생각해 봤을 때, 화를 내고 한번은 대들지만 죄송하다고 바로 말했을 것 같았어요. 저도 그렇게 살아왔고 살고 있기 때문에 저의 이런 모습들을 조금씩 반영했던 것 같습니다. 감독님께서 허용해 주시기도 했고요.
오정민: 그 순간에 애드리브를 한 석규 배우님과 감독님의 선택이 이런 재밌는 장면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노아 배우님은 단편 영화 때부터 많이 뵀었는데 이번 영화는 다른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영화가 진행되면서 단계별로 레이어가 달라진다고 느꼈었거든요. 준희를 이해하려고 어떻게든 견디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눌린 것들이 조금씩 삐져나온다거나 플랫하게 보이지 않게 캐릭터를 계속 확장해 나가셨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영화가 회사와 준희 중심의 이야기지만, 배우님은 어떻게 그 안에서 재이 캐릭터를 만들어 나갔는지 궁금합니다.
이노아: 레이어가 보인다고 말씀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감독님께서 써주셨던 초고에 다 있는 모습들인데요, 그 부분이 자칫하면 메인 서사에 너무 묻히진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면서 저도 석규 배우님처럼 캐릭터에 제 모습을 일정 부분 넣어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어떤 부분은 재이 캐릭터로 존재하지만, 또 어떤 부분은 나였으면 좋겠다, 내가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저도 적극적으로 애드리브를 했는데 감독님께서 잘 받아주셔서 통통 튀는 부분들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그래서 재이 캐릭터가 더 확장되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오정민: 보통 배우들이 본인이 준비해 온 세팅 값을 가지고 연기를 보여준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노아 배우님이 장성범 배우님과의 장면에서 짜여진 연기가 아닌 상대 배우의 연기를 자연스럽게 받으면서 리액션에 더 중점을 둔 연기를 하신 것 같다는 느낌이 굉장히 강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연기에 접근하는 방법이 이전과는 달랐는지, 아니면 감독님과 상의한 부분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노아: 말씀하신 대로 성범 배우의 연기에 맞춰서 리액션 위주로 연기했고 그 경험이 스스로도 되게 재미있었어요. 사실 늘 배우들은 세팅 값을 가지고 연기하기는 하지만, 현장에서 라이브 하게 티키타카 하는 것도 재미있더라고요. 또 성범 배우도 현장에서 보여줬던 의외의 리액션이 있어서 그 리액션을 받는 재미도 있었던 것 같아요. 감독님께서도 저희의 티키타카를 잘 지켜봐 주셨고요. 그래서 장면이 좋게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박홍준: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 인물들이 정말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 같이 느껴져서 저도 보면서 되게 재미있었습니다.
관객: 감독님께서 처음 작품을 구상하셨을 때, 사측의 부조리함이나 무원칙한 행동을 고발하고 싶으셨던 건지, 아니면 준희가 인간으로서 겪는 갈등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건지 궁금하고요. 영화에 촛불집회를 넣게 된 의미를 다시 한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박홍준: 일단 촛불집회를 통해서 어떤 성취를 이뤄냈고 그로 인해 좋게 바뀐 지점들도 분명히 있을 거지만, 정치 사회적인 부분 말고 경제적인 부분이랄까요? 지금 우리의 노동 현실에 대한 부분을 놓고 보면 사실 크게 달라진 게 있나 싶긴 하거든요. 그래서 영화를 보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 같이 고민해 보자는 생각으로 촛불집회를 넣게 됐고요.
이 영화를 만들게 된 처음 시작은 제 개인의 문제였어요. 제가 2015년에 회사에 들어갔는데 2016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조선업이 안 좋았었거든요. 거의 모든 조선소가 구조조정을 했고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였어요. 저는 그 당시에 막내여서 준희처럼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한 건 없고요, 그때는 정말 그 공간 안에 존재만 했던 것 같아요. 밖에서는 조금 더 세상을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 건지, 어디에 있는 건지 이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또 그때가 제가 단편 영화를 만들어보던 시기여서 언젠가는 이런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시나리오를 쓰면서 자료 조사도 하고 다른 사례도 알아보다가 저도 모르게 이런 문제를 고발하고 싶었던 마음이 생겨났던 것 같아요. 어찌 됐든, 사측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갑을 관계가 생겨나는 거잖아요. 이런 식으로 노동자들을 괴롭히거나 압박하는 상황을 많이 봐와서 이 지점을 비판하고 싶었던 것 같기는 합니다.
오정민: 노사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회사 측의 부당한 지시들 그리고 어쩌면 공정과 불공정에 대한 이야기로 저에게 다가오기도 했거든요. 저도 촛불집회가 나오는 이유에 대해서 궁금했는데 그런 의도가 있었다고 말씀해 주셔서 또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관객: 영화에 시위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하고 재이와 준희에게 시위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 있었다는 대사가 나온 것 같거든요. 시위가 인물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합니다.
