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한줄 관람평
성혜미 | 시린 시대 속 뜨거웠던 이들
송은지 | 묘지 없이 땅에 묻힌 사람들, 돌아갈 고향 없이 타지에 발디딘 사람들
이성현 | 존재만으로 가장 강력한 선언이 되는 다큐멘터리
최승현 | 시대에 의해 떠밀려버린, 표류하던 목소리
김윤정 | 누군가의 뜨거운 일생은 그 자체로 영화가 된다
승문보 | 단순 인터뷰 모음집이거나 의미 있는 기록의 아카이브이거나
오윤주 | 역사 바깥의 존재들을 기억하는 법
김정은 | 요원한 세계를 포착하고 올곧은 온기를 담아내는 카메라의 시선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리뷰: 역사 바깥의 존재들을 기억하는 법
*관객기자단 [인디즈] 오윤주 님의 글입니다.
예술의 역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누군가는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 누군가는 정치적 목적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누군가는 위로나 공감, 놀이, 혹은 질문을 던지는 행위에 대해 말할 지도 모른다. 분명 예술은 이러한 모든 요소들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큰 역할은 단연코 기억이라고 믿는다. 예술은 기억하기 위한 행위다. 예술은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채 주변부로 소외된 이들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왜 문학이나 공연이 아니라 굳이 영화여야만 했을까?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속 최국인 감독은 레닌을 인용하여 말한다. "영화는 문화 중 가장 대중적인 장르"이므로 매우 중요한 예술이라고. 프로파간다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으나 공산주의와 개인숭배가 다른 것만큼이나 프로파간다와 예술의 정치성은 다른 이야기다. 모든 예술은 정치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 영화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모스크바 8진 중 현재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종훈 씨가 김소영 감독에게 묻는다. 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느냐고. 김소영 감독이 답한다. “이런 특별한 상황 속에서, 영화로 세상을 보고 영화로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김종훈 씨가 대답한다. “Спасибо(고맙습니다).”
나는 일제강점기를 겪어본 적 없다. 냉전시대도, 한국전쟁도, 독재도 겪어본 적이 없다. 전쟁을 겪어본 적도 없고, 반공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다. 나는 다문화 시대에 태어나 국제화 교육을 받고 자라난 세대다. ‘통일은 우리의 꿈' 같은 포스터를 만드는 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빨갱이'라거나 ‘종북'과 같은 단어들이 너무 생소하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겪어본 적이 없다고 그 모든 일들을 없던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 시대를 생생하게 살아낸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다. 그들의 후손인 내가, 수없이 많은 이들의 피와 뼈를 딛고 이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다양한 것들을 좀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억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역사는 승리한 자들의 손으로 쓰이고 패배한 자들은 지워진다. 때문에 역사책만 들여다보고 있다가는 평생을 세상에 속은 채 변명거리도 되지 못할 무지와 오해로 점철된 삶을 살다 갈 것이다. 나는 영국보다는 아일랜드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고, 스페인보다는 아메리카 인디언(Native American)의 언어가 궁금했으며, 유럽보다는 아랍 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남성보다는 여성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 소수자에 대해 공부하는 일은 쉽지 않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온갖 매체를 통해 쉽게 주입되는 주류의 정치에서 벗어나 스스로 파헤치고 찾아다녀야만 한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공부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 바로 북한에 대한 이야기다.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힘이 센 여권(旅券)을 가진 한국인은 웬만하면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곳을 방문할 수 있다. 가장 가까운 북한을 제외하고 말이다.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아직도 나이 지긋한 정치인들은 조금만 의견을 달리하면 서로를 빨갱이와 종북으로 몰아간다. 사상과 발화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온갖 해악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하게 공산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금지된다. 한국에서 허용되는 북한 관련 콘텐츠는 그들을 빨갱이나 간첩으로 몰아가는 내용이거나 구질구질하게 못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만 치우쳐 있다. 우리에게 북한은 분노의 대상이거나 연민의 대상이다. 북한 사람은 괴물이거나 피해자다. 중간은 없다. 이런 흑백논리는 우리 모두를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들도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한국 내에서 북한의 역사나 정치문화적 상황에 대한 객관적이고 흥미로운 정보를 접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한국 바깥에서 접하기가 더 쉬운 지경이다. 미디어에서 비추는 북한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엇이 진실인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국을 벗어나 중앙아시아로 향한다. 우리 모두가 목말라하고 있는 진실에 조금 더 가까워지기 위하여.