이노아: 재이와 준희가 학교에 다닐 당시가 운동권이 활성화되어 있는 시대적 배경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들은 어느 정도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친구들 같아요. 그래서 대학 때부터 시위나 촛불집회 같은 사회운동에 많이 참여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재이와 준희에게 이런 사회운동이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해 보면, 나 하나를 시작으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열기와 혈기로 가득 찼던 대학 때와는 달리, 지금은 그저 사회에 찌든 10년 차 직장인들이잖아요. 그래도 마음속에 그때의 작은 불씨가 하나 정도는 남아 있을 것 같았어요.
오정민: 선배 기자를 만났을 때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충분히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마지막에 카페에서 재이와 준희가 길거리의 시위대를 보고 ‘나갈까?’ 하는 모습이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감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관객: 재이와 준희가 가까운 사이임에도 서로 일과 관련된 대화는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재이 같은 사람이 곁에 있다면, 고충이 있거나 힘들 때 고민 상담을 하거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준희는 그렇기보다는 혼자 끙끙 앓고 술로 달래는 느낌이 들었어요.
박홍준: 준희의 대척점에서 안정적으로 준희를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캐릭터가 필요했어요. 준희가 재이에게 본인의 속내를 털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우선 이 둘은 진보적인 성향이기 때문에 서로 동지적 관계이기도 해요. 그런 상황에서 준희 스스로도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서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재이에게 더 말하지 못하는 거죠. 선배에게도 얘기하고 엄마에게도 결국 다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막상 재이에게 제일 늦게 말하는 건 오히려 본인과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얘기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스스로의 죄책감이나 죄스러운 마음을 가까운 사람이 비판하거나 비난하면 조금 더 아픈 법이잖아요. 그래서 준희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저도 약간 그런 편이어서 제 모습이 준희에게 조금 반영된 것 같기도 해요.
관객: 만약 극 중에서처럼 본인이 구조조정 대상이 됐다면 순순히 나가실 건지, 아니면 투쟁하실 건지 세 분께 궁금합니다.
서석규: 불과 몇 개월 전이라면 달랐겠지만, 지금의 저라면 어떻게든 버텨야 합니다. 내년에 결혼해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웃음)
이노아: 어떤 포지션에 있는지, 또는 얼마나 제가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다를 것 같기는 한데요, 다 고려하지 않고 회사에 출근하기 싫은 일반 회사원이라고 하면...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버텨야 하지 않을까요? 그 자리에 지켜야만 하는 모든 것들이 걸려 있잖아요. 준희처럼 회사가 있어서 4대 보험이 되고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요. 이런 여러 혜택이 있어서 쉽게 포기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박홍준: 저도 제가 준희 입장이었으면 쉽게 그만두지 못했을 것 같아요. 회사를 계속 다녀서 연차도 어느 정도 쌓였으면 아마 가정도 있고 아이도 있었겠죠. 그래서 저도 어떻게든 버티면서 이직 자리 찾아보고 했을 것 같아요. (웃음)
아까 노아 배우님이 정말 사랑하는 일이라면 더 그만두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정말 일을 사랑하시던 분들이 오히려 더 크게 상처받고 그만두시기도 하더라고요. 어찌 됐든, 구조조정 대상이 됐다는 건 회사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거잖아요. 나는 이 일을 너무 사랑하는데 정작 회사는 내가 없어도 괜찮다는 뜻이니까... 생각할수록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관객: 영화를 두 번 보면서 특히 서석규 배우님이 리얼리티를 굉장히 잘 살려주셨다고 생각했어요. 실제 일하는 직장인 같아 보였을 만큼 연기를 잘 해주셨는데 어떤 식으로 연기하셨는지를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서석규: 일단 저는 회사 생활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평소에 관련 직업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많이 보면서 분위기나 말투 같은 특징을 따온 부분도 있고요. 처음 감독님께 이동우 캐릭터 자체가 경력도 많고 일도 잘하는 사람이라는 설명을 듣고 제가 그 캐릭터가 되기 위해서는 연습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촬영 중간중간 쉬는 시간마다 계속 연습하고 모르는 것들은 또 새로 배우면서 최대한 능숙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제 피로도가 화면에 잘 녹아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웃음)
오정민: 서석규 배우님이 제스처를 되게 재미있게 쓰시는 걸 보면서 실제 존재하는 인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준희에게 ‘주말에 뭐 해?’하면서 같이 일하자는 말을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는 식으로 하지만, 사실 ‘일 시키는 거 나도 미안해. 그런데 나만 일할 수는 없잖아?’라는 얘기였다는 게 너무 웃겼거든요. 왠지 이동우도 선배에게 그렇게 똑같이 당했을 것 같았습니다. (웃음)
감독님 괜찮으시다면 편집된 장면 중에 생각나는 장면 한두 가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박홍준: 원래는 준희가 인사팀에 발령 나고 인사 팀장이 임원 진급에서 떨어지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하거든요. 그러다가 본부장이랑 인사 팀장이 싸우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야기가 조금 산만해지는 것 같아서 뺐고요. 또 동우랑 준희가 둘이 술 한잔을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거기서 준희가 처음으로 작은 반항을 하거든요. 그래서 동우가 하기 싫으면 빼주겠다고 말하면서 너도 앞으로는 미래를 걱정해야 할 거라고 한번 준희를 제압해 주는데 초반에 흐름을 빠르게 잡다 보니까 그 장면도 아쉽게 빠지게 됐어요.
관객: 주요 인물은 아니지만 전문대졸 대리인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데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학벌에 대한 차별 같은 사회적 문제도 얘기하고 싶으셨던 건지 궁금해요. 그리고 서석규 배우님이 첫 장면에서 굉장히 시니컬하게 나와서 갈등을 가장 많이 만들 것 같은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묵묵하게 제 할 일을 하는 인물이더라고요. 그런데 내면의 갈등이나 자기 합리화 같은 감정이 표정에서는 느껴졌는데 대사로는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것 같아서 그 이유가 따로 있는 건지도 궁금합니다.
박홍준: 요새는 많이 없어진 문화기는 한데요, 아직도 제조업 기반의 몇몇 회사들에서는 단순히 사무 보조만 하는 여직원들을 뽑아서 퇴직할 때까지 계속 같은 일만 시키더라고요. 저는 이게 한 개인에게 되게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 인물의 발전 가능성을 회사가 일방적으로 아예 없애버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런 것들이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경연 캐릭터는 회사 안에서의 본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일다운 일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가능성을 계속 차단당했던 인물이잖아요, 이런 인물을 통해서 회사의 인사 정책이 겉으로는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합리적이지 않을뿐더러 많은 인물에게 상처를 주는 시스템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처음에 동우가 준희에게 시니컬하게 대했던 건 준희가 자재팀에서 왔는데 자재팀이 근무 평점이 안 좋다는 설정이었어요. 그래서 준희도 그 팀에서 왔으니까 별로겠지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처음에는 준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일을 잘해서 점점 마음을 열고 친하게 잘 대해주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인사 팀장이 있기는 하지만, 일을 실무적으로 직접 끌고 나가는 건 동우 본인이기 때문에 본인의 힘듦이나 고충을 어디 토로하기 힘든 캐릭터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오정민: 벌써 시간이 끝나가서요. 서석규 배우님부터 마지막 인사 부탁드립니다.
서석규: 8월부터 〈해야 할 일〉 전국 순회 상영이 있었었는데 그때마다 관객 한 분 한 분이 찾아와 주시는 게 정말 감사한 일이라고 많이 느끼고 있어요. 〈장손〉, 〈딸에 대하여〉, 〈그녀에게〉처럼 지금 상영 중이거나 앞으로 개봉하는 좋은 독립 영화들이 많이 있으니까 많이 관람해 주시고 많이 입소문 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노아: 월요일 저녁에 쉽게 발걸음하기 힘드셨을 텐데 이렇게 생각보다 많이 와주셔서 너무 감사하고요. 지금 독립영화 4개의 작품이 ‘8주간의 약속’ 상영 캠페인을 하고 있는데 여러분 모두 좋은 독립 영화를 알리는 데 조금 더 관심 가져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박홍준: 평일 저녁에 시간 내서 영화 보러 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오늘 진행해 주시느라 고생하신 오정민 감독님께도 너무 감사드리고 아직 〈장손〉 안 보신 분 있으면 꼭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웃음) 여러분 꼭 독립 영화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오정민: 〈해야 할 일〉 절찬리에 상영 계속되고 있고요. 다음 기회에 또 관객분들과 함께 대화 나눌 기회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인디토크 이렇게 마무리하겠습니다. 박수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Community > 관객기자단 [인디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디즈 Review] 〈럭키, 아파트〉: 닿지 못한 곳에 스며드는 냄새 (2) | 2024.11.09 |
---|---|
[인디즈] 〈공작새〉 인디토크 기록: 울지 말고 웃어 (7) | 2024.11.06 |
[인디즈 Review] 〈최소한의 선의〉: '최소한의 선의'가 만든 낙관의 자리 (3) | 2024.11.04 |
[인디즈 Review] 〈폭설〉: 계절이 지나간 자리 (2) | 2024.11.04 |
[인디즈 Review] 〈공작새〉: 엉겨 붙은 눈길 사이로 (1) | 2024.11.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