이 영화를 볼 때의 충격은 <레토>(2018)를 처음 봤을 때의 혼란스러움에 버금가는 정도의 충격이었다.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의 배경에 고려인의 뿌리를 가진 채 러시아의 대중문화를 이끌었던 빅토르 최의 목소리가 깔리며 감동이 더해진다. 김소영 감독은 고려인이라는 디아스포라에 주목하며 '망명 3부작'(<김 알렉스의 식당: 안산-타슈켄트>(2014),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2016),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을 만들었고 <굿바이 마이 러브NK : 붉은 청춘>이 그 대미를 장식한다. 내가 그 동안 너무 무지했던 탓도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 담아내는 이야기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별세계 같았다. 특히 모스크바 8진 중 한 명인 최국인 영화감독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너무 흥미로웠다. 최국인 감독은 만주에서 조직된 조선의용군 중 하나인 '연안파'에서 항일투쟁을 했고 북한에서 배우로 활약하다 한국전쟁 당시 소달구지에 촬영 장비들을 싣고 무사히 후퇴한 공로로 모스크바 영화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 후 모스크바 8진 중 한 명인 허웅배가 김정일의 개인숭배 사상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8진 모두 대학에서 퇴학당하게 되고 그들은 러시아를 떠나 중앙아시아 각지로 망명하게 된다. 망명 후 카자흐스탄에 정착한 최국인 감독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고 <용의 해>(1981)라는 작품으로 국가상까지 받으며 영화감독으로서 성공한다. 그는 한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카자흐스탄어를 할 줄 안다. 새로운 언어를 배워 일상생활이 가능해지는 것만도 대단한데, 새로운 언어로 예술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결코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1926년생인 최국인 감독은 아주 오래도록 해오고 있었다. 영화는 2015년 작고하신 최국인 감독의 마지막 모습을 아름답게 담아낸다. 그의 마지막 모습이,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씀이 아주 오래도록 마음을 무겁게 했다. “우리 민족을 위해 영화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내 운명이 상당히, 비참한 운명입니다.” 타지에서 명성 있는 영화감독으로 살아가면서도 카자흐스탄에 대한 이야기만을 해야 했던 죄책감, 결코 잊을 수 없었을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과 사랑이 한데 뒤섞인 말씀 같았다. 운명이 그에게는 비참했을지언정 그가 살아온 숭고한 인생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내러티브의 힘은 대단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를 감동시키고 눈물 흘리게 한다. 지금은 돌아가신 고려인 극작가 한진의 아내인 지나이다가 그를 회고하며 들려주는 이야기는 너무 평범해서 특별하다. 이제는 백발이 된 그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힘에 부치는 듯, 혹은 감정의 격동을 억누르려는 듯 잠깐씩 입술을 부르르 떤다. 눈시울이 빠르게 붉어진다. 그의 기억이 조금도 녹슬지 않았으며 오히려 가장 생생하게 그를 기억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마치 대본이라도 읽는 것처럼 단호하고 확고한 말투로 그에 대한 기억을 읊는다. 그에게 기억이란 먼지 쌓인 서랍 뒤쪽에서 애써 끄집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의 주변에서 공기처럼 살아 숨 쉬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어려웠을 한국인들의 이름도 거침없이 읊는다. 러시아에서 한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간 날, 지나이다에게 직원이 물었다고 한다. “누가 당신에게 이 고려인과 결혼을 하도록 강요했느냐?” 그는 아직까지도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차를 한 모금 마신다. 긴 숨을 들이쉰다. 그 후에 다시 말을 잇는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세상에 사랑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랑은 인종, 국경, 그 모든 것을 뛰어넘습니다.” 이 질문이 나에게 던진 울림은 상당했다. 과연 우리는 알고 있을까? 세상에 정말 그런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빨갱이나 난민밖에는 될 수 없는 북한 사람이, 고려인이, 그런 사랑을 했다는 것을?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한평생 고민하며 괴로워했다는 것을? 그런 괴로움과 죄책감과 번민을 누군가는 카자흐스탄어로, 누군가는 한국어로 남겼다는 것을? 우리가 몰랐던 중앙아시아 어딘가에서, 그리고 지금 여기 한국에서도 수많은 고려인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마치 우리처럼 그들도 같은 사람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정말 알고 있을까? 아니,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까?
이 영화처럼 북한 청년의 생생하고 다채로운 삶을 담아낸 콘텐츠는 본 적이 없다. 또한 북한 청년을 시혜적인 시선이 아닌 같은 사람으로서, 존경하는 예술인으로서, 뿌리 깊은 고려인으로서, 그리고 조국을 사랑한 애국인으로서 조명한 다큐멘터리 역시 처음이었다. 그들이 재연 배우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이며 이 영화가 픽션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온다. 누가 그들의 삶에 반박할 수 있을까. 누가 감히 그들을 단지 북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모욕할 수 있을까. 그들이 걸어온 삶의 궤적이 철저하고도 다양한 고증을 거쳐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한국에 걸려 있다. 그 앞에서 우리는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밖에는 할 수 없다. 진실로, 우리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진실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존재를 지워버릴 수 없듯 기억될 만한 기억은 어떻게든 전승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영화가 더 다양한 방식으로 더 다양한 것들을 기억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역사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을 더 담대하게 끌어안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모두 어떤 지점에서는 소수자이므로 남을 배격하고 공격하는 방식으로는 그 누구도 해방될 수 없다.
모스크바 8진의 삶은 역사에 새겨지지 않았지만, 격난의 세월이 고스란히 새겨진 최국인 감독과 김종훈 감독의 얼굴, 그리고 지나이다의 얼굴 그 자체가 역사였다. 그 얼굴의 힘, 말의 힘, 진심의 힘을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체험했다. 작년, 11년 만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같은 해, 제주 예멘 난민 수용을 둘러싼 사회적 쟁점이 불거졌다. 우리는 분명 생산적이면서 인도적인 논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더 이상 무지를 근거로 한 혐오는 용납될 수 없다. 혐오의 정치는 언제나 자멸해왔다. 역사가 증명한다. 지나이다가 말했듯 이 세상에 사랑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의 내일은 달라질 수 있다. 영화를 통해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 주변부에서 중심을 바라보게 될 것이며, 그 지형이 생각보다 불리하지만은 않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바깥의 존재들을 기억하는 영화들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더 이상 안과 바깥을 나눌 수 없게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